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여섯 번째 집행관 (6)
쿠웅!
성화를 머금은 바위가 곡선을 그리며 날아갔고, 연달아 두터운 성벽을 두들겼다.
1차적인 피해는 물론 사방에 불이 번지며 많은 피해를 야기했다.
“크아아악!”
“젠장, 대체 저런 병기들은 어디서 구해온 거냐!”
투석기와 공성탑, 대포 등.
말도 안 되는 성능의 상위 공성 병기들이 빛의 교단 측에서 나타났다.
처음 그들이 가져온 투석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하나 저만한 수준의 병기를 이렇게 빠른 기간 안에 공수해 오기란 불가능했다.
사전 준비도 없이 갑자기 떠오른 월드 이벤트.
도시를 소유하던 빙해에게도 갑작스러운 사건이었지만, 퀘스트를 따라 급히 한데 모인 신도들에게는 더욱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빙해 측이야 항상 다른 길드의 침공을 대비해 수성 준비를 해뒀지만, 신도들은 아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리 없었다.
그랬기에 여태 전력 차이가 있음에도, 수성을 통해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교단은 대형 길드처럼 전문 제작자를 마련해 놓을 리도 만무했고, 저런 공성병기들이 갑자기 나타나게 된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방법은 있었다.
지금 나타난 공성 병기들은 종족 전체를 따져도 최고의 손재주를 지녔다는 드워프들의 손을 거친 것이었으니까.
그것도 엘트리스의 드워프 내에서 최고 장인들만이 급히 지상까지 올라와 제작한 것이었다.
최고의 실력뿐 아니라, 루에 대한 신앙심으로 똘똘 뭉친 장인들.
빠른 제작 속도는 당연하고, 엄청난 성능을 보이며 전장의 판도를 뒤집어 놓고 있었다.
투웅!
거대한 노포가 발사되어 성벽의 첨탑을 박살 냈다.
공성용 발리스타가 뿜어내는 막대한 관통력과 위력은 고레벨 첨탑의 높은 방어력조차 무색하게 만들었다.
“새 공성 병기들 덕에 도시 공략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놈들도 며칠 버티지 못할 겁니다.”
“이대로 계속 몰아붙이죠. 놈들의 시선이 다른 쪽으로 돌아가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메이의 말이 떨어지자, 교단은 더욱 공세를 가하며 도시를 몰아붙였다.
끝없이 몰려드는 신도들의 공격에 빙해는 온 힘을 다하며 겨우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항상 전선에 서던 에일과 루크를 비롯해 몇몇 네임드 이단심판관이 보이지 않았지만, 적들은 전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종족들을 지휘하는 동안 메이가 적극적으로 놈들의 시선을 끌며 공성을 가해 정신없이 몰아붙인 덕이었다.
죽음도 두렵지 않은 듯 미친 듯이 달려드는 루의 광신도들.
광기로 물든 전장 속, 그들을 상대하는 입장에선 도무지 그런 사실을 신경 쓸 기미가 없었다.
드워프의 공성병기 덕에 이대로 계속 두드리기만 해도 승세를 굳힐 수 있는 상황.
하지만 여전히 자리를 비우고 있는 에일은 놈들에게 결정타를 먹이려 이동 중이었다.
* * *
드드드드!
위에서 흙이 부스스 떨어지며, 땅이 울리는 것이 느껴졌다.
‘요란하게 한바탕하고 있나 보군.’
에일의 머리 위에선 대규모 공성전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가 지금 자리한 곳은 한창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도시 암스텔의 지하.
뒤를 따르는 40여 명의 선발대와 함께, 그동안 파 둔 땅굴을 통해 도시 내부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기본적으로 도시쯤 되는 대형 거점들은 땅굴에 대한 방비 정도는 얼마든지 되어 있었다.
하지만 훨씬 깊게 파고들어가 깊은 도시 안쪽으로 빠져나온다면. 그런 방비는 손쉽게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물론 생각처럼 쉽게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깊고 길게 땅굴을 판다는 것은 인간의 노동력이라면 감히 엄두조차 못 낼 작업이었다.
그래서 에일은 엘트리스의 깊은 땅속에 살던 쥐인간, 래터들의 도움을 받았다.
래터들의 땅 파는 능력이라면 굳이 부연 설명조차도 필요 없을 정도.
드워프 장인들이 다른 지상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이곳으로 향할 수 있게 만든 것도 래터들이 새로 땅굴을 파며 올라온 덕이었다.
‘드워프나 래터들도 다 돌려보냈고, 올라오느라 지상으로 파 놨던 땅굴도 처리해 놨으니. 이제 들킬 염려는 없겠지.’
엘트리스의 다른 종족에 대해 말한 것은 메이와 루크뿐.
그들이 따로 공성병기와 땅굴을 만들며 작업을 하는 동안, 원활한 작전 수행을 위해 둘에게만큼은 사실대로 말해 뒀다.
물론 아무리 교단의 소속이라 해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둘은 루의 메시지까지 받는 입장인 만큼 어느 정도 신뢰성이 있는 자들이었다.
거기에 만약 정보를 노출한다면 곧바로 신격의 분노를 살 것이었고, 교단에서 추방을 당해 그동안 쌓아온 것 대부분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런 위기를 감수하면서까지 그들이 배신할 우려는 크지 않았다.
덜컥!
땅굴의 끝에 닿은 에일은 먼저 바닥을 드러내며 바깥으로 나갔고, 나머지 선발대가 그 뒤를 이었다.
에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땅굴을 만든 래터들의 말대로 인적이 오고가지 않는 조용한 지하였다.
한데 이상한 게 있었다.
‘분명 지하실이라고만 전해 들었는데… 조금 느낌이 다른걸.’
사방으로 뚫린 복도와 문이 달린 여러 방들.
그가 생각했던 자그마한 지하실이 아닌 거대한 지하 시설이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입니다.”
주변을 살핀 루크도 거들었다.
에일이 봐도 평범한 지하실 같지는 않았다.
‘이런 이야기는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은은히 풍기는 피 냄새와 음산한 분위기는 둘째 치고, 도시 아래에 이만한 시설이 있다면 진즉에 알려졌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지금까지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정보꾼들의 귀에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단단히 비밀로 부쳐 두었던 시설이라는 셈.
복도에 줄 지은 방들은 굳게 닫힌 쇠문으로 막혀 있었고, 알아볼 수 없는 글씨가 수 놓여 있는 쇠사슬로 묶여 있었다.
쩌엉!
내부를 확인하기 위해 에일이 문에 걸린 사슬을 절단했다
하지만 문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기도 전.
키에에엑!
상당한 수의 악마종들이 쇠문을 부수고 쏟아져 나왔다.
몬스터들의 등장에 급히 물러난 에일은 장검을 뽑았다.
놈들 모두가 정예 몬스터 취급에 170레벨이라는 고레벨 몬스터였다.
숫자도 숫자이거니와 하나하나가 강력한 개체.
하지만 녀석들은 상대를 잘못 만났다.
에일을 따라나선 자들은 전원이 고레벨을 지닌 두 지역의 네임드 이단심판관들이었다.
그것도 악마와 언데드를 비롯한 이단들을 처치하기 위해 존재하는 직업.
상성상 정반대에 있는 강자들이 한데 모인 것이었다.
“전투 준비!”
화르륵!
루크가 외치자 모두의 무기에 성화가 피어올랐다.
드넓은 복도에서 벌어진 싸움엔 백색 불꽃이 수놓았고, 심판관들은 겁도 없이 달려든 악마 종자들에게 가차없이 징벌을 내렸다.
[이단을 처단하였습니다!]
[이단을 처단하였습니다!]
치이익!
단숨에 산화해 스탯 보너스가 되어 버린 몬스터들.
한 녀석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베어 버린 뒤, 에일과 심판관들은 방의 내부로 들어갔다.
커다란 방의 내부는 참혹했다.
곳곳에 남겨진 혈흔과 토막 난 시체들, 그리고 무엇보다 반쯤 악마화가 진행되던 ‘실패작’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암스텔의 시민들이 간혹 실종되는 일이 있다곤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었지만,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 줄이야.’
그가 시선을 돌리자, 바닥 전체에 그려진 커다란 문양이 은은히 붉게 빛나고 있었다.
타락의 악마 겔가라즈.
녀석의 상징이었다.
악마 추종자들과 벌써 두 번째로 엮인 에일은 이 광경을 보자마자 어찌된 일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강제로 끌고 온 도시의 시민들을 악마종으로 만드는 끔찍한 짓거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나 퀘스트 내용에 적혀 있던 ‘악마와의 내통’은 루가 내세운 단순한 명분 따위가 아니었다.
정말 도시의 영주는 타락의 악마와 계약을 맺었던 것이고, 그를 징벌하고 정화하기 위해 이번 퀘스트가 생성된 것이다.
“집행관님.”
“네, 그렇게 하죠.”
시선이 마주친 에일과 루크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방 말고도 지하의 각 방마다 악마종들이 가득 차 있을 게 훤했다.
루의 신도된 자로서 모두 놈들을 모두 불태워 심판해야 마땅하겠지만, 지금은 이 상황을 조금 다른 쪽으로 활용할 수도 있었다.
사슬을 모두 끊어내는 일.
악마종들을 지상에 풀어놓기 위해, 심판관들은 일제히 움직였다.
* * *
키에에에엑!
몬스터들의 울음소리가 사방에 울려퍼졌다.
멀찍이서 들려오는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암스텔의 관리자 자리를 맡고 있던 간부의 목은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이런 미친 자식이… 말도 없이 도시 아래에 이딴 짓을!”
그가 분통을 터트렸다.
암스텔은 빙해 길드가 실질적으로 관리하고 있던 도시였다.
하나 명목상의 영주 따위가 말도 없이 벌여 놓은 미친 짓 때문에 상황이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도시 내부는 느닷없는 악마종 엘리트 몬스터들의 등장으로 난리가 났고, 그에 관해 추궁을 받은 영주는 달아나려다 빙해의 길드원에게 붙잡혔다.
그리고 그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대자, 녀석은 그제야 사실을 인정했다.
타락의 악마와 계약을 맺고서 지하에 괴물을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단순히 광기의 여신이 지껄이는 미친 소리인 줄만 알았는데, 한 치의 과장도 없는 진실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콰앙!
날아든 투석기의 바위가 성벽 한쪽을 박살 냈다.
“제기랄!”
충격에 휘청인 간부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바깥으로는 격렬한 공성전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도시 안쪽으로는 고레벨 정예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니.
어떻게든 도시를 사수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미쳐 돌아갈 노릇이었다.
“당황하지 말고 정비해! 그래 봐야 안쪽은 몬스터가 날뛸 뿐, 충분히 둘 다 막아 낼 수 있다.”
“큰일입니다! 도시에 불이 번지고 있습니다!”
“뭐, 뭐야?”
화르르륵!
어느새 거세게 번진 화염이 도시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것도 보통의 불이 아닌 하얀빛의 강력한 성화.
도시로 침투한 40여 명의 선발대는 도시 곳곳에 성수를 뿌려 가며, 신나게 방화를 저지르고 있었다.
시민들이라면 이미 모두 피난을 떠난 뒤였기에 거리낄 것도 없었다.
“끄아아악!”
“젠장, 도저히 막을 수가 없어!”
경비대가 급히 불을 끄려 애써 봤지만, 기름 이상으로 화력을 강하게 만드는 성수 때문에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도시 안쪽에서 솟아난 거대한 연기는 외부에서 공성전을 치르던 교단의 신도들에게도 훤히 보였다.
“신호가 왔군.”
징후를 알아차린 메이가 검을 움켜쥐었다.
도시를 집어삼키는 불꽃은 길드가 대처하기 어렵도록 혼란을 가중시키는 역할이었다.
동시에, 바깥에 있는 이들에게 보내는 신호이기도 했다.
도시에 한줌의 재도 남지 않게끔, 놈들을 쓸어버리도록.
“집행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