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사냥의 진수
“후…….”
에일이 주르륵 늘어놓은 스킬북들을 앞두고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나 그렇듯,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워로드에서 스킬의 중요성이야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었으니, 떨리는 마음을 한쪽에 안고서 에일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손에 잡힌 건 스킬북이 아닌, 영롱한 붉은빛을 띠고 있는 행운석.
스킬북을 사용하기에 앞서 먼저 해 둬야 할 작업이 있었다.
파앗!
에일은 행운석을 사용해 일시적으로 행운을 한 단계 증가시켰고, 지금 자신에게 어떤 스킬이 필요한지 미리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선 가장 먼저 따질 수밖에 없는 건 스킬의 등급.
에일은 지금 레벨대부터 미리 유일이나 영웅 등급의 스킬을 최대한 확보해 두는 것을 원했다.
유일 위의 전설이야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등급이라고 봐도 되었고, 너무 낮은 저등급 스킬들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치명적인 독이었다.
‘사실 희귀도 굉장히 준수한 편이긴 한데…….’
대부분의 유저 사이에서는 희귀 등급만으로 스킬창을 가득 채워 놓는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었다.
하나 과정이야 어쨌든 연달아 대박을 쳐 왔던 에일은 한껏 눈이 높아진 상태였고, 더 높은 등급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랭커의 자리를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보통의 경우를 기준으로 둔 채 만족할 수야 없다.
‘그동안 모아 둔 스킬북들은 적지 않아. 붉은빛 네 개, 보랏빛이 하나, 거기에 찬란한 수식어가 붙은 보랏빛 스킬북까지……. 이 정도면 충분히 가능하겠지.’
일반적으로 보았을 때 이만하면 충분히 쓸 만한 스킬이 하나쯤은 나와 줘야 했다.
가능하겠지가 아니라 가능해야 한다고 되뇌고 싶었지만, 세상일이야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
에일은 우선 붉은빛 스킬북을 하나 집었다.
[쓰러스트(일반)]
- 직업 제한: 근접 계열 클래스
- 적에게 날카로운 찌르기 공격을 가합니다.
“으음…….”
일반 등급의 평이한 스킬.
보통의 유저였다면 스킬북이 궁한 상황에서는 만족하고 대강 넘어갔을 수도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에일이 만족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귀중한 스킬창 하나를 이 정도 공격기로 채워 넣을 수는 없었고, 거기에 붉은빛 스킬북을 사용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냉정히 말해 시작이 그리 좋지 않았다.
에일은 또다시 붉은빛 스킬북을 집었다.
[단단한 두개골(최하급)]
- 단단한 머리가 도움이 될 때도 있습니다.
- 머리 부위의 방어력이 35(고정치)만큼 증가합니다.
[‘빛의 심판자, 루’가 입술을 씰룩입니다.]
기어이 나타나 버린 최하급 스킬.
“스읍……. 이거 왠지 계속 쓰다가 증발만 할 것 같은데.”
난색을 표한 에일이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워로드를 시작하기 전, 그가 온라인 게임을 즐기던 시절에 이런 유의 뽑기를 할 때면 종종 느낌이 안 좋을 때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남은 붉은빛 스킬북들을 써 봐야 연달아 꽝이 나올 듯한 느낌이 강하게 맴돌았다.
그동안 수많은 온라인 게임을 해 오며 에일이 쌓아 온 경험상, 이럴 때는 굳이 고집 피울 것 없이 노선을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붉은빛을 제외하고 차라리 괜찮은 스킬을 건넬 확률이 높은 찬란한 보랏빛 스킬북부터 바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제발……!’
에일의 찬란한 보랏빛 스킬북이 사용되며 빛을 발했다.
파아앗!
[불의 세례(영웅)]
- 이단심판관 전용 스킬
- 심판관들은 언제나 많은 적과 싸움을 이어 갑니다. 죄인을 세울 화형대가 부족하다면, 모두를 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 또한 하나의 좋은 방법입니다.
- 무기를 휘둘러 넓은 범위에 걸친 맹렬한 성화를 발산합니다.
“휴, 오케이!”
한시름 놓은 에일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행히 나타나 준 영웅 등급 스킬에 에일은 곧바로 스킬을 습득했다.
두 번째로 얻은 전용 공격기이긴 했지만, 기존의 일섬 스킬과는 겹치는 부분 없이 다른 역할을 맡고 있었다.
바로 광역기의 등장.
그간 고화력 광역 스킬이 부재했던 에일이었는데, 이 스킬이라면 몰이사냥의 효율이 대폭 올라갈 것이다.
유일급 스킬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지만, 현실적으로 보랏빛 스킬북에서 그 정도 등급까지 나타나 줄 확률은 크지 않았기에 충분히 만족하고 물러설 수 있었다.
‘벌써부터 액티브 스킬이 세 개나 되는 건 살짝 불안하기는 하지만… 아직은 상관없겠지.’
추가 습득으로 얻은 그의 하나뿐인 패시브 스킬은 무려 유일 등급의 방어 관통 효과였고, 각종 보정 스킬들은 이제부터 차근차근 얻어도 늦지 않았다.
그간 배운 4가지의 스킬 중 두 개의 영웅, 그리고 유일 등급 스킬까지.
만약 이 페이스만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면 랭커나 다를 바 없는 스킬 세팅이 될 것이다.
잠시 스킬창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에일은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저었다.
‘영웅급이긴 해도 아직 스킬에 대해 완전히 확인한 건 아니니까. 이건 조금 있다가 직접 써먹어 봐야겠어.’
기본적으로 마이너 직업인 이단심판관의 전용 스킬들은 널리 알려져 있는 편이 아니었기에 스킬 테스트를 해 봐야 했다.
에일은 조금 뒤, 아래에 있는 던전에 직접 내려가서 언데드들을 상대로 스킬을 사용해 볼 생각이었다.
‘그다음은… 일단 영상은 잘 뽑힌 것 같고.’
에일이 변종 바실리스크 공략을 담은 영상을 다시 확인했다.
본인이 보기에도 만족할 수 있을 만큼, 난이도에 비해 매우 깔끔하고 능숙하게 마무리를 지었다.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이전에 찍어 뒀던 영상들과 함께 업로드할 것이었다.
이젠 편집자도 구해졌으니 찍어 놓은 영상을 고민하면서 킵해 둘 필요 없었고, 바로바로 보내 제작을 맡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지금 난관에 부딪힌 문제는 하나.
사령석까지 놓여 있던 이 방 안에 에일이 진행하던 퀘스트의 단서가 될 만한 게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역시 결사단원을 잡아갔어야 했는데…….’
허무하게 죽어 버린 슬레지를 생각하자니 입안이 쓰라렸다.
만약 그를 생포해 붙잡아 갔다면 어떤 단서라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결사단에 대해 모든 걸 술술 불어냈을 것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단심문소에 끌려간 이들 중 맨정신으로 심문을 버틸 수 있는 자들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직접 찾아내는 수밖에.’
에일은 진한 아쉬움을 느끼며 방을 빠져나왔다.
중립 입장을 취하려 하는 블러디 핸즈에게 다시 한 번 부탁하는 건 그리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다.
이번 정보를 에일에게 건네준 것에 대해서라면 이미 방어전이 대대적으로 일어나며 어느 정도 수면 위로 올라온 상태였고, 그나마도 결사단 내에서는 잔챙이 격이었던 슬레지의 정보만을 알려 준 것 또한 그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다음 의뢰를 한다 한들 핵심적인 정보를 건네주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는 말.
게다가 교단에서 지원해 준 골드도 저번 의뢰로 다 써 버려 비용 문제에 부딪힌 탓에, 블러디 핸즈는 일단 두 번째 옵션으로 밀려났다.
그렇다고 그에게 믿을 구석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에일은 곧 월드 퀘스트가 서서히 진행되며, 그에 관한 소식들이 들려올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당장 지금만 하더라도, 월드 퀘스트에 대해 전보다는 많은 정보가 풀리기 시작한 걸 알 수 있었다.
거의 모든 방면에 귀가 열려 있는 에일은 잠시 성장할 동안, 각종 정보 사이트들을 뒤져 가며 단서를 수집하면 되는 것이었다.
철컥.
새로 얻은 스킬의 테스트를 위해, 복도를 통해 지하 던전에 내려온 에일은 미리 장검을 꺼내 들었다.
바실리스크들과 싸우며 한차례 난장판을 벌여 놓긴 했지만, 처음 생각 이상으로 던전의 크기가 워낙 넓어 큰 기별도 없었다.
드드드득.
에일은 고의로 장검을 바닥에 질질 끌며 안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소리를 듣고 언데드 몬스터들이 몰려들었다.
40레벨 근방의 일반 몬스터들.
이미 상대해 봤던 녀석이었고, 놈들이 지닌 대강의 체력과 방어력 등 스킬의 견적을 잡기 위해 필요한 정보는 모두 머릿속에 있었다.
‘그럼 사용해 볼까……!’
장검을 양손으로 움켜쥔 에일이 스킬을 발동했다.
영웅급 스킬, ‘불의 세례’.
화르르륵!
쿠에에에엑!
에일의 검이 휘둘러지며 전방에 막대한 불꽃을 쏟아냈다.
커다란 백색 불꽃이 주변을 완전히 집어삼키며 나아갔고, 정면에 있던 몬스터들을 시원시원하게 쓸어버렸다.
파스스스.
‘허…….’
에일이 멍하니 앞을 바라봤다.
달려들던 몬스터들은 온데간데없고, 새까맣게 타 버린 흔적뿐.
상대가 언데드인 덕에 속성 데미지와 장검의 만월 효과 등의 큼직한 보너스들이 붙었다고는 해도, 이렇게 한 번에 쓸어버릴 줄은 몰랐던바.
방금의 데미지는 물론이고, 스킬의 타격 범위조차도 예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검을 휘두른 경로를 따라 전방에 한정되었긴 했지만,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 적까지도 충분히 공격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이었다.
‘이 정도면 영웅급 스킬 중에서도 손에 꼽겠는데…….’
넓은 범위의 광역 피해인 만큼 일섬 수준의 막대한 데미지를 주는 건 아니었지만, 근접 클래스에게 이 정도의 상위급 광역 스킬은 결코 흔치 않았다.
‘솔직히 패시브 쪽이 좀 더 필요하다 싶긴 했지만… 이 정도 위력이라면 오히려 이쪽이 더 나은 것 같네.’
내심 감탄한 에일이 생각했다.
마나를 약간 잡아먹는 게 문제였지, 쿨타임도 짧아서 일반 몬스터를 대상으로 한 몰이사냥의 효율이 대폭 올라갈 것이었다.
‘마침 이번에 136까지 올린 광기 덕에 마나도 크게 부족하진 않아…….’
전투 관련 스탯이라면 마나양까지도 올려 주는 광기 스탯뿐만이 아니었다.
140을 넘어선 신앙심 또한, 이단심판관 전용 스킬인 불의 세례의 마나 소모량을 줄여 주었고, 쿨타임도 소폭 감소시켜 주었다.
당장 두 가지 공격 스킬을 적극적으로 운용하는 데 큰 지장이 없다는 말.
‘음?’
그때,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 에일이 시선을 돌렸다.
방금 언데드들을 스킬로 쓸어버린 덕에 얻을 수 있었던 경험치가 생각보다 매우 높았다.
처음에만 해도 바실리스크들을 상대하느라 미처 확인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방금 해치운 녀석들의 숫자와 수준, 그리고 들어온 경험치 양을 고려해 보자 이곳의 경험치 효율이 매우 좋다는 걸 깨달았다.
‘이거 굉장히 좋은데……?’
비록 저레벨 던전이긴 해도 이 정도 효율이라면, 주변 길드에서 따로 관리하면서 통행료를 받아낼 수준이었다.
만약 길드에서 관리하지 않는다 쳐도, 유저들 사이에서 엄청난 경쟁이 붙어 정상적인 사냥이 불가능할 정도로 몰려들 것이다.
하나 이곳은 아직 알려진 적이 없는 신규 던전.
덩달아 평원의 안개 속에 가려진 입구는 우연히 쉽게 찾을 수 있을 만한 녀석이 아니었다.
에일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간만에 진득하니 사냥이나 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