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시작이 반이다
“읏차……!”
힘겹게 나무를 타고 오른 에일이 두터운 나뭇가지를 걸치고 위에 올라탔다.
그가 자리한 곳은 플피츠 산맥의 커다란 산채 앞.
높은 곳에서 보자 산적들이 주둔하고 있는 산채 내부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악명대로 크긴 진짜 크네.’
전반적으로 허름한 모습이긴 했지만 단순한 산채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규모가 컸다.
플피츠 산맥.
30레벨 초반의 인간형 몬스터인 산적들이 대거 자리 잡고 있는 사냥터였고, 굉장히 많은 산채와 몬스터로 유명한 곳이었다.
이곳 또한 산맥에 자리 잡은 수많은 산채 중 하나에 불과했고, 그럼에도 굉장히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엄청나게 많은 몬스터 개체수와 그로 인해 까다로운 난이도로 근방 유저들에게 상당히 악명이 높았다.
에일은 내려다보이는 광경을 통해, 돌아다니고 있는 인원의 배치나 대략적인 시설의 구조 등 하나하나 잊어버리지 않도록 꼼꼼히 눈에 담았다.
본격적으로 실전에 들어가기 전엔 미리 사냥터에 대해 파악해 두는 게 필수적이었다.
당연히 사전에 조사를 하고 왔기는 했어도, 자료로 보는 것과 직접 앞에서 두 눈으로 보는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뭣보다 평소하고는 다르니까. 조금 더 신경을 써 줘야지.’
에일이 이곳에 온 이유, 바로 영상을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난데없이 방송인으로 전향하려는 것도 아니고 웬 영상이냐는 물음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랭커의 자리를 향해 올라가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지금 에일의 상황으로써는 혼자의 힘만으로 모든 시련을 이겨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고, 만약 수많은 유저가 몸을 담고 있을 대형 길드와 마찰이라도 발생한다면, 그를 떨쳐내기 위해선 그와 상응되는 반대편 길드의 힘이 필요했다.
워로드 특유의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길드들의 관계는 복잡하게 꼬여 있었고, 그 덕에 약간의 센스와 함께 정세를 자세히 숙지하고 있다면 알맞게 이용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에일 자신이 그들과 협상 자리에 앉을 만큼, 동등한 위치에 있어야 성립되는 가정이었다.
‘이제 겨우 29레벨. 선발주자들에 비해 강한 무력도, 뛰어난 생산 기술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 필요한 건 영향력과 파급력이겠지.’
파앗!
에일이 인터페이스를 조작하자 시야 한쪽에 화면이 번쩍 떠올랐다.
워로드와 관련된 각종 커뮤니티에 연결된 화면은 게시판 한쪽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잡담들을 비추고 있었다.
그 이야기들의 주제는 잉골 숲과 퀸즈 블론드에서 나타났던 정체불명의 이단심판관에 대한 것들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만큼,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는 6대 길드를 비롯해 여러 인기 랭커들에게 쏠려 있었지만, 에일이 벌였던 일에 대해서도 아직 관심이 식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몬스터의 시체에 이런 흔적들을 남겨 놓을 수 있었던 건지, 다음 행적은 어디서 나타날지, 실제 실력은 어느 정도일지.
토론이 일어나거나 자기들끼리 싸우기까지 하는 둥, 아직 던져졌던 떡밥은 식지 않고 남아 있었다.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즐기는 컨텐츠인 만큼, 워로드에 돌았던 화젯거리는 정말 수많은 사람이 보게 되었고, 한 번 생긴 관심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리고 에일은 의도치 않게 자신의 행적에 쏠렸던 사람들의 관심을 본격적으로 이용해 볼 생각이었다.
혼자가 안 된다면 대중의 시선을 이용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다지 남의 시선을 즐기는 편이 아닌 데다가, 이런 컨셉이라면 더더욱 사절하고 싶었지만 사정상 어쩔 수 없었다.
이미 한참을 앞서나간 선두주자들을 따라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고, 더욱이 에일이 목표로 하고 있는 경쟁 상대는 워로드 최상위의 플레이어들이었다.
일곱 신격 중 하나를 뒤에 두고 있는 데다가 차별화된 성장 요소인 사도 시스템을 갖추고 있기는 했지만,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해야 했다.
‘당장 주변엔 이만한 사냥터가 없지.’
단순히 레벨만 올리기 위해서라면 경험치 수급이 가장 효율적인 사냥터를 택하면 그만이었지만, 이번 선택은 다소 맥락을 달리했다.
업로드할 영상을 통해 더욱 많은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켜야 했고, 에일의 기대치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단순한 컨셉 하나만으로는 부족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확 끌 수 있을 만큼 루키로서 주목될 만한 실력을 보여야 했다.
그리고 플피츠 산맥의 산채들은 근방 유저들 사이에서 인지도도 높았고, 실제 난이도에 비해 과대평가된 경향이 있는 사냥터였다.
거기다 30레벨을 앞둔 에일로서는 스킬북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던 참에, 산채 속에 섞여 있는 네임드 몹이 쓸 만한 등급의 스킬북을 떨어뜨리고는 했으니 여러모로 에일에겐 적격인 장소.
‘파악은 대충 끝났고…….’
에일은 본격적인 사냥을 시작하기 전에 인벤토리에서 각양각색의 포션들을 꺼냈다.
제한 지역의 희귀 재료들을 조달해 줬던 보답으로 알리사에게 받았던 고성능의 도핑 포션이었다.
연달아 여러 포션을 삼킨 에일의 전반적인 능력치들이 일시적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나무 아래로 주르륵 미끄러져 내린 에일이 가볍게 착지했고, 산적들이 지키고 서 있는 정문을 향해 당당히 걸어갔다.
산채의 입구와 내부, 건물 안과 지하 갱도까지.
쓸 만한 장면들을 뽑아낼 것까지 합쳐 공략에 사용할 시간은 1시간쯤으로 잡혔다.
“촬영 시작.”
에일이 장검을 뽑아 들었다.
* * *
- 여기 아직 영상 보신 분 안 계신가요?
- 플피츠 산맥 산적들 잡는 영상 맞죠? 저도 그거 봄.
- 엥, 무슨 일 터졌나요?
- 빨리 워튜브 한번 들어가 보세요.
세계 최대의 워로드 영상 전문 플랫폼, ‘워튜브’.
그곳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공개된 하나의 영상으로 인해, 워로드의 각종 커뮤니티에서는 또다시 한차례 파란이 일었다.
콰드드득!
끄아아악!
영상이 재생되자 시종일관 울려 퍼지는 산적의 비명과 그를 토벌하는 한 명의 유저가 화면을 채웠다.
얼핏 보면 그저 몬스터를 사냥하는 평범한 사냥 영상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었지만, 이번 영상의 주인공은 최근 화제의 중심에 서 있던 자였다.
퀸즈 블론드와 잉골 숲에서 유저들을 잔혹무도하게 살해했던 것이 목격된 미친 이단심판관.
화르르륵!
맹렬하게 덤벼드는 산적들의 목을 치며 처형해 버렸고, 빈사 상태에 빠져 쓰러진 산적들은 모조리 끌고 가 불에 태우거나 목을 매달아 버리는 모습이 그대로 영상 안에 생생히 담겨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산적 중 몇몇은 손을 빌며 애원하기 시작했음에도 단호한 심판자의 불길을 피할 순 없었다.
게임 속이라는 것을 아는 유저들의 시선에도 인간형 몬스터인 산적들이 다 불쌍해 보일 정도였다.
계속된 전투, 아니 학살에 산채 전체가 핏빛으로 물들었고, 참수한 머리들은 바닥을 뒹굴거나 여신에 대한 기도문을 읊어대는 이단심판관의 손에 붙들려 산채 곳곳에 주렁주렁 매달리게 되었다.
널브러진 시체들이 바닥을 메웠고, 산채 하나가 초토화되었다.
겁 없는 중저렙 플레이어들의 무덤이라 불릴 만큼, 난이도가 어렵기로 소문난 플피츠 산맥에서, 영상 속 사내는 혼자서 파티 플레이가 권장되는 산채 하나를 통째로 토벌해 버린 것이다.
특히 편집된 영상의 마지막에서는 시체들이 늘어선 산적 산채를 천천히 둘러보며 끝이 났는데, 거의 재앙이 휩쓸고 간 수준이었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목격담이나 다른 이가 올린 영상이 아닌, 이단심판관 본인이 스스로 직접 촬영해 올린 영상이었다.
- 미친 이번엔 자기가 찍은 거였네.
- 얼굴 가린 게 아쉽다.
- 섬뜩하기는 한데 왠지 보고 있으면 스트레스가 풀리는 기분이네요.
- 형님, 존경합니다. 저도 만나면 한번 묶어 주세요.
- 다음 영상은 언제 나오나요?
예상대로 댓글창의 반응은 뜨거웠다.
최근 활약하던 광신도 심판관의 다음 모습을 보고 싶어 하던 유저들은 썰려 나가는 산적들과 광기가 물씬 느껴지는 영상에 환호했고, 이번에 처음 접하게 된 사람들도 그의 모습에 놀라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중 조금이라도 눈썰미가 있는 자들은 컨셉뿐만 아니라, 영상 속 플레이어의 실력에 대해서도 주목하며 이야기를 떠들고 있었다.
- 와, 저 스펙으로 플피츠 솔플을 뛴다고?
- 그냥 미친놈인 줄 알았는데 빡고수였네요.
- 저 실력으로 왜 아직도 29레벨임? 늦게 시작했나.
- 눈호강 제대로 하네요.
- 이 정도면 거의 랭커급 아니냐?
- 잘하긴 하는데 오버하지 맙시다.
단지 시선을 끌기 위해 파격적인 퍼포먼스에 치중한 것이 아니라, 몬스터들을 처치하는 그의 솜씨부터가 굉장했다.
저레벨 유저답지 않은 노련한 움직임과 산적들에게 포위당한 상태에서도 보이는 침착함, 유연한 대처 능력,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스킬과 아이템의 선택까지.
심지어 스스로 일부 공개한 스펙에 따르면 레벨이 낮은 데다가, 장비는 꽤나 좋은 편이었지만 플피츠 산맥의 산적들을 파티도 없이 홀로 양학하기엔 부족한 수준이었다.
비교적 부족한 스펙임에도 어려운 사냥터를 상대로 철저히 실력만으로 극복했다는 것.
조금만 실수가 보여도 물어뜯는 넷상의 대법관 유저들조차 입 다물게 만들 만큼, 굉장한 실력을 보유한 자였다.
- 근데 이단심판관이 원래 저렇게 강했냐? 장비랑 레벨에 비해 데미지 엄청 잘 박히는데?
- 빛의 교단이 원래 총애 수치 관리만 잘하면 전투 스탯 다 올라서 원래 쎄긴 쎔. 길드 가입도 못 하고 미친 여신이 문제라 그렇지.
- 나도 버리는 셈 치고 부캐로 한번 해 봐야지.
덩달아 철저히 비주류인 빛의 교단의 전용 직업, 이단심판관의 재평가까지도 이끌어 냈다.
알다시피 유저들 사이에선 빛의 교단의 인식은 최악이나 다름없었고,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유명한 랭커가 있던 것도 아닌지라 실제 준수한 전투력에 비해 저평가받는 직업이었다.
사실 지금까지의 저평가는 전투 시 장점들을 모조리 뒤덮을 정도로 강력한 단점과 페널티의 존재 탓이 크긴 했지만.
어쨌든 이번 영상은 꽤나 많은 사람에게 이단심판관의 전투력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만들며 긍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빛의 심판자, 루’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습니다.]
물론 이만한 데미지가 나오기까지, 총애 스탯을 제외하고도 평범한 신도들은 가지지 못하는 ‘광기 스탯’의 도움이 있었다는 건 아무도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