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운칠기삼 (6)
떠들썩한 도시의 동부 광장.
넓은 공간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밀집해 있었고, 그 가운데 위치한 분수대 앞에 한 유저 무리가 모여 있었다.
워로드 밖에서도 서로 친한 친우 관계인 그들은 둥글게 모여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희 누나는 언제 오신데?”
“아, 금방 온다니까 가만히 좀 기다려 봐.”
가장 앞쪽에 서 있는 남자가 팔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다른 일행들은 흥분된 기운을 전혀 감추지 못했다.
“나 어제 밤잠 설친 거 알지?”
“하으, 6대 길드라니 너무 떨린다.”
“저기……!”
“와, 왔다……!”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에 쏠렸다.
그들의 시선이 닿는 곳엔 중저레벨 대의 유저들 사이에서 홀로 범상치 않은 장비를 갖춘 여성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눈에 띄게 세련된 디자인의 갑옷을 입고서 흑색 창을 지닌 긴 갈색 머리의 여인이었다.
“우와……!”
“아, 안녕하세요!”
일행이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다가온 여성은 활짝 웃으며 그들에게 답했다.
“안녕하세요. 모두 반가운 것이에요~.”
쾌활한 타샤의 목소리를 듣자 여자들은 꺄르륵 넘어갔고, 남자들은 마치 오랫동안 동경하던 대상을 본 것처럼 눈을 빛냈다.
워로드 최상위권에 당당히 발을 들이고 있는 유저.
무엇보다 플레이어들에겐 꿈이나 다름없는 6대 길드, 나이트메어의 소속이었으니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물론 그녀의 동생만은 그런 반응에서 철저히 예외였다.
“진짜 컨셉질 토 쏠린다. 한 대 때리고 싶네.”
빠악!
그 순간 궁시렁거리던 동생의 정강이가 가볍게 걷어차였고, 체력이 주르륵 떨어졌다.
고작 정강이를 한 대 얻어맞은 것으로 죽기 직전의 빈사 상태에 빠져버린 그였다.
“흐어억, 히… 힐! 빨리 힐 좀……!”
“쪼렙이 깐족거리면 이렇게 되는 것이에요. 아시겠어요?”
다급하게 외치는 동생의 앞에서, 한쪽 입술을 꽉 깨문 타샤가 살벌하게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동료의 힐로 간신히 살아난 동생은 앓는 소리를 내며 비틀비틀 일어섰다.
“저 괴물…….”
“그러게 맞기 전에 말 좀 잘 듣지 그러니.”
어깨를 으쓱인 타샤가 원래의 말투로 돌아오며 말했다.
평소에 즐기던 컨셉질은 그만두기로 했다.
기본적으로 워로드와 현실의 생활은 철저히 별개라는 문화가 자리 잡았기에, 컨셉을 유지하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지만, 지금은 동생도 앞에 있고 해서 왠지 뻘줌한 기분이 들었다.
스윽.
타샤가 허리에 손을 올리자 앞을 살짝 가리고 있던 망토가 걷혔고, 가려져 있던 문장이 보였다.
장비에 뚜렷이 박혀 있는 검은색 뱀의 문장, 나이트메어의 상징이었다.
“와… 와아…….”
“진짜 대박이다. 설마 내 주변 사람 지인 중에 6대 길드 소속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어…….”
다시 한번 감탄한 일행들이 웅성거리며 떠들기 시작했다.
더욱이 나이트메어 길드는 그들이 활동하는 에스마이어 지역 전체의 절대적인 주인이나 다름없는 곳이었으니 신비감이 배로 다가왔다.
물론 그래 봤자 집에서 부스스한 모습의 친누나를 매일 보는 동생의 시선에선, 그들이 과하게 호들갑을 떠는 것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 봤자 말단이잖아? 기껏해야 어디 창고 앞이나 지키고 있을 텐데.”
동생이 심드렁하기 짝이 없는 말투로 말했다.
그러자 오히려 그의 옆에 서 있던 친구가 분개하며 나섰다.
“야 이 멍청아!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그런 일은 당연히 산하 길드들이 하는 거지!”
“…뭐? 정말?”
“하아, 너 같으면 기본급만 최소 수억 씩 받는 초고수들을 데리고 거점이나 지키게 시키겠어?”
타샤가 나이트메어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인 것은 사실이었다.
보통 기본적으로 경비 같은 일은 NPC가 맡지만, 중요한 거점이나 장소는 조금 더 유연한 대처를 위해 유저들이 몇 명 섞여 함께 지키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6대 길드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라면 그 자체 하나하나가 귀중한 준랭커급 전력.
그런 고급 인력들에게 돈도 안 되고 스펙 업에는 하등 쓸모없는 경비 일이나 시키고 있는다면, 그건 오히려 길드 차원에서도 막대한 손해였다.
중요한 전투와 레이드, 퀘스트를 제외한 나머지 잡다한 일들은 대개 그들을 따르는 수많은 산하 길드들의 몫이었다.
“다행히 친구 분들은 너랑 다르게 박식하시네. 그렇지?”
“으윽…….”
한 방 먹은 동생은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타샤도 원래대로라면 이 시간에도 바쁘게 업무를 수행하거나 스펙을 올리는 데 열중해야 했지만, 길드 차원에서 해결해야 하는 특별 퀘스트로 인해 잠시 이곳으로 휴가를 받은 상황이었다.
퀘스트가 시작되는 시간까지는 아직 하루 정도 텀이 있었고, 대개 그만한 시간이 남았을 경우엔 그동안 다른 업무를 보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번은 길드의 입장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퀘스트였기 때문에, 불의의 사태가 없도록 목적지에서 미리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렇게 동생네 대학 동기들의 파티를 잠깐 도와주러 찾아올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나랑 파티를 해도 레벨 차이 때문에 경험치는 분배가 안 되는 거 알고 있지?”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그 정도도 모르겠어? 스킬북 좀 얻으려고 하는 거니까 괜찮아.”
경험치 공유는 불가능했지만, 보스가 떨어뜨릴 스킬북과 아이템의 양도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물론 워로드에서는 과도한 쩔 혹은 버스를 막기 위해, 레벨 차이가 클 경우 어느 정도 드랍률 조정이 생기긴 했다.
하지만 오히려 고렙과 파티를 해도 손해일 만큼 막대한 수준의 페널티는 아니었고, 가능만 하다면 어떻게든 받는 편이 저레벨 유저에겐 이득이었다.
“다들 뒤에서 적당히 거리 유지만 해 주시면 돼요.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즉사만 안 당하면 괜찮으니까.”
“네, 언니!”
“명심하겠습니다!”
타샤가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동기들은 눈빛을 반짝반짝 빛내며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마치 선생님을 올려다보는 유치원생들 같은 모습에 그녀는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사냥터를 향해 이동하려는 일행 속에서 타샤는 슬쩍 동생에게로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원래 들었던 것보다 인원이 적은데?”
“한 명은 미리 다음 순번 뽑으러 갔어. 사람 많은 곳도 아니고, 보스도 빨리 나와서 금방금방 트라이할 수 있을 거야.”
“알았어. 딱 여섯 번만 해 주고 가는 거다? 그러면 이따 치킨 사 준다 했지?”
“아니, 돈도 엄청 벌면서 무슨…….”
“그럼 용돈 끊을까?”
“아, 알았어. 알았어!”
골려 먹힌 동생이 투덜거리며 구시렁거렸고, 타샤는 웃음을 터트리며 살짝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 순간, 바로 뒤에서 인파를 급하게 헤치고 나타난 남자가 그녀의 어깨를 툭치고 지나갔다.
당연히 타샤의 시선이 그리로 쏠렸고, 누군가로부터 부리나케 달아나는 에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광장을 가로질러 수많은 인파를 급하게 헤쳐가다 보니 자연히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그리로 쏠렸고, 그 뿐만 아니라 뒤를 쫓는 추적자들의 모습까지 주목받기 시작했다.
“와, 저거 아마란스 길드 아니야?”
“레벨도 안 높아 보이는데 불쌍하네. 죽어라 도망치는 것 좀 봐.”
추적자들에게서 아마란스의 문장을 본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그들의 이름은 어지간한 유저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었고, 그 탓에 달아나고 있는 에일을 구해주려 나서는 사람도 없었다.
함부로 나섰다간 어떻게 될지 알기에 어설픈 동정심이나 의협심으로 나설 만한 자리가 아니었다.
이렇듯 대부분의 시선은 뒤를 쫓고 있는 아마란스 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직 타샤의 시선만큼은 달랐다.
‘저건…….’
잠시 자리에 멈춰선 타샤는 오직 에일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사실.
쫓기는 쪽이 무려 아마란스의 길드원 세 명을 상대로 도망가면서도 잡히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급히 지나간 남자였지만 짧은 순간에도 눈짐작이 끝났고, 높게 쳐줘도 40레벨을 넘지 않았을 저레벨 유저였다.
그런데 그 레벨 차이를 무시하고서 거리를 꾸준히 벌리고 있다니, 평범한 유저는 아님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미안, 급한 일이 생겼어.”
“뭐? 잠깐, 누나!”
“먼저 가있어! 조금만 있다 따라갈 테니까.”
파앗!
타샤가 에일을 뒤를 쫓기 시작했다.
이미 인파 속으로 에일과 추적자의 모습 사라진 뒤였지만, 저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만으로 짐작이 가능했다.
순식간에 움직인 타샤는 아마란스와 에일을 뒤따라 잡았고, 오히려 다른 길목으로 앞서가 스킬로 높이 도약하더니 건물 위로 훌쩍 올라섰다.
그리고는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옥상에서 구경을 이어갔다.
미끄러지듯 사람들 틈을 빠져나가고 있는 에일의 모습.
아마란스 측이 따라잡아 그에게 닿으려 하면 사물이나 샛길을 이용해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갔다.
경비병이 곳곳에 주둔하고 있는 도시라 동선에 제한이 생기고, 섣불리 공격 스킬을 가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대단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타고난 임기응변으로 양측의 속도 차이를 놀랍도록 잘 극복해 내고 있었다.
‘이거 재미있는데…….’
타샤의 눈이 옅게 빛났다.
이미 레벨이 높은 최상위권 대의 유저들이라면 숱하게 봐왔지만, 루키들의 씨가 말랐다는 평을 듣는 지금.
이처럼 흥미로운 원석을 만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화악!
쫓기던 에일의 팔이 덥석 잡혀 한쪽으로 끌어당겨졌다.
어느새 구경을 마치고 건물 아래로 내려온 타샤의 행동이었다.
정신없이 도망가던 중, 느닷없이 처한 상황에 놀란 에일은 다급히 그녀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보통 강한 힘이 아니었다.
“드디어 잡았다 이 자식……!”
그사이 가장 먼저 그를 따라잡은 루카스가 높게 쳐든 단검을 거칠게 휘둘렀다.
단단히 붙잡혀 있는 에일로서는 대처를 할 수 없는 상황.
하지만 그 피할 수 없는 공격은 에일에게 닿지 못했다.
쩌엉!
타샤가 루카스의 단검을 가볍게 쳐내고 반동으로 그를 밀쳐내기까지 한 것이다.
순식간에 주춤주춤 물러서게 된 루카스는 놀란 얼굴로 저려오는 팔을 붙잡았고, 다른 조원들도 뒤를 이어 도착했음에도 곧바로 달려들지 않았다.
“서로 화기애애한 사이는 아닌 것 같고… 이분은 저랑 따로 볼일이 있으니까 가던 길 가 주시겠어요?”
앞으로 나선 타샤가 가볍게 미소를 띠며 그들에게 말했다.
갑자기 난입한 그녀의 등장에 조원들의 시선은 자연히 그녀의 길드 문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들은 경악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검은 뱀의 문장.
미치지 않고서야 6대 길드를 사칭하고 다니는 이는 없을 뿐 아니라, 장비 상태를 보아 진짜 나이트메어의 길드원이 확실해 보였다.
적잖이 당황한 툴론은 잠시 그 자리에 뻣뻣이 굳었다.
혹시 에일과 나이트메어 길드가 처음부터 엮여 있었다면 그건 보통 문제가 아니었고, 순식간에 일이 커질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사이, 루카스가 앞으로 나와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저희보고 손대지 말고 물러나라는 겁니까?”
“네, 부탁드릴게요.”
“우린 정식으로 길드 업무를 맡아서 온 건데, 그쪽하고는 서로 무슨 관계길래?”
“물러나라고 했어요. 피 보기 싫으면.”
“…뭐야?”
그녀의 말에 루카스가 발끈해 앞으로 나섰다.
“이봐, 그만……!”
“아무리 나이트메어의 길드원이라도 상도덕이 있지. 이유도 없이 하등 상관없는 남의 일에 끼어드는 건…….”
파앗!
순간, 타샤의 모습이 사라졌다.
휘릭하며 창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루카스의 시야가 빙글 돌아갔다.
다리를 강하게 걷어차여 넘어지는 동안에도, 두 번의 창격이 눈 깜짝할 새에 날아들었고 단숨에 그의 숨통이 끊어졌다.
한 방 한 방이 급소를 노린 치명타.
암습 테크를 탄 창술가 특유의 폭발적인 기동성과 데미지 딜링이었다.
콰악!
흑색 창이 루카스의 시체를 뚫고서 바닥에 꽂혔다.
눈 깜짝할 새에 루카스가 죽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순간 놀라 반응하려 한 조원까지 빈사 상태로 제압되어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오로지 그녀의 움직임을 느끼고도 행동을 멈춘 조장, 툴론만이 멀쩡하게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었다.
‘여, 역시……,’
나이트메어라는 말에 뒤늦게 반응한 에일은 부분 공개되어 있던 그녀의 정보창을 열어 적혀 있는 내용을 확인했다.
무려 184레벨의 소유자.
에일로서는 처음으로 만난 ‘준랭커’급 플레이어였다.
“언제부터 아마란스가 이렇게 말길이 안 통했을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동생과 함께 웃고 떠들던 인물이라고는 믿기 힘든, 싸늘한 눈초리가 툴론에게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