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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이단심판관-21화 (21/227)

21화 퀸즈 블론드 (4)

부딪힌 뒤 없어진 돈은 대략 30실링가량.

곧바로 도둑을 찾아 나섰지만 사람들로 넘쳐나는 경매장 안에서 몸을 숨긴 여자 하나를 찾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워낙에 빠르게 반응한 덕에 에일은 그 틈새를 순식간에 훑어보며 여자의 위치를 파악했다.

도적 계열 직업들의 스킬 ‘소매치기’는 밸런스를 위해 레벨 차이가 심하지 않은 상대에게만 1회에 한해서 시전이 가능했으니, 돈을 훔쳐간 여자는 에일 자신보다 레벨이 높아 봤자 얼마 차이 나지 않을 것이었고, 오히려 더 낮을 가능성도 있었다.

즉, 쫓아갔지만 레벨 차이로 인해 아무것도 못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고, 그저 실력만 우위라면 도둑 녀석을 탈탈 털어 버릴 수가 있다는 것이다.

“잡히면 넌 죽었어.”

살벌하게 말을 내뱉은 에일은 속도를 올렸다.

이미 거리가 어느 정도 벌어져 있어, 여자는 경매장을 빠져나가 골목길로 들어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놓칠 만한 차이는 아니었다.

혹여나 그대로 사라질까 재빨리 골목으로 들어가자, 안쪽 길목엔 싱글벙글 웃으며 은색 동전, 실링을 세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이상한 기척에 옆을 돌아본 여자는 헐레벌떡 뛰어온 에일의 모습에 경악했다.

“뭐야, 이걸 따라왔다고?”

“거기……!”

서라고 말을 마치도 전에 여자가 등을 돌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에일도 다시 여자를 따라서 달리기 시작했고, 여자가 고의로 끌어당겨 넘어뜨린 판자들을 훌쩍 뛰어넘으며 쫓아갔다.

그렇게 도시 안에서 추격전이 벌어졌고, 여자는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닌지 사람들 사이로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하지만 에일 역시 더 이상의 간격은 조금도 허용하지 않고 바짝 따라붙었다.

도시 곳곳에 있는 수로와 장애물들도 훌쩍 넘어가며 그녀를 쫓았다.

이 레벨 대에 30실링이란 거금을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날려 버릴 수는 없었다.

이제 따돌렸나 싶어 여자가 종종 뒤를 돌아봤지만, 어김없이 뒤에서 악착같이 따라오고 있는 그의 모습에 완전히 질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가 방향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틀자 상황은 바뀌었다.

여자는 굉장히 민첩한 몸놀림으로 벽과 창틀을 타고 넘어 건물의 지붕 위로 올라섰고, 에일은 그 모습에 잠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나 참… 고작 소매치기하려고 특훈이라도 한 건가.”

에일이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리는 사이, 여자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지붕 위에서 내려다봤다.

그리고는 그를 향해 웃으며 손을 한 번 흔들어 주고는 유유자적하게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에일이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고 있을 바로 그때, 에일의 시야 한구석에서 메시지가 왔음을 알리는 신호가 반짝였다.

발신인의 이름이 뜨지는 않았지만 지금 그에게 메시지를 보낼 사람이라고 해 봤자 한 명뿐이었고, 곧바로 메시지 창을 열어 보았다.

역시나 알리사에게 온 메시지였다.

- 저는 퀘스트 끝냈어요. 어디쯤이세요? 같이 식사나 해요. 보상도 괜찮게 받아서 한 끼 정도는 사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 죄송합니다. 갑자기 경매장에서 일이 생겨서 조금 늦을 것 같네요.

- 아… 도와 드릴까요?

- 괜찮습니다. 우선 먼저 가 있으세요. 금방 끝내고 가겠습니다.

마지막 메시지를 보낸 뒤 창을 닫은 에일은 느긋하게 팔을 당기며 몸을 풀었다.

“그럼… 잡아볼까.”

* * *

“하하! 지가 쫓아오면 뭐 어떻게 할 거야?”

에일에게 소매치기를 시전한 도둑, 트릭시가 지붕 위를 사뿐사뿐 걸으며 기분 좋게 웃었다.

소매치기에 당한 상대가 뒤늦게 돈이 사라졌음을 알고서 허탈해하는 모습, 그리고 자신을 놓치고 나서 얼빠진 표정을 짓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건 언제나 즐거웠다.

더군다나 이번엔 지붕 위로 올라가 따돌리자, 쫓아오던 남자는 닭 쫓던 개마냥 아무것도 못하고 멍하니 위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덕에 평소보다 두 배는 짜릿한 쾌감을 느낀 그녀였다.

“이래서 내가 이 짓을 못 끊지.”

트릭시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짤랑이는 동전 주머니를 높이 위로 던졌다가 한 손으로 받기를 반복하는 그녀는 건물 사이사이를 뛰어넘으며 움직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우측 방향 옥상에서 항아리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분명 이 주위는 사람이 오갈 만한 곳이 아니었음에도 느껴지는 인기척에 트릭시는 설마하고서 시선을 돌아봤다.

그러자 놀랍게도 따돌린 줄만 알았던 에일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 뭐야? 여길 어떻게……!”

그녀가 기겁하는 동안 갑자기 옆쪽 지붕에서 튀어나온 에일은 재빨리 건물들을 뛰어넘으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소매치기를 위해 도시 내 지형 미리 파악해 둔 트릭시처럼, 주위 지리를 파악하고 있는 건 에일 역시 똑같았다.

아니, 오히려 도시의 구체적인 지리라면 에일이 훨씬 더 자세히 알고 있었다.

지난 1년간 얻은 정보들을 제대로 머릿속에 넣어 취합하고 담아 둔 그였기에 트릭시처럼 잠깐 둘러본 정도로는 절대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각 도시의 구조를 자세히 파악해 두었다.

“좋은 말할 때 거기 서는 게……!”

“꺼져!”

트릭시는 당당히 중지를 내밀고는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이쪽은 가죽 셋에 도적이거든……? 잡을 수 있으면 잡아보던가!’

재빨리 머리를 굴린 여자는 또다시 쫓기는 상황에 빠졌음에도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달아났다.

애초에 경갑 방어구를 두르고 있는 에일은 장비의 무게와 세트 효과로 인해 가죽옷을 입었을 때보다 느릴 수밖에 없었고, 도적이 보통 민첩 스탯에 많은 투자를 한다는 걸 생각해 보면 스탯으로 인한 속도 차이까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유롭게 따돌릴 수 있을 거라는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에일은 총애 수치로 인해 여신의 은총을 받아 모든 스탯에 보너스를 받고 있는 중이었고, 거기에 더해 다른 스탯을 더욱 강화해 주는 광기 스탯까지 있었다.

직업이나 장비로 인해 민첩성에 조금 덜 투자한 정도는 가볍게 커버 가능할 정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일은 그녀가 어느 쪽으로 도망칠지 이미 알고 있었고, 예측 경로를 토대로 한발 빠르게 움직일 수가 있었다.

도둑질을 한 상대라면 최대한 경비병이 깔려 있는 곳을 피해서 움직일 게 뻔했다.

타앗!

“자… 잠깐, 으아악!”

여자가 뛰어오른 에일에게 붙잡혔고, 둘은 한참을 데굴거리며 바닥을 굴렀다.

먼저 덮친 쪽인 에일은 곧바로 털고 일어났지만, 불안정한 자세로 붙잡힌 트릭시는 휘말렸을 때 벽에 한 차례 크게 부딪힌 뒤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에일은 그 틈을 타 여자가 달아나기 전에 포박용 기본 밧줄로 칭칭 감는 데 성공했다.

마침 상대의 경로를 예측해서 지름길로 오는 동안, 중간에 보인 길거리 상점에서 저렴한 값을 주고 여럿 구입한 아이템이었다.

그리고 도둑질을 한 여자의 머리 위에는 아니나 다를까 이단의 징표가 큼직하게 찍혀 있었다.

스릉!

에일이 장검을 뽑아들었다.

“저기요!”

밧줄에 묶인 채 두 손을 살짝 올린 트릭시가 급하게 말했다.

“대… 대화 좀 해요!”

“으음, 분명 저도 대화를 하려고 했던 거 같은데… 누가 저더러 꺼지라고 하지 않았나요?”

“아… 아니, 그게… 그게 아니라요! 진짜 죄송해요! 말이 헛나왔어요. 이번만 봐주시면 다신 이런 짓 안 할게요.”

“네네, 그러시겠죠.”

에일은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스킬을 발동할 준비를 했다.

마침 조건도 딱 알맞게 맞아떨어졌으니, 이제 새로 배운 사도 전용 스킬 중 하나를 사용해 볼 차례였다.

파앗!

에일의 왼손에서 갑자기 하얀빛이 터져 나오더니 커다란 책 한 권이 나타났다.

새까만 바탕에 붉은 장식이 되어 있는 이 책의 정체는 빛의 교단 성서로, 심판관의 율법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트릭시는 난생 처음 보는 아이템을 사용하는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를 쳐다봤지만, 에일은 신경 쓰지 않고 곧장 한 손으로 책을 펼쳤다.

그러자 단순히 펼치기만 했는데도 남은 성서의 페이지들이 알아서 파르르 넘겨졌다.

넘어가던 페이지는 특정 부분에서 멈춰 섰고, 밝게 빛나며 일렁이고 있는 글씨를 보여줬다.

[형벌 선고의 장]

[죄인에게 선고할 형벌을 선택하여 주십시오.]

‘뭐야. 내가 알아서 선택하라는 건가.’

당황한 에일이 페이지 안을 들여다봤다.

이럴 거면 성서는 갑자기 뭐하러 준 건지.

이런 것들은 그저 형식적인 절차일 뿐, 죄목과 상관없이 심판관의 마음대로 형벌을 부여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일단 선택하라는 말에 따라, 에일은 페이지 속에 가득한 선택지들을 내려다보았는데 여러모로 엄청났다.

화형, 교수형, 참수형, 장살형, 음독형.

그 외에도 이런 게 있었나 싶을 정도로 정말 온갖 것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만은 확실히 있었는데, 여기에 적힌 형벌들은 모조리 사형에 포함되는 것들뿐이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짜증나게 굴었다고 해도 그렇지, 저지른 죄라고는 절도죄뿐인 여자에게조차 죽음을 선고하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율법서였다.

물론 에일은 스탯을 늘릴 기회에 감사할 뿐, 이러한 율법에 대해 별 생각은 없었다.

‘뭐… 오히려 좋지. 굳이 번거롭게 얽매일 필요 없고, 원하는 것만 고르면 되니까.’

하지만 막상 선택을 하려니 은근히 생각보다 고민되었다.

처형법마다 뭐가 다른지를 모르니 딱히 끌린다고 할 만한 선택지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에일은 묶여 있는 그녀를 불렀다.

“저기요.”

“왜… 왜요?”

트릭시가 그를 수상쩍은 눈으로 바라봤고, 에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어떻게 죽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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