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여섯 번째 집행관 (5)
전장을 뒤덮는 함성 소리.
대단위 공격 마법들이 쉴 새 없이 떨어져 내렸고, 반대편에선 그에 대응한 방어 마법이 펼쳐졌다.
성벽을 넘기 위해 수많은 신도들이 사다리를 올랐다.
날아든 투석기의 바위에 포연을 뿜고 있던 첨탑이 박살 났다.
우르르 무너지는 파편.
그 아래에 있던 에일은 겨우 몸을 날려 피했다.
“휴, 깔릴 뻔했네.”
성벽 위에 올라선 그는 한창 전투에 열중하던 중이었다.
이정도 규모의 전장은 난생 처음 겪는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황하지는 않았다.
수많은 유저가 부딪치는 아수라장 속에서 살아남으며 적들을 차례로 베어 나갔다.
[이단을 처단하였습니다!]
콰악!
에일은 자신에게 달려들던 적을 단숨에 베어 버렸다.
교단의 원정을 막아선 이들은 모두가 이단으로 지정되어 있었고, 한 명 한 명을 쓰러뜨릴 때마다 스탯 보너스를 얻을 수 있었다.
역시나 이단심판관에게 이런 유의 대규모 PVP는 스탯과 공헌도를 올리기 좋은 기회였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위험한 전장인 만큼, 경험치도 짭짤히 올라갔다.
키에에엑!
화살이 쏟아지는 전장 사이로 커다란 소환수가 나타났다.
빙해 측 고레벨 네크로맨서가 보조 스크롤까지 써 가며 소환한 상위 괴수.
하나 곧바로 이단으로 지정된 녀석은 주변 신도들의 표적이 되었고, 사제들의 신성 마법이 일제히 괴수에게 꽂혔다.
그리고 마지막 일격은 뛰어오른 에일의 몫이었다.
콰과과과!
일섬에 정통으로 당한 대형 괴수는 백색 성화에 온통 뒤덮여 성벽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최악의 상성 탓에 빛의 교단을 상대로 네크로맨서는 사실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직업군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좋지만은 않아.’
전황을 살핀 에일이 미간을 좁혔다.
그가 있는 쪽은 성벽 너머로 올라서는 데 성공했지만, 아직 성벽을 넘어서지도 못한 곳이 대부분이었다.
더군다나 이중, 삼중으로 쳐진 굳건한 성벽은 놈들의 방어를 뚫어내는 걸 더욱 고역으로 만들었다.
뿌우우!
퇴각의 뿔나팔 소리가 울렸다.
역시나 이곳뿐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상황이 좋진 않은 듯했다.
신호가 떨어지자 신도들은 일단 재정비를 위해 물러났고, 에일도 서둘러 전장을 빠져나왔다.
평지에서 싸웠더라면 숫자가 많은 교단의 쪽이 훨씬 유리했겠지만, 놈들이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수성에 나선 탓에 이야기는 달라졌다.
공성전의 난이도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전투에 대비해 미리 제작 유저들을 공성 병기를 제작해 끌고 왔지만, 단기간에 임시 제작한 것들로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
고레벨의 방어 첨탑과 높은 성벽, 예상 이상의 방어 병력까지.
도시라는 매우 중요한 거점답게 방비가 철저히 되어 있었다.
‘뭔가 수를 써야겠는데…….’
에일은 상황을 타개할 해결 방법이 없는지 깊이 고민했다.
이대로 계속 두드린다면 뚫어낼 수도 있어 보였지만, 그 이후의 일까지 생각한다면 가급적 적은 피해로 도시를 점령하고 싶었다.
‘맞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번뜩 떠오른 생각에 에일은 무릎을 쳤다.
지하 세계 엘트리스의 종족들.
그들의 도움을 받으면 지금 닥친 문제들을 훨씬 수월하게 풀어나갈 수 있었다.
물론 에일은 그들을 전투에 참여시키지는 않을 것이었다.
교단의 집행관이자 지부의 심문소장, 그와 더불어 엘트리스의 구원자 취급을 받는 에일이 원한다면 그들은 언제든 함께 싸워 줄 터였다.
하지만 온 유저들의 시선이 남부에서 벌어진 전쟁에 쏠린 지금.
여태 발견된 적이 없는 지하 종족들이 나서 조금이라도 싸움을 거들어 준다면, 아무리 사실을 숨긴다 한들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이런 유의 정보를 긁어모으는 작자들이 냄새를 못 맡을 리 없다.
그렇기에 직접 싸움을 거들게 할 수는 없었다.
‘이번 일로 벌써 엘트리스라는 신 지역에 대해 알리기엔 패가 아까우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독점하고 있는 정보에 대해서라면, 가급적 공개를 나중으로 미뤄 두는 편이 좋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지.’
에일은 곧바로 엘트리스 쪽에 남아 사냥 중인 파티원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직접 전서구를 보내는 것보단 이렇게 메신저를 통해 부탁하는 편이 더욱 빨랐다.
엘트리스의 몇몇 주민에게 자신의 말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건넨 에일은 곧바로 무언가 회의 중이던 루크와 메이를 찾아갔다.
“집행관님?”
“도시의 방어를 뚫어낼 방법을 찾았습니다.”
“저… 정말입니까?”
“예, 그 때문에 저는 잠시 자리를 비울 겁니다. 그동안 루크 님은 이번 원정에 모인 이단심판관들 중 정예들을 추려 주십시오.”
“얼마나 모으면 되겠습니까?”
“우선 선발대로는… 마흔 명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조금 전 암스텔의 영주에게서 협상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루크가 그에게 문서를 건네며 말을 이었다.
“정말 협상 가능성을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쪽이건 최대한 시간을 벌 생각인 모양입니다. 12강 간의 전쟁이 빙해의 승리로 끝나면 암스텔을 지키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요.”
“마침 시간이 필요하던 참이었는데 잘됐군요. 메이 님, 저들이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시선을 조금 끌어 주셔야겠습니다.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맡겨만 주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메이는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그 정도 일이야 눈감고도 가능하다는 듯, 자신감에 찬 태도였다.
* * *
영주가 보낸 가신이 협상을 위해 다가왔다.
그는 호위 기사들을 여럿을 대동한 채, 진지와 도시 사이에 생겨난 협상 자리에 나섰다.
성벽에 몰려든 빙해 측 길드원들도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후, 저 미친놈들.”
가신이 향한 협상 자리엔 수백이 넘는 교단의 이단심판관들이 질서정연하게 사열해 늘어서 있었다.
전투 도끼와 창을 들고 한 치의 까닥임도 없이 굳어 있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복사 붙여넣기라도 한 듯 전원이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정을 모르는 다른 유저들이 봤다면, 이들이 당연히 NPC일 거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네가 교단의 대표인가?”
배가 불룩 나온 가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와 마주한 메이는 불쾌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단자가 대화를 청해 오다니……. 당장이라도 목을 매달아 마땅하지만, 뜻을 전하러 온 사신을 베진 않겠다.”
“흥!”
가신은 콧방귀를 뀌었다.
게을러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오랜 세월 영주를 보필해 오던 몸, 협박 따위에 굴할 자가 아니었다.
“빛의 교단이 원하는 게 무엇이냐. 요구 조건을 말해라. 원하는 게 있으니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겠지.”
“암스텔의 영주가 악마와 내통했고, 오염된 도시를 정화하기 위해 찾아왔을 뿐이다.”
“협상 자리에 앉았다면 그따위 거짓 명분이 아닌 제대로 된 이유를 말해라! 이대로 전쟁이 계속된다면 너희도 많은 피를 흘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겠지?”
터무니없는 소리에 가신이 소리쳤다.
아무리 광신도라고 한들 정말 암스텔 영주가 악마와 내통했다는 말만 믿고, 군대를 이끌고 오지는 않았을 터.
다른 시커먼 속내가 있을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빛의 교단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가신의 빗나간 생각일 뿐이었다.
“좋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도시를 포기하고 떠나라.”
“뭐, 뭐야?”
가신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조건이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하지만 메이는 선심 쓴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우리의 임무는 도시를 성화로써 정화하는 것. 여신께서 마지막 자비를 베푸셨다. 도시를 떠날 기회를 주마. 단 중죄를 저지른 너희 영주의 목은 두고 가야 한다.”
“이놈들이……!”
격분한 가신이 메이를 노려봤다.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세우는 그녀의 태도는 상대를 우습게 보는 말장난 정도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만약 떠나지 않고 버티려 든다면, 너희에겐 죽음뿐이다.”
“닥쳐라! 이곳 암스텔에 감히 광신도의 무리 따위가 들어설 수는 없다!”
“광신도라?”
스릉!
메이가 검을 뽑았다.
그러자 움찔한 호위 기사들은 각자의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댔다.
하지만 그녀는 뽑아든 검으로 상대를 공격할 생각이 없었다.
“네 말이 맞다.”
“뭐야……?”
메이는 가신에게 한 발 앞으로 다가서더니, 양옆에 선 심판관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대들에게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섬기는가!”
“만악의 징벌자이자 정의의 화신, 모든 빛의 주인을 섬긴다!”
“그렇다면 묻겠다! 우리는 누구인가!”
“루의 불꽃이자 징벌의 철퇴이다!”
“이 무슨……!”
사방에서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심판관들의 목소리에 가신의 얼굴은 공포로 물들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주변을 잠식한 광기에 수없이 전장을 누빈 기사들조차 자리에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했다.
“교리를 모욕하는 죄악의 무리가 말한다! 신을 향한 믿음이 광기이며, 죄인을 향한 심판이 살육이라고! 그들의 속삭임이 들리는가? 바닥 아래 꿈틀거리는 심연의 유혹이 보이는가? 다리를 잡아끄는 악마의 손길이 느껴지는가?”
그녀는 말을 이었다.
“아니, 빛에 눈이 먼 우리는 앞을 볼 수 없다. 귀를 막고 눈을 감고서 그저 빛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걷는다. 우리가 따르는 것은 가슴에 새겨진 신념, 그리고 양손에 쥐어진 법전과 철퇴뿐.”
그녀는 말을 이었다.
“우리는 여신의 대행자. 죄악의 구덩이에서 악마들을 참하는 처형인이자, 세상의 끝에서 죄인을 벌하는 징벌자다! 다시 한 번 그대들에게 묻겠다!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의 진정한 사명, 이단을 심판하는 이단심판자다!”
“그렇다, 심판의 시간이다!”
쿠웅!
사열하고 있던 심판관들이 일제히 창과 도끼를 바닥에 내려찍었다.
그러자 병장기들의 예리한 날 끝에 맹렬한 백색의 불꽃이 타올랐다.
“우리는 약자들의 방패이자 빛이요! 위정자들을 향한 검이자 광기일지니! 부정한 자들은 성스러운 불꽃 아래에 모조리 바스라질 것이다!”
휘익!
싸늘한 한기가 담긴 그녀의 검끝이 가신의 목을 가리켰다.
그의 얼굴은 이미 창백히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
“돌아가라, 늙은 돼지야. 부정으로 쌓아올린 너희의 성채와 함께 모든 것을 불태워 줄 테니, 정화의 불길 속에서 여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참회하라. 그것이, 우리가 줄 수 있는 마지막 자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