7화 루의 신도 (2)
[레벨이 올랐습니다!]
몬스터들의 시체가 나뒹구는 동시에 에일은 레벨 4에 다다랐다.
휘릭! 검을 빙글 돌리며 피를 털어냈고, 어깨 위에 걸쳐 짊어졌다.
“이거 엄청나잖아?”
동시에 상대한 세 마리의 뿔토끼, 녀석들의 시체가 널려 있는 모습을 둘러보고는 에일은 탄성을 내뱉었다.
자신의 전투임에도 일반 검을 사용할 때와는 확연히 차이를 느낄 정도로 차원이 달랐다.
몬스터를 상대로 거리 유지도 쉬웠고, 다수를 상대로 여럿을 베어 쓸어버리기도 쉬웠다.
처음 쓰는 장검류 무기에 익숙해져 컨트롤이 조금 더 섬세해진다면 엄청난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워로드를 하다 보면 인생 무기 하나쯤은 찾게 된다더니… 바로 이런 걸 말하는 거였나?’
워로드에서는 기본적으로 워낙 다양한 무기가 있는 데다가, 정해진 직업 안에서도 별로 선택할 수 있는 무기가 많았다.
그렇기에 유저 자신에게 잘 맞는 무기를 찾는 일 역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에일의 경우엔 바로 이 장검이었고, 호쾌한 타격감과 상당한 위력, 무엇보다 손에 착착 감기는 게 기분이 끝내줬다.
가상현실 게임 중에서도 최고의 재미를 보장해 주는 워로드였으니, 목마른 게임광이었던 에일에게 있어서는 마약이나 다름없었다.
‘생계 신경 안 쓰고 주야장천 즐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에일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시장이 워낙 커져 전업 플레이어로 먹고사는 이도 굉장히 많았고, 일단 규모가 괜찮은 길드에 들어가면 어지간한 대기업은 우스울 만큼 높은 급여를 받아 가며 활동할 수 있었다.
물론 안정성은 일반적인 직장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거대 길드의 소속이나 뛰어난 상위권 플레이어가 아님에도 그 정도 벌이가 가능하다는 것은 워로드가 상업적으로도 얼마나 덩치를 불리고 있는지 잘 알려 주는 지표였다.
하지만 에일은 그런 생활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무려 1년이나 늦게 시작한 후발주자인 데다가, 당장 내일도 편의점에 출근해야 생계가 이어지는 하루살이 인생이었다.
‘그래도 당분간은 충분히 여유 있을 만큼 돈도 생겼고, 평생 못 할 줄 알았던 게임도 멀쩡히 할 수 있게 됐으니 행복한 거지.’
“꺄아악!”
“응?”
나름대로 스스로의 상황에 만족하고 있는 찰나, 이번엔 사냥터 저편에서 여자의 비명이 들려왔다.
에일은 곧바로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뛰었다.
결코 아이템을 얻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며 달려가는 게 아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보기 위해서였을 뿐.
“키이익!”
“미안, 미안, 미안, 미안! 잘못했으니까 저리 가!”
가까이 다가서자 두 마리의 커다란 뿔토끼에게 쫓기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입구의 시체도 그렇고 생각보다 배짱 있게 이곳에 도전하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었다.
물론 갓 시작한 초보자의 만용으로 죽는 사람이 대부분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 살려 주세요!”
에일을 발견한 여자가 간절히 소리쳤다.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는 걸 보니 아무리 가상현실 게임이라고 해도 몬스터에게 깔려 죽기는 무서운 모양이었다.
그러자 에일은 주저하지 않고 장검을 뽑으며 앞으로 나섰다.
다른 경우도 아니고, 이미 자신에게 직접 도움까지 청했으니 이번은 구해 주는 편이 나았다.
콰악!
힘껏 휘둘러진 에일의 장검이 뿔토끼의 머리를 쪼갰다.
일반 검보다 강한 힘이 실린 일격, 그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녀석은 기절 상태에 빠졌고, 에일은 곧바로 옆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이미 행동 불능 상태에 빠진 적을 무리하게 마무리하기보단, 놈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옆을 노리고 있는 다른 녀석을 제압한다.
후웅!
성난 뿔토끼의 뿔이 에일을 노렸지만, 허공을 갈랐다.
에일은 계속해서 거리를 유지하며 물러섰고, 빈틈이 보이는 순간 곧바로 장검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푸욱!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놈들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느려졌고, 주도권을 잡은 에일은 철저히 자신의 페이스대로 싸움을 풀어 나갈 수 있었다.
그러자 악명 높은 두 마리의 몬스터는 곧 시체로 변해 바닥에 널브러졌다.
[위험에 처한 약자를 무사히 구해 냈습니다!]
[당신의 정의로운 행동에 ‘빛의 심판자, 루’가 미소를 짓습니다.]
[여신의 총애 +0.11% (현재 50.11%)]
[빛의 교단 공헌도 +25]
[신앙심 스탯 +0.8]
‘역시나…….’
에일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워로드에서 신앙을 가진 이상, 해당 신의 특색에 맞게 플레이 스타일을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아마 원래 그의 스타일대로 아이템을 노리고 도움을 청했던 여자를 죽게 내버려 뒀으면 ‘여신의 총애’ 스탯이 상승 폭의 몇 배는 하락했을 것이다.
그래서 에일은 루팅할 아이템과 돈을 포기하면서 여자를 구했고, 그 이상의 보상을 얻을 수 있었다.
[여신의 총애 수치가 50%를 초과하였습니다.]
[자애로운 여신의 가호가 당신의 몸에 깃듭니다.]
[전투 관련 능력치, 매우 미미한 상승.]
알림창과 함께 에일의 몸에 잠시 따스한 기운이 어리더니 사라졌다.
‘0.11퍼센트라……. 나쁘지 않네.’
여신의 총애.
철저히 제멋대로인 플레이어들이 신도로서 그들의 교리를 맞게 행동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이자, 신앙을 가지려는 이유, 동시에 신앙을 가지는 것을 꺼리게 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플레이어가 신앙을 따를 경우에만 생성되는 총애 스탯은 그 수치에 따라 강력한 축복을 줄 수도, 저주를 받을 수도 있었다.
만약 총애 스탯이 50퍼센트 미만으로 떨어진다면 분노한 신격에 의해 치명적인 디버프를 주렁주렁 달게 되고, 반대로 50퍼센트를 초과한다면 플레이에 굉장히 도움 되는 버프를 주었다.
어떤 종류의 저주와 축복을 받게 되는지는 7개의 신격 모두 달랐지만, 에일이 선택하게 된 ‘루’의 경우 양쪽 모두 강력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만일 그녀의 마음에 들어 플레이어가 축복을 받게 된다면, 무려 전투에 관련된 모든 세부 스탯을 상승시켜 줬고, 총애 스탯이 늘어날수록 더욱 강력해졌다.
하지만 그런 강력한 혜택이 있음에도 일곱의 신격 중에서 두 손가락 안에 드는 비주류 신격인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 총애 스탯의 유지가 끔찍하게 어렵다는 치명적인 단점.
미친 듯한 원리주의자 신이기 때문에 요구하는 것도 많고, 만약 교리를 어기거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때 떨어지는 수치도 독보적이었다.
눈앞에서 악행을 보이거나 이미 쌓인 업보가 있다면 같은 길드원과 파티원 할 것 없이, 조금만 수틀려도 죽이라고 독촉하는 통에 총애를 유지하며 일반적인 플레이를 즐기는 게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뭐, 그것까지야 에일 역시 모두 알고 있었고, 대충 어떤 식으로 플레이해야 할지도 모두 생각해 둔 바가 있었지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이 그의 눈에 띄었다.
‘루가 미소를 짓는다니……. 이런 문구도 있었나.’
그의 앞에 나타난 시스템 메시지 중에 루가 미소를 지었다는 문구가 들어가 있었다.
원래 고작 이만큼의 총애 수치가 올라갔다고 해서 상태창에 해당 신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었다는 소리는 들은 적은 없었다.
그저 기계적인 메시지가 뜨는 게 전부라고 알고 있었던 에일은 아마 이번에 여신이 깨어난 것과 연관이 있나 추측을 했고, 그동안 겨우 정신을 차린 여자가 그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도…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아닙니다, 이 정도는 당연한 거죠.”
에일이 빙긋 웃으며 답했다.
방금까지 그녀가 떨어뜨릴 아이템과 돈을 생각하던 것치고는 굉장히 뻔뻔한 태도였다.
“저,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친구 추가할 수 있을까요?”
부끄러운지 그녀는 얼굴을 발그레 붉히며 물었다.
처음 보는 플레이어라 할지라도 서로를 친구 명단에 등록해 놓는다면 언제든지 다시 연락하거나 만날 수 있었다.
“친구 추가요?”
“네, 네. 아니면 이름이라도…….”
민망함에 두 손을 꼼지락거리던 여자는 에일의 정보창을 슬쩍 열어 봤다.
다른 플레이어라 해도 상대방의 기본적인 정보는 열람할 수 있었다.
<유저 정보>
이름: 에일
세력: 빛의 교단(루)
레벨: 4
직업: 이단심판관
“어… 어라?”
간단한 정보창을 읽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금방이었고, 눈앞에 둔 남자가 루의 신도라는 사실을 깨닫자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무리 초보라 해도 워로드에 관심이 있는 플레이어라면 모를 수가 없을 만큼 그들의 악명은 널리 퍼져 있었다.
거기다 루를 믿는 놈들은 하나같이 미친 광신도들이라며 절대 얽히지 말라는 지인의 조언까지 들은 바 있었다.
“죄… 죄송해요오!”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사냥터를 빠져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에일은 황당하게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비공개 처리를 안 해 뒀었구나.”
에일은 헛웃음을 한 번 흘리고는 곧바로 유저 정보를 비공개 처리했다.
미리 정보 열람을 비공개로 설정해 두면 다른 유저들이 읽어 볼 수 없었다.
‘이럴 거라 예상은 했지만……. 파티는 나중 가면 힘들겠어.’
역시나 루의 신도라면 유저들에게 있어 전문 막피꾼 수준의 기피 대상이었다.
스쳐 가는 유저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정보 공개를 비공개 처리해 두긴 했지만, 파티에 들어가거나 파티원들을 구할 경우,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는 것은 필수로 거쳐야 하는 단계였다.
플레이어 간 공격, 살해 행위에 전혀 페널티가 없는 워로드의 특성상 등을 맡길 상대의 신뢰성을 확인하는 건 기본 중에 기본이었다.
특히 레벨이 어느 정도 오르면 레벨과 소속뿐 아니라 장비 상태, 유저 평판까지 검색해 가며 확인하는 만큼 적당히 속여 넘어가긴 힘들었다.
“읏차…….”
한쪽 무릎을 꿇은 에일은 자신이 잡아 놓은 몬스터의 아이템들을 챙겼고, 시체를 가르며 다음 일정을 정리했다.
‘다음 사냥터는 레벨 5만 찍고 갈 생각이었으니 조금만 더 하면… 아니, 아니지. 지금 딱 돌아가서 퀘스트를 깨면 되겠네.’
에일은 지금 자신이 완료할 수 있는 퀘스트가 있다는 걸 깨달았고, 마지막 아이템까지 알뜰하게 챙기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다시 도시 내부로 향하기 위해, 곳곳에 있는 몬스터들을 적당히 피해 사냥터를 빠져나갔다.
하지만 바로 그때,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남자가 에일의 어깨를 붙잡았다.
“저기! 잠시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