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최선의 방어란 (5)
콰앙!
휘둘러진 망치가 연달아 벽을 무너뜨리며 굉음을 만들어 냈다.
에일을 쫓는 망치였지만, 그에게 닿지는 않았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이!”
화가 치밀어 오른 슬레지가 격하게 망치를 휘둘렀다.
하지만 에일은 이리저리 몸을 놀리며 그의 공격을 피하거나 흘려냈고, 확실한 틈이 생겼을 때엔 반격을 가하기도 하였다.
번번이 빗나가는 슬레지의 공격과는 다르게, 에일의 반격은 뜸하긴 했지만 정확히 먹혀들어 갔다.
처음 기습을 허용했던 에일임에도 전투가 시작되자 체력이 깎여 나가는 것은 오롯이 슬레지의 몫이었다.
츠츠츠츠!
요동치는 마력과 함께 어두운 기운이 팔에 감겼고, 슬레지의 근력이 다시 한 번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에일이 짐작했던 대로 그는 신체 강화 마법을 중점으로 익힌 마법사였다.
대신 금지된 마법의 특성상 일반적으로 효율이 좋지 않은 보통의 신체 강화 마법보다 훨씬 강력한 효과를 가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크헉……!”
옆구리를 창에 찔린 슬레지가 주춤주춤 물러났다.
에일로서는 얼마 되지 않아 맞닥뜨린 인간형과의 일대일 대결이었지만, 이전에 상대한 로덴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미 이단으로 지정되어 있던 슬레지의 레벨은 35.
에일은 스킬과 아이템조차 사용하지 않고 오직 실력만으로 그를 압도하고 있었다.
‘아직 부족해.’
쩌엉!
너무 큰 동작으로 슬레지의 균형이 무너졌을 시점, 에일이 정면으로 그의 망치를 쳐냈다.
그러자 슬레지의 팔이 순간적으로 젖혀졌고, 빈틈을 만들어 낸 에일은 장검을 휘둘렀다.
더욱 깊게 벨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딱 제압할 수 있는 만큼이면 충분했다.
쿠당탕!
몸을 길게 베인 슬레지가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이, 이럴 수가…….”
빈사 상태에 달한 슬레지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을 흘렸다.
꽤나 절망에 빠진 듯한 모습이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에일은 그를 밧줄로 꽁꽁 묶었다.
“심문 정도로 말할 것 같냐고 했었지? 기대해도 좋아.”
“이 자식이……!”
“입도 막자.”
“우우웁!”
에일이 시끄러워질 기미가 보이는 슬레지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덩치가 커서 불편하기 하겠지만, 바닥에 질질 끌고 가는 데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
쉬이이익!
콰득!
뒤편에서 날아온 투창이 슬레지의 머리를 관통했다.
안 그래도 체력이 떨어져 있던 슬레지는 저항할 도리가 없었고, 꼼짝없이 그대로 즉사했다.
“아, 안 돼……!”
에일이 그의 멱살을 잡아 쥐고 흔들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체력이 완전히 바닥난 이가 되살아날 리는 없었고, 슬레지는 바닥에 축 늘어진 채 피를 쏟아냈다.
창이 날아왔던 방향에서 나타난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던전의 입구가 있던 쪽에서 달려온 그들은 순식간에 다가와 에일을 빙 둘러쌓다.
몬스터나 NPC가 아닌 유저들.
에일은 그들의 장비를 살폈고, 방어구 곳곳에 그려진 화이트 팽의 문양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화이트 팽이라고……?”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라.”
길드원들이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며 그를 압박해 왔다.
레벨과 착용한 장비가 에일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것은 물론, 들어선 이의 숫자도 많았다.
‘젠장, 대체 뭐야? 이 자식들이 왜 여기에……?’
뜬금없이 난입해 온 길드원들 탓에 생포해 가야 하는 결사단원이 사망했다.
월드 퀘스트와 관련된 중요한 단서를 날려먹은 꼴이 되어 버린 데다가, 여기까지는 대체 어떻게 쫓아온 건지 뜬금없는 등장에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다른 건 차치해 두더라도 그들이 자신의 앞에 나타난 이유부터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최소 세 자릿수 레벨의 길드원들끼리 이곳 40레벨대 사냥터로 다 함께 사냥을 나서 올 리는 없을 터.
심지어 화이트 팽이라면 그를 귀찮게 하던 베켄이 계속해서 들먹이던 길드였다.
설마 복수심을 품은 베켄이 서리불꽃과의 분쟁 도중에도 화이트 팽의 길드원들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발언권과 입지가 있던 존재였다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화이트 팽이라면 나름 건실한 규모의 길드였고, 그동안 베켄의 온갖 미친 짓들을 보아 온 에일로서는 쉽사리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에일이 이번 두 번째 영상을 올리고 난 뒤, 화이트팽 길드가 워튜브 계정으로 접촉해 와 영입 제의를 보내오기도 했다.
하지만 당연히 베켄과의 악연이 있는 데다가, 12강 길드의 제안도 거절한 마당에 당연히 그들의 제외는 무시했었다.
‘설마 그것과 관련 있는 건 아니겠지……?’
허탈감과 함께 머리가 복잡하게 뒤엉킨 에일은 이를 빠득 갈았다.
생포하려던 결사단원이 죽어 버린 것에 대해 굉장히 열 받았지만, 일단 당장은 처한 상황에 어떻게든 대처해야 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30레벨짜리 초보 하나 잡자고 이렇게 몰려온 건 아닐 테고…….”
“수작 부리다간 목 날아간다.”
딱딱한 표정의 길드원이 검을 들며 경고해 왔다.
그를 둘러싼 길드원 열댓 명의 살벌한 분위기를 보아, 어설프게 도주하려 들었다간 언제든 목이 꿰뚫릴 듯했다.
그때 천천히 걸어온 고딘이 길드원 사이를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직접 길드 마스터가 찾아와……?’
화이트 팽의 길드장인 고딘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는 에일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길드원들이 이렇게 온 것도 놀라운 일이었는데, 길드 마스터가 직접 이곳까지 찾아오다니.
이쯤 되면 단순히 베켄의 복수 따위로 어떻게 될 만한 스케일을 넘어섰다.
“에일, 네가 로덴을 쓰러뜨린 그 이단심판관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따로 연락도 했는데 답은 없더군.”
대뜸 이야기를 꺼낸 고딘이 말했다.
마치 다 알고 왔다는 듯이 그는 한 번도 언급한 적 없는 이름은 물론이고, 에일의 정체까지도 모두 꺼내 놓았다.
“어떻게……?”
“내 동생과 문제가 있었지? 간단한 일이다.”
에일의 새로운 영상이 퍼지며 더 큰 화제가 된 것이 이 일의 시작이었다.
워로드 관련 이슈에 둔감한 베켄조차도 뒤늦게 그의 영상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과거에 퍼졌던 잉골 숲 영상 속의 미친 이단심판관이 자신을 죽인 에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베켄이라도 착용했던 장비와 시기, 장소까지 똑같은 이상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는 베켄은 자신의 형에게 그대로 달려갔다.
그가 사연을 쏟아내자 또 억지를 부리려는 줄 안 고딘은 처음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 함께했던 베켄의 동료들까지 증언해 가며 거들기 시작하자 상황은 바뀌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동생과 부딪혔던 녀석이 정말 네가 맞더군.”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확실한 단서만 몇 개 있다면 워로드에서 정체를 캐내는 것쯤은 일도 아니야. 이단심판관이라는 직업 자체도 흔하지 않고.”
‘젠장, 어쩐지 요즘 걸리는 거 없이 잘나간다 했다.’
빠져나갈 구석이 없자 에일이 속으로 분통을 터트렸다.
베켄이 불안 요소긴 했어도 두 길드의 대치 상황과 손을 뗀 청부 길드 탓에 당분간 꼼짝도 못 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나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부분이었다.
“이번 마찰엔 녀석의 잘못이 있으니 충돌이 일어난 것에 대해선 죄를 묻지 않겠다. 얼굴과 이름에 대해서도 확실히 비밀을 지킬 테니, 계속 정체를 감춘 채 활동할 수 있을 거다.”
“그래? 그러면 그 이야기를 굳이 면전에 찾아와서 한 이유는?”
고딘의 말에 에일이 비꼬듯이 받아쳤다.
고작 저따위 말이나 늘어놓으려고 여기까지 추적해 왔을 리가 없었다.
놈들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을 거란 것쯤은 갓난아기가 아닌 이상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고딘은 옆을 바라보며 고개를 까닥였고, 대기하고 있던 길드원 하나가 다가와 에일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눈썹을 찌푸린 에일은 문서를 받아 든 뒤 내려다봤다.
갑자기 무슨 종이인가 했더니, 길드와의 계약 조건들이 빼곡히 담겨 있는 계약서였다.
“너는 아직까지 소속 길드가 없었지. 교단 때문에 정상적인 길드 활동이 어렵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렇기에 서로 협력 관계를 맺자는 거다. 개인 활동이라면 얼마든지 보장해 주고, 급여를 비롯한 조건도 부족한 것 없이 맞춰 놨다. 거기에 순순히 사인만 한다면 서로 불필요하게 얼굴 붉힐 일은 없겠지.”
“…….”
은근한 압박이 담긴 말.
이곳까지 찾아든 놈들의 목적이 드러났다.
에일로서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용건, 자신을 손에 넣기 위함이었다.
아직 에일이라면 즉시 전력감은 되지 못하겠지만, 그들은 한창 유망한 루키이자 네임드 플레이어로서 떠오르고 있는 그의 유명세를 이용해 길드의 이름값을 띄울 작정이었다.
물론 협박을 통한 계약 따위는 현실이든 게임 속이든, 법적으로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고딘도 그걸 모를 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에일이 낮은 레벨에 소속도 없다는 걸 이용해, 에일이 길드를 빠져나가려 한다면 그 즉시 척살해 버릴 작정이었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것은 형식에 불과했고, 본질은 명백히 협박만으로 이루어진 제안이라고 봐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에일은 그의 행동에 차마 가소로운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정말 그 방법으로 길드에 묶어 둘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야?”
“뭐?”
“워로드에 와서 길드장 놀이를 하더니 감이 많이 죽었나 보네. 나름 클랜워에서 랭커까지 하던 작자가 말이야.”
“나를 알고 있었나……?”
뜻밖의 이야기에 고딘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워로드로 넘어오기 전, ‘클랜워’라는 마이너 게임의 랭커 출신이었다.
이스트혼을 비롯한 3대 게임은 물론이고, 기타 메이저 게임들보다 규모가 작은 만큼 랭커의 수준도 비교적 덜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랭커’라는 타이틀이 어디론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규모가 어떻든 간에 한 게임의 실력자란 절대 만만한 게 아니었다.
“현장에서 떨어져 지낸 지 꽤 됐나 보지? 길드원들을 깔아 둔 던전과 레이드만 편히 다녔을 테고.”
“실력이 있다는 건 알겠다만 필요 이상으로 건방 떨지는 마라. 아무리 로덴을 눌렀다 해도 네가 40레벨도 안 된 하수라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
[‘빛의 심판자, 루’가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길 희망합니다!]
답답함을 참다못한 루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술술 풀려가던 에일이 갑자기 이런 방해를 받게 되니, 그녀도 적잖이 짜증이 난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많은 영향력을 사용한 뒤였고, 교단도 황혼회 쪽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마땅히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즉, 에일이 직접 이 문제 상황을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는 말.
“너희들, 사람 잘못 건드렸어.”
“그래? 이 상황에서 네가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그건 두고보면 알겠지.”
치이익!
에일은 보란 듯이 그들의 앞에서 계약서를 찢어버렸다.
그러자 발끈한 길드원들이 무기를 치켜올렸지만, 그들이 미처 달려들기도 전에 에일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파아아앗!
“끄아악!”
“이, 이런……!”
강렬한 섬광이 사방으로 퍼져 나왔고, 섬광을 맨눈으로 봐 버린 길드원들은 눈을 감싸 쥔 채 휘청였다.
에일의 손에 단숨에 생겨났던 마법 스크롤의 효과였다.
그들이 어느 정도 방심했던 것도 있었지만, 워낙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대응할 수가 없었다.
인벤토리에서 뭔가를 꺼내려면 어느 정도 선행 동작이 있기 마련이었는데, 방금의 에일에게는 그런 것이 아예 없었다.
‘젠장! 완전히 손해야.’
틈을 타 던전 밖으로 도주하기 시작한 에일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스크롤을 구매하느라 소모한 공헌도가 고스란히 날아갔고, 이번 추적을 통해 정보를 알아내려던 본연의 목적까지도 무위로 돌아갔다.
무엇보다 집요한 영입 제안 같은 것도 아니고, 감히 저따위 수작을 부리며 협박하다니.
‘절대 그냥은 안 넘어간다.’
에일이 빠득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