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최선의 방어란 (2)
툴리 마을의 방어전이 또다시 시작되었고, 언데드 몬스터들이 평원을 검게 물들이며 몰려들었다.
역시나 저번 웨이브보다도 더욱 늘어난 듯한 몬스터들의 숫자였다.
하지만 이전 전투에서 엉망이 되었던 목책은 아직 수리 중이었고, 수적으로 열세인 지금 난전 상황이 되면 더욱 곤란했다.
때문에 전위들은 목책 바깥으로 나가서 방어선을 구축했고, 후방에서는 원거리 클래스들이 목책 위로 올라 지원사격이 원활토록 위치를 잡았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나름 워로드를 플레이하며 어느 정도 초보 딱지는 뗀 유저들이었다.
덕분에 몇몇 경험 많은 유저가 지휘를 하기 시작하자,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일찌감치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마법사들이 줄곧 캐스팅하고 있던 마법을 시전했다.
콰과과광!
느릿느릿 전진하던 좀비 떼 사이로, 일제히 여러 광역 마법이 떨어졌다.
재수 없게도 마법의 범위 안에 든 언데드들은 장렬히 산화했고, 딛고 있던 땅이 풍비박산 나며 뒤집어졌다.
하나 아직 그 정도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갈 수준이었다.
잔뜩 남은 언데드들이 시체 파편을 밟고서 밀고 들어왔고, 이번엔 궁수들이 쏘아낸 화살이 놈들에게 박혔다.
화살에 맞은 좀비들은 몸에 하나둘 구멍이 뚫리며 땅바닥에 고꾸라졌지만, 언데드 무리엔 좀비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키에에엑!
좀비들 사이에 중간중간 섞여 있던 구울들이 힘껏 팔과 다리를 박차며 달리기 시작했다.
화살 비를 뚫어 가며 빠른 속도로 달려든 놈들은 전방의 근접 클래스 유저들이 충돌하며 한데 뒤엉켰다.
녀석들은 무리를 구성하고 있는 다른 언데드들에 비해 민첩하고 강했다.
하지만 구울이 등장한 건 이번 웨이브가 처음이 아니었고, 아무런 대처도 해 두지 않았을 리 없는바.
약간 뒤쪽으로 빠진 채 놈들을 기다리고 있던 비교적 높은 전력의 유저들이 재빨리 앞으로 나서며 구울들을 요격했다.
푸욱!
키이이익!
가장 먼저 달려들었던 녀석들은 금세 유저들의 검에 베이고 목덜미에 창이 꽂히며 쓰러졌다.
다급하게 달려들었던 구울들의 행동은 오히려 악수가 되었다.
유저들은 포화를 뚫고서 뒤늦게 합류한 언데드들을 상대하며, 순조로이 싸움을 풀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서너 명이 사망하긴 했지만, 이대로만 순조로이 간다면 이번 방어전도 무난하게 성공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 쉽게는 풀리지 않을 거라는 듯, 다가오는 언데드 무리 속에서 갑작스러운 포효가 들려왔다.
구워어어어!
커다란 덩치의 언데드 몬스터가 전열을 붕괴시키며, 앞을 막아선 탱커 둘을 튕겨냈다.
흉폭한 유인원 같은 생김새의 엘리트 몬스터, 갑옷 트롤이었다.
이름 그대로 단단한 갑옷을 온몸에 두른 녀석은 네 갈래의 붉은 눈을 빛내며 유저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달려들었다.
“이 자식이……!”
이를 빠득 간 전사가 한 손 도끼를 치켜들고 갑옷 트롤에게 달려들었다.
무너진 진형을 수습하기 위해 어떻게든 놈을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만 했다.
카앙!
하지만 그의 공격은 너무나도 쉽게 가로막혔다.
두터운 갑옷 탓에 기본적으로 높은 방어력에 물리 공격 저항까지 일부 갖추고 있었다.
이렇다 할 데미지를 주지 못한 것은 물론, 대형 몬스터인 놈의 움직임을 저지할 수준조차 되지 못했다.
콰직! 콰직!
갑옷 트롤의 주먹이 그를 향해 수차례 내리찍혔고, 사방에 핏줄기가 튀었다.
다급히 방패를 들어 올렸지만, 그 정도로는 속수무책이었다.
막아서려던 전사까지 당하자 유저들 사이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파바박!
목책 위에 있던 궁수들의 화살이 날아들어 트롤에게로 박혔다.
하지만 화살은 충분히 깊숙이 박히지 않았고, 놈은 더욱 날뛰며 몸에 박힌 화살들을 부러뜨렸다.
여럿이 쏜 화살이 놈에게 데미지를 어느 정도 준 건 사실이었지만, 상처 부위가 다시 재생되어 어렵사리 깎아 놓은 체력도 금세 차올랐다.
언데드라고는 해도 트롤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 재생 속도가 굉장히 높았다.
“끄아악!”
전방을 막고 있던 유저 한 명이 또 나가떨어졌다.
사실 이 정도 인원이라면 쉽게 제압할 수 있어야 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의 그들은 갑옷 트롤만 상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훨씬 더 많은 몬스터가 몰려들며 전투가 이어지는 와중이었고, 그 한가운데에서 엘리트 몬스터가 난동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피해가 점점 커지는 중이었고,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젠장, 이봐! 그쪽에서 어떻게 좀 해 봐!”
“말처럼 쉬운 게 아니라고……!”
콰앙!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빗나간 마법이 애꿎은 땅을 두드렸다.
마법 공격을 집중해 놈을 저지하려 했지만, 갑옷 트롤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번번이 공격이 빗나갔다.
거기다 녀석은 전방을 맡은 유저들 사이를 어지럽게 헤치며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안 그래도 마법은 화살과는 다르게 딜레이가 있는 게 대부분이었고, 투사체가 향할 좌표 계산이 까다로웠다.
한데 덩치에 맞지 않게 민첩한 적의 속도에 아군 오사까지 고려하자니, 도무지 40레벨 근처의 유저가 쉽게 계산해 낼 수 있을 만한 게 아니었다.
“누가 스턴이라도 좀 먹여 봐!”
“젠장, 저렇게 날뛰는데 무슨……!”
이대로 가다간 아예 전선이 밀릴 수도 있는 상황.
그때 이제 막 도착한 또 한 명의 플레이어가 자리에 나타났다.
목책의 입구에서 전장으로 나온 남자.
그는 경갑 방어구 차림에 기다란 장검을 쥐고 있었고, 얼굴은 활성화된 투구에 완전히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당연히 한 명이 늘어난 것 정도로는 전황을 뒤집기 힘들었고, 한창 정신없는 와중이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던진 투척 단검이 갑옷 트롤에게로 날아갔다.
파악!
[특수 효과 ‘둔화’가 발동되었습니다!]
이음새 부분에 정확히 꽂힌 단검은 곧바로 특수 효과를 발동시켜 놈에게 둔화 상태 이상을 안겨 주었다.
덩치에 비해 말도 안 되는 속도는 여전했지만, 이전보다는 움직임이 훨씬 더 눈에 잘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동을 부리던 녀석의 거리가 가까워진 순간.
파앗!
즉시 땅을 박찬 에일은 놈에게 바짝 접근한 채 위로 뛰어올랐다.
갑옷 트롤의 시선 또한 그에게 향했고, 에일은 네 갈래의 붉은 눈과 마주할 수 있었다.
분명 두터운 갑옷 탓에 녀석의 방어력은 굉장히 높았고, 엘리트 몬스터의 체력상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기별도 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에일에게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콰앙!
백색 불꽃을 머금은 대검이 트롤에게 정통으로 내리꽂혔다.
첫 타격 한정으로 적에게 1.5배의 데미지를 입히는 탐식의 대검의 효과 덕에 더욱 강력한 충격이 놈을 강타했다.
쩌저적 금이 간 트롤의 갑옷과 함께 녀석은 휘청이며 뒤로 물러났다.
방금의 일격으로 상당한 양의 체력이 깎여 나간 탓.
에일에겐 방어구 관통력 40퍼센트를 항시 부여하는 유일 등급의 스킬, 방어 분쇄가 있었다.
높은 방어력 자체를 아예 무시할 수 있을 만큼은 아니더라도, 관통력이 부재한 다른 유저들에 비해 체감이 완전히 달랐다.
더군다나 방어 분쇄엔 상대의 장비에 직접 공격을 가할 시 내구도 추가 감소 효과까지 있었고, 단단한 갑옷이 금이 간 것 또한 그의 영향이었다.
휘릭!
땅에 착지한 에일은 녀석이 휘청이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상당한 관성이 실렸던 대검을 곧바로 창으로 스왑했고, 단번에 경로를 비튼 날카로운 창이 놈의 다리를 파고들었다.
[특수 효과 ‘중독’이 발동되었습니다!]
성화로 인한 화상과 창의 독 데미지는 물리 피해로 계산되지 않는바, 갑옷 트롤의 물리 저항 능력도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이미 이단의 낙인이 머리 위에 찍혀 있는 녀석은 에일의 맹공에 더 큰 데미지를 입었다.
그 탓에 단순히 재생 속도로 따라잡기엔 어림도 없을 만큼, 놈의 체력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이래서 솔플에 좋다는 거지.’
기본적으로 근접 클래스인 이단심판관은 성화를 비롯한 신성 마법 쪽에도 스킬 트리가 일부나마 존재했고, 물리든 마법이든 저항이나 면역에 비교적 큰 제약 없이 데미지 딜링이 가능했다.
그렇기에 솔로 플레이로도 절대 공략이 불가능한 적 같은 건 없었고, 전반적으로 대처 능력이 뛰어난 편이었다.
“저… 저건 뭐야?”
격렬한 전장 속, 정신없이 전투를 벌이고 있는 와중에도 많은 유저가 에일의 화려한 플레이에 눈을 떼지 못했다.
특히나 일렁거리는 백색의 불꽃과 시시각각 바뀌는 무기들.
에일이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이단심판관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이들도 하나둘 나타났다.
하지만 지금은 투구가 얼굴을 완전히 가려 주고 있었고, 신원에 대한 걱정 없이 에일은 전투에 집중할 수 있었다.
후웅!
고통에 찬 포효를 내지른 갑옷 트롤이 커다란 팔을 휘둘렀다.
놈의 다리에 창이 깊숙이 꽂혀 있는 데다가. 바짝 근접해 있던 탓에 여러모로 피하기 어려운 구도였다.
하지만 역극을 사용해 가뿐히 공격을 피한 에일은 어느새 꺼내 들었던 장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완전히 뒤를 잡은 상태에서 가속이 붙은 팔.
있는 힘껏 장검이 휘둘러졌고, 발동된 일섬 스킬이 갑옷 트롤을 덮쳤다.
콰과과과과!
칭호와 패시브로 인한 이단에 대한 추가 데미지, 성속성 스킬과 언데드를 대상으로 한 무기의 특수 효과 ‘만월’까지.
온갖 보너스를 받은 에일의 주력 스킬이 녀석을 휩쓸었다.
쿠웅!
불길에 휩쓸린 채,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던 갑옷 트롤은 힘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녀석이 두르고 있던 단단한 갑옷은 에일의 검격에 산산이 박살 나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혼자서 저 괴물을 잡았다고?”
전투를 치르던 유저들이 수군거렸다.
그동안 보이지도 않던 유저가 갑자기 나타나 엘리트 몬스터를 단숨에 제압하자 시선이 모두 그리로 쏠린 것이다.
자신들과 비교해 레벨이 딱히 차이 나 보이지도 않았는데, 한참 애를 먹고 있던 녀석을 단신으로 격파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에일은 그러한 시선들을 가볍게 받아넘기며 할 일을 마저 진행했다.
터억!
에일은 팔을 뻗어 쓰러진 트롤의 다리를 붙잡았다.
갑옷 트롤의 체력이 바닥나 꼼짝하지 못하고 쓰러져 있기는 했지만, 완전히 숨통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빈사 상태가 되어 널브러진 상태.
에일은 싸움을 이어 나가면서도 데미지를 계산해 녀석의 숨통을 일부러 끊지 않은 것이었다.
“저… 저 녀석, 뭐 하는 거야?”
“잠깐, 설마?”
정신을 못 차리는 트롤의 다리를 붙들고서 질질 끌고 가는 에일의 모습에 유저들은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곧 에일의 다음 행동을 목격하고 나자, 그들의 안색은 점차 창백하게 변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