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이단심판관-8화 (8/227)

8화 루의 신도 (3)

“…누구시죠?”

에일이 미심쩍은 태도로 물었다.

걸치고 있는 장비를 보면 레벨이 어느 정도 높아 보였는데, 이 주변엔 고레벨 유저가 들를 만한 곳이 없는 데다가 굳이 길 가는 초보자를 잡아 세울 이유도 없었다.

어쩌면 초보자들을 상대로 PK를 거는 악질 유저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디그타너스의 미가펜입니다.”

그의 말을 듣자, 경계하던 에일의 표정이 바뀌었다.

미가펜이라는 이름은 난생 처음 들었지만, 디그타너스에 대해서라면 알고 있었다.

이곳 도시 듀벨을 기반으로 나름 이름을 알리고 있는 길드였다.

‘혹시… 길드에서 나온 스카우터인가?’

재빨리 머리를 굴린 에일이 생각했다.

일단 해당 길드의 평판을 보면 막피나 비매너 행위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 없었고, 저만한 길드에서 4렙짜리 초보에게 먼저 말을 걸어올 이유라면 하나뿐이었다.

바로 싹수가 보이는 유망주의 영입.

워로드처럼 길드 간의 경쟁이 치열한 게임에서 쓸 만한 인재를 충분히 영입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후발주자들을 지원해 줌으로서 길드원을 늘리려는 길드가 굉장히 많았다.

특히 전투에서 실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굉장히 높은 워로드에서 떡잎을 알아보기란 비교적 쉬운 일이었고, 그런 유저에게 처음부터 이런저런 지원을 제공해 인맥을 다지고 나면 더 유명한 대형 길드와의 영입 경쟁에서 유리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저희 길드에 대해 들어 보신 적 있으신 것 같아 다행이네요. 멀리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는데 몬스터를 사냥하는 모습에 감명받았습니다. 저희 길드로 들어오시는 게 어떻습니까? 충분히 지원해 드릴 수 있습니다.”

정말 감명을 받은 건지, 아니면 단순한 영입 전략인지. 미가펜이 적극적인 태도로 다가오며 말했다.

하지만 에일은 제안을 더 이상 들어 보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그건 안 될 것 같네요.”

엄연한 후발주자의 신분.

분명 길드에 들어가면 여러모로 플레이에 도움이 될 것이다.

회복 포션처럼 필수적인 소모품들을 지원해 주고, 사냥을 가볍게 도와주거나,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인맥도 얻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어디를 가더라도 도사리고 있는 PK의 위협으로부터 1차적으로 보호를 받을 수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규모 있는 길드에 소속된 유저를 건드리면 골치 아파질 수 있기 때문에, PK꾼들이 쉽게 건드리지 않는다.

하지만 에일은 길드에 들 수 없었다.

“아… 혹시 이미 길드에 스카우트를 받은 건가요?”

“길드는 없습니다.”

“그럼 혹시 부캐릭터…….”

“아니요.”

“그러면 일단 문제 될 건 없네요! 저희 쪽에 110레벨 이상인 길드원만 90명이 넘습니다. 혼자 플레이하기엔 위험하실 텐데 보호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지 말고 테스트라도 한번 봐 보시죠. 길드 건물 안에 들어가 보시면 생각이 바뀔 겁니다.”

이미 거절을 한 번 당했음에도 미가펜은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쩝 하고 입맛을 다신 에일은 그에게 하나 물었다.

“저 이단심판관인데 괜찮으시겠어요?”

“이… 이단심판관이요? 그렇다면 루의……?”

간절하던 미가펜의 표정이 갑자기 난처하게 바뀌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둘을 감쌌고, 미가펜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며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즐겜하세요.”

“네, 님도요.”

* * *

놀랍게도 에일에게 접근한 길드는 디그타너스가 끝이 아니었다.

클라우드, 옴틱, 리쿼드.

하나같이 이 근방에 자리 잡아 어느 정도 세력이 있는 길드들이 사냥터를 빠져나와 도시로 복귀하려는 에일에게 접근했다.

아무래도 듀벨에서 시작한 이들 중 실력에 자신 있는 사람들은 초반에 뿔토끼가 있는 사냥터로 향할 것이었고, 그를 노리고 여러 길드에서 파견된 이들이 스카우트을 위해 주시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워로드의 시장이 커질수록 길드 간의 경쟁도 점점 심화되기 마련이었고, 기존의 실력 있는 유저들은 물론 싹이 보이는 신규 유저들을 영입하는 것조차 치열한 상황이었다.

“그러면 뭐 해? 난 교단 소속인데.”

그것도 직업 자체가 신앙을 믿어야 선택할 수 있는 전용 직업이라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물론 신앙을 가지고 있는 자도 길드에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길드라면 신앙을 지닌 유저들은 일체 받지 않았다.

반드시 신격의 부름을 받아야 하는 강제 이벤트나 총애 스탯으로 인해 행동이 제약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들의 존재는 거점전이나 레이드 등 길드 단체 활동에 커다란 지장을 주었다.

게다가 미친 여신으로 유명한 루의 신도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혹시 6대 길드가 스카우트한 거라면 신앙과 직업도 버리고 버선발로 뛰쳐 가겠지만… 그쪽은 굳이 이런 데서 신입을 뽑을 필요가 없으니.’

워로드 전체의 판도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6개의 길드.

거대한 자본과 압도적인 실력, 그에 걸맞은 화제성과 유명세까지 갖춘 그들을 한데 묶어 사람들은 6대 길드라 부르고 있었다.

대륙 내의 영토 대부분을 그들이 나눠 직간접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데다가, 길드원 하나하나가 준랭커급 고수들인, 감히 범접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절대 세력들이었다.

그의 기억상으로 대도시 듀벨을 차지하고 있는 주인은 그 6대 길드 중 하나인 ‘나이트메어’로 알고 있었는데, 그들은 저레벨 사냥터엔 길드원을 배치해 놓지도, 접근해 오지도 않았다.

이미 상위권 중에서도 최고의 플레이어들만이 모일 수 있는 곳인 만큼, 뒤쳐진 후발주자를 뽑을 필요가 없었다.

‘뭐, 됐어.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으니까.’

에일이 고개를 젓더니 도시의 성문 안으로 들어섰다.

성문 너머로 이어진 대로는 유저와 NPC들로 바글바글했고, 사람들 사이를 뚫어 가며 작은 길로 빠졌다.

단일 서버로 돌아가는 게임에서 엄청난 숫자의 유저를 수용해야 하는 만큼 도시 역시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온갖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북쪽 상업 지구를 빠져나가려는 순간, 한쪽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까지 한데 뭉쳐 무언가를 구경하고 있었고, 에일도 궁금증이 일어 사람들 틈에 끼어들었다.

“이봐! 제발 그만 좀 해, 이 멍청한 자식아!”

“웃기지 마! 네가 뭐라 하건 난 결코 포기하지 않아! 아직 수만 번이나 남았다고!”

두 남자가 언성을 높이며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검을 든 남자는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쉴 새 없이 내려찍고 있는 중이었다.

“저 사람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죠……?”

“글쎄. 저 자리에서 며칠이나 똑같은 연습용 허수아비를 때리고 있다니까. 저 사람 말로는 십만 번을 채우기 전까지는 절대 안 움직이겠다는데,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말려도 말을 듣지를 않아. 자기 말로는 히든 직업을 얻으려 한다나 뭐라나…….”

“꺼져, 이 빌어먹을 자식들아! 힘을 얻고 나면 날 비웃은 놈들을 모조리 죽여 주마. 그다음은 나를 무시한 거대 길드들을 모조리 부숴 버리겠어!”

허수아비를 치던 남자가 주먹을 불끈 쥐며 갑자기 복수심을 불태웠다.

“저… 저 녀석.”

무언가 커다란 충격을 받은 에일의 눈이 빛났다.

다른 사람들의 만류와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똑같은 자리에 서서 끊임없이 허수아비를 내려찍는 인내심과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자신이 선택한 길이 맞는 길일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신념.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잠시 얼이 빠져 있던 에일은 천천히 입을 열어 남자에 대한 평을 내렸다.

“미친놈이네.”

콧방귀를 낀 에일이 등을 돌렸다.

쓸데없는 구경에 시간 낭비를 해 버렸다.

상식적으로 게임사가 망하기로 작정을 한 게 아닌 이상, 여러 사람이 즐기는 MMORPG에 히든 직업, 그것도 사기적인 능력치의 직업 같은 걸 만들어 놓을 리가 없었다.

공정한 출발선에서 시작했더라도 시기심에 물어뜯는 이가 많은 법인데, 만약 한 명이 운 좋게도 사기 직업을 얻고서 미친 듯이 독주하고 있다면, 그동안 미련하게 노력하던 다른 수많은 유저가 미쳤다고 박수나 쳐 줄 리가 없었다.

공식 홈페이지가 마비될 정도로 개발진은 온갖 욕을 얻어먹을 테고, 한 달도 못 가서 망겜 딱지가 붙을 터.

아무리 자유분방한 게임을 표방하고 있다 해도 그런 시스템 따위를 도입하는 게임은 없었다.

그건 워로드 역시 마찬가지였고, 저 남자가 벌이고 있는 건 희대의 뻘짓이라는 단어로 간단히 요약 가능했다.

“세상 말세야, 말세.”

철저히 게이머로서의 사고 구조를 가지고 있는 에일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이었다.

혀를 차며 발걸음을 재촉한 에일은 얼마 안 가 깊숙한 뒷골목에 위치한 연금술 상점 앞에 다다랐다.

“어서 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던 여주인이 허둥지둥 뒤돌며 그를 맞이했다.

에일은 인벤토리를 비우기 위해 잡템들을 내다 팔았고, 깔끔히 거래가 마무리되자 퀘스트에 대해 슬쩍 운을 띄워 보았다.

“이제 다음 사냥을 나가 봐야 할 텐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혹시 이 주변에 일거리가 있을까요?”

“앗, 정말요? 혹시 제 부탁 좀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여주인이 잘됐다는 듯 손뼉을 치며 다가섰다.

“맡기실 일이라도 있나요?”

“그게… 제가 지금은 상점을 보고 있긴 하지만 사실 연금술에도 관심이 많거든요. 재능이 끔찍하게 없다고 스승님에게 쫓겨나긴 했어도, 언젠간 연금술사로서 대성하고 말 거예요. 독학으로 말이죠! 물론 그러기 위해선 쉽게 구할 수 없는 희귀 재료들도 필요해요. ‘마력이 담긴 붉은 눈동자’라는 재료가 있는데…….”

“붉은 눈동자라면, 혹시 이건가요?”

“네, 그거… 아앗?”

에일은 마치 기막힌 우연이라는 듯이 주머니에서 아이템을 꺼내 들었고, 그를 본 그녀는 화들짝 놀라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설마 그동안 분풀이처럼 정보를 모아 왔던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에일은 자신이 직접 선택하지도 않은 도시의 저레벨 반복 퀘스트들조차 쓸모 있는 것들은 줄줄이 꿰고 있었고, 그렇기에 지금 같은 일이 가능했다.

완벽한 인공지능을 가진 NPC가 스스로 퀘스트를 생산해 내는 워로드에선 보통 퀘스트를 한 번 클리어하면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횟수에 제한을 받지 않고 모든 유저가 깰 수 있는 반복 퀘스트도 많이 존재했다.

‘보통은 당연히 일반 퀘스트의 보상이 훨씬 좋은 편이지만… 이번 퀘스트는 아니지.’

-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붉은빛이 감도는 마력 폭발 수정 x 6]

[붉은빛이 감도는 신성 폭발 수정 x 6]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빨리 필요한 재료를 얻게 될 줄은 몰랐네요. 이건 제가 요즘 연구하던 물건들이에요. 주변 사람들의 상처를 회복시켜 주는 치유 마법이 담긴 강력한 수정이니, 모험가님이라면 아마 쓸모가 많겠죠.”

퀘스트가 완료되자 그녀가 밑에서 상자째 꺼낸 수정들을 통째로 넘겼다.

그리고 허전하던 에일의 경험치 바가 주르륵 차올랐다.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 5를 돌파하였습니다! 기초 직업 스킬이 한 가지 활성화됩니다. 습득할 스킬을 선택해 주십시오.]

[성화(기초)]

[증오의 칼날(기초)]

[광적인 순교자(기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