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최선의 방어란 (3)
빈사 상태로 쓰러진 엘리트 몬스터.
놈의 머리 위에는 이단임을 알리는 낙인까지 띄워져 있었고, 에일에게는 훌륭한 스탯 수급원이나 다름없었다.
광기와 신앙심을 늘려 주며 총애 스탯과 교단 공헌도까지 골고루 올려 주는 데다가, 사도 전용 스킬인 형벌 집행을 사용해 이단을 처형한다면 2배가량의 보너스를 얻을 수 있었다.
에일에게는 레벨과 스킬만큼이나 중요한 육성 포인트였다.
하나 지금은 아직 한창 언데드들과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비록 다른 이의 도움 없이 단신으로 쓰러뜨렸다고는 해도, 다른 수많은 몬스터를 상대로 대처하기 위해 서둘러 녀석의 목숨을 처리할 법도 했지만, 에일은 그러지 않았다.
안 그래도 많은 이의 시선이 쏠린 상황에 보란 듯이 빈사 상태의 트롤을 끌고 가 모두에게 잘 보일 법한 곳에 화형대를 세웠다.
괴물의 큼지막한 덩치에 맞춰 화형대의 크기 또한 인간을 상대로 하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쿠에에엑!
난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전장, 옆에서 달려든 좀비 하나가 팔을 뻗으며 달려들었다.
그에 에일은 재빨리 장검을 꺼내 들며 단번에 좀비의 목을 쳐냈다.
거뭇한 핏줄기가 뺨에 길게 묻어 흘러내렸지만, 에일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움직였다.
스탯의 보정을 받은 에일은 힘으로 트롤의 몸뚱이를 번쩍 들어 올렸고, 쇠사슬에 묶인 녀석은 화형대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리곤 더 이상 사방의 몬스터들에게 방해받지 않도록, 지체하지 않고 형벌을 집행했다.
화르르륵!
그워어어어!
백색 불길이 화형대와 함께 놈을 집어삼켰고, 갑옷 트롤은 온몸을 휘감은 극심한 고통에 몸을 꿈틀댔다.
유저들은 부상을 통해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해도, 몬스터나 NPC들은 이야기가 달랐다.
더군다나 이단심판관이 사용하는 성스러운 백색 불꽃은 언데드 몬스터들에겐 쥐약이나 다름없었고, 고통에 둔감한 언데드라도 입이 뻥 뚫리게 만들었다.
갑옷 트롤은 그렇게 기둥에 단단히 묶인 채, 온몸이 타들어 갈 때까지 작열통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이단을 처단하였습니다!]
[‘형벌 선고’에 따라 지정된 형벌을 성공적으로 집행하였습니다. 스킬의 효과로 스탯 보너스가 두 배로 늘어납니다.]
[여신의 총애 +0.34% (현재 62.84%)]
[빛의 교단 공헌도 +75]
[신앙심 스탯 +2]
[광기 스탯 +2]
[화형 집행으로 인해 심판관의 공격력이 60분간 10% 증가합니다.]
“미… 미친…….”
집행 과정을 적나라하게 목격한 유저들은 입을 쩍 벌렸다.
단순히 영상으로 보거나 전해 들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느껴질 만큼, 광신도의 광기가 묻어나는 광경이었다.
뿐만 아니라, 에일을 향해 달려들려던 언데드 몬스터들까지 적극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주춤주춤 물러났다.
화형대와 갑옷 트롤을 통째로 삼킨 뒤, 사방으로 열기를 내뿜으며 커다랗게 일렁거리는 불길 탓이었다.
‘이만하면 나쁘지 않네.’
주변을 슬쩍 둘러본 에일이 생각했다.
마침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방어전이 발생했고 까다로운 엘리트 몬스터가 등장했다는 사실을 듣고 난 뒤, 그가 생각했던 그대로 상황이 잘 풀려나갔다.
위태로웠던 전황이 뒤집혀 유저들이 원래의 페이스를 되찾았고, 격퇴가 순조로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자리에 있는 수많은 유저의 관심을 자신에게로 끌어모으는 데 성공했다.
물론 당장은 얼굴과 닉네임을 숨기고 활동하는 에일에게 인게임에서의 너무 많은 관심은 부담스러울 수 있었고, 관심을 끌어모으는 데 성공했다는 것은 뜬금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에일은 평소에 투구가 보이지 않도록 설정해 둔 것을 바꿔 투구가 드러나도록 해 얼굴이 완전히 가려져 있었다.
가죽이나 천 갑옷 종류의 경우 투구를 보이게 만들어도 얼굴이 안 가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중갑과 경갑 장비는 가려진 장비가 많았다.
게다가 지금 에일이 장착하고 있는 장비는 아예 디자인 자체가 안면 장갑 부분을 올리고 내릴 수 있는 투구였다.
정보창도 비공개된 상태이니 유저들에게 신원이 노출될 가능성에 대해선 걱정 없었다.
또한 에일이 지금 그들의 주목을 끌려는 이유도 따로 존재했다.
워로드의 신격은 기본적으로 지상의 사건들에 의해서 영향력을 수급하고, 개입을 통해 영향력을 소모한다.
현재 루는 뜻을 내려보내 교단 전체를 움직임으로써 사실상 황혼회 괴멸에 대량의 영향력을 투자한 상태라고 봐야 했고, 그 여파로 영향력이 텅텅 비어 바닥난 상태였다.
만약 황혼회를 상대로 한 이번 움직임의 결과가 성공적이라면 더 많은 영향력을 얻을 수 있겠지만, 반대로 좋지 않다면 큰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싸움의 결과를 마냥 기다리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포교나 이단 심판을 비롯한 신도들의 자잘한 행동부터 교단 세력의 확장에 대해서까지, 일단 신격과 관련만 되어 있다면 온갖 일을 통해 그녀의 영향력이 발생했다.
물론 신도 개인의 행동 정도로는 신격의 입장에선 기별도 안 갈 만큼 미미한 수준일 것이다.
하지만 에일은 일반 신도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많은 영향력을 발생시키는 사도의 행동이라면, 신격의 입장에서 쓸 만한 영향력 수급이 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디… 이렇게까지 했는데 반응이 좀 있으려나.’
에일이 슬쩍 눈을 돌리며 주변을 바라봤다.
사람들의 공포와 경외심은 빛의 여신에게 있어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었고, 전장에서 주체할 수 없이 날뛰고 있는 엘리트 몬스터라면 경외를 모으기 딱 좋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신앙심이 한층 더 깊어짐을 느낍니다.]
[신앙심 스탯 +0.1]
[광기 스탯 +0.1]
[‘빛의 심판자, 루’가 당신을 후원합니다.]
[빛의 교단 공헌도 +150]
“오랜만이네요, 여신님.”
에일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 * *
그렇게 한차례 위험이 찾아왔던 방어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갑옷 트롤을 완전히 태운 뒤, 본격적으로 전투에 참전한 에일은 몰려드는 언데드들을 상대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 덕에 왕국에서 파견된 조사단에게 퀘스트의 보상으로 적잖은 양의 경험치와 돈을 받아 챙길 수 있었다.
다만 조사단이라고 해 봐야 서너 명뿐이었고 전투에 도움되는 이들도 아닌지라, 전적으로 모험가들을 고용해 몬스터들을 막고 있는 처지였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소모전을 감수하며 마을을 지킨다고 해 봐야 얻을 수 있는 큰 이점이 없는 데다가, 다른 일들이 쌓여 있어 왕국의 군대는 파견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모험가들을 고용한다 한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
‘그래서 내가 해결해 주기로 했지.’
[단일 퀘스트, 이상 현상 조사(진행 중)]
에일은 아예 이 현상을 끝내 주기로 하고 푸념을 늘어놓던 조사단원들에게서 직접 퀘스트를 받아냈다.
조사단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고, 성공만 한다면 큰 보상을 건넬 거라 약속했다.
처음엔 에일이 빛의 교단의 이단심판관이라는 점을 꽤나 꺼리는 듯한 기색이었지만, 그들도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심판관들이 전문가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다른 소리를 하지는 못했다.
덜컹!
목책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 에일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앞으로 넓게 펼쳐진 평원이 탁 트여 있었지만, 오히려 자욱이 끼어 있는 안개가 그의 시야를 방해했다.
안개가 많은 지형이긴 했지만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었다는데, 방어전이 시작된 이후로 더욱 심해졌다고 한다.
“저기요! 정말 그리로 나갈 거예요?”
갑자기 뒤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일이 자연스레 시선을 돌리자, 목책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유저를 볼 수 있었다.
“혼자서 가기엔 위험할 텐데…….”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피식 웃어 보인 에일은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목책 위에 있던 이들은 그런 에일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영상에서처럼 막 미친놈 같지는 않은데?”
“글쎄, 네 머리 위에 표식이 나타나면 또 모를 일이지.”
“윽…….”
수군거리는 유저들을 뒤로하고 에일은 마을로부터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먼저 시야에 방해되는 투구를 비활성화시켰다.
안 그래도 짙은 안개 때문에 시야 확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거기다 사람에 따라 다르다더니 조금은 갑갑한 느낌 탓에 항상 머리 방어구를 활성화시켜 둔 채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한결 나아진 기분을 느끼며 에일은 세베라에게서 얻었던 지도를 꺼내 위치를 확인하며 나아갔다.
“어때요, 황혼회 쪽은 좀 잘되어 가고 있나요?”
에일이 갑자기 허공을 향해 물었다.
대뜸 말을 꺼낸 그의 앞에는 유저는커녕 몬스터조차 없었다.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 그의 눈앞에 메시지가 번쩍하고 떠올랐다.
[‘빛의 심판자, 루’가 거만한 눈빛을 보내며 미소 짓습니다.]
[전지전능한 여신의 뜻을 가로막을 수 있는 이는 없습니다!]
상당히 자신감 있는 태도.
전부터 묘하게 아래에 달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까불거리는 느낌이었지만, 어쨌든 베나론과의 전면전이 생각보다 잘 풀리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확실히 이단심문소의 다섯 집행관까지 전면에 나섰으니 황혼회의 입장에서는 난리가 났을 것이다.
온 대륙의 괴물과 악마들을 사냥하던 이들이 작정하고 그들만을 척결하려는 것이었고, 황혼회의 힘만으로는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잘 풀리고 있는 과정과 별개로 아직 의아한 부분은 여전했다.
“어째서 그런 계시를 내리셨던 거죠? 아무리 봐도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을 텐데.”
그녀가 집행관들에게 계시를 내리느라 소모된 영향력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빛의 교단 전체를 움직이는 커다란 개입이었으니 그 점은 당연했다.
물론 일만 순조로이 풀린다면 그 이상의 영향력을 회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곱의 악마 중 하나인 베나론은 신격조차도 멸할 수 없는 불사의 존재였다.
그가 존재하는 이상 황혼회의 완전 척살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아무리 성공적이라 한들 최대치가 정해져 있었다.
그만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면, 황혼회를 뿌리 뽑는 일보다는 다른 방면으로 활용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보였던 모습하고는 조금 달랐지.’
루는 그간 에일을 지켜보면서 아무리 답답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불필요한 개입은 자제했고, 반대의 경우에도 분명 정해진 선 안에서 보상을 지급했다.
비록 광기라는 세 번째 이명을 가지고 있다 해도, 이런 방면에 있어서만큼은 확실했다는 말.
이전의 행동들을 고려하면 확실히 이번에 이루어진 개입은 여러모로 그녀답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에일의 눈앞에 메시지 하나만을 띄워 놓을 뿐이었다.
[‘빛의 심판자, 루’가 고개를 돌리며 어깨를 으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