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격동하는 대륙
양면으로 이루어진 교단의 맹공에 도시 암스텔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함락되었다.
도시 대부분이 성화에 휩쓸려 타 버렸으니, 버티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도시를 포기하고 달아나려 해도 퇴로조차 막혀 있었다.
빙해의 길드원들은 화염에 휩쓸리거나 신도들에게 붙잡혔고, 붙잡힌 이들의 최후야 뻔했다.
터엉!
무릎이 꿇려졌던 죄인의 목이 호쾌하게 날아갔다.
참수되고 있는 자들 옆으로, 잿더미만 남은 폐허엔 매달린 이단들의 시체가 가득했다.
암스텔은 교단 측이 완전히 점거하게 된 상황.
굉장한 중요성을 띠고 있던 월드 이벤트는 이렇게 성공적으로 끝마쳐졌다.
이번 원정에 참여한 모든 신도들에게는 모두 막대한 보상이 주어졌다.
물론 보상은 각자의 활약에 알맞게 분배되었다.
루크나 메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한 이들은 훨씬 많은 보상을 받았고, 사도이자 집행관인 에일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신격 ‘루’의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여신의 총애 +15.00% (현재 121.55%)]
[빛의 교단 공헌도 +24,000]
[신앙심 스탯 +30]
[광기 스탯 +30]
‘역시 엄청나군…….’
에일이 내심 감탄했다.
거대한 규모의 월드 이벤트 아니랄까 봐 막대한 보상이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퀘스트를 완료하면서 들어온 대량의 경험치.
그간 빙해와 전투를 치르며 올렸던 경험치와 합쳐, 주르륵 오른 레벨은 147레벨에 달했다.
[‘빛의 심판자, 루’가 즐거운 미소를 짓습니다.]
퀘스트를 내린 장본인, 루는 역시나 이번 결과에 대만족한 기색이었다.
이번 월드 이벤트는 큰 전환점이었다.
도시 하나를 통째로 불태워 버렸으니 획득할 영향력의 양에 대해선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다른 신격들에 비해 훨씬 앞서 나가게 된 셈.
‘전쟁의 결과가 나오려면 아직 멀었나.’
개인 화면을 확인한 에일이 생각에 잠겼다.
빙해와 흑랑을 비롯한 12강 길드 간의 전쟁은 아직도 팽팽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양쪽 모두 균형을 잃지 않고 치고받는 중이라 싸움은 쉽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빙해가 암스텔이라는 주요 거점을 빼앗겼음에도 이쪽에 신경도 쓰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크게 보자면 길드의 존폐까지도 걸린 전쟁인 탓에 그쪽에 모든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가급적이면 흑랑 쪽이 이겨 줬으면 하는데.’
에일이 바라는 건 역시 빙해 길드의 패배.
녀석들의 입장에서는 교단 탓에 도시라는 거대한 거점을 잃은 만큼, 다시 원만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기왕이면 후환이 생기지 않도록 아예 빙해가 추락하는 편이 나았다.
까악! 까악!
그때 까마귀 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고, 에일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위로 향했다.
천천히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녀석.
왼쪽 발목에 편지를 담은 작은 통이 달려 있는 걸 보아 시체를 파먹으러 온 녀석은 아니었다.
에일에게 날아온 까마귀는 곧 다리를 뻗었다.
촤륵!
편지를 꺼내 펼쳐 보인 그는 앞면에 찍힌 인장만으로 어디서 보낸 까마귀인지 알 수 있었다.
에스마이어의 이단심문소에서 보내온 전서구였다.
그리고 전서구에 적힌 내용은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벌써 결과가 나왔다고?”
뜻밖의 소식에 에일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편지에 적힌 내용은 간단했다.
그동안 이단심문소에 감금되어 고문을 당하고 있던 ‘대처’의 심문 결과가 나왔다는 것.
녀석을 직접 붙잡았던 공로자이자 집행관인 에일에게 가장 먼저 전달된 것이었다.
‘강력한 보안 마법이 걸려 있었다더니 벌써 문제를 해결해? 역시 이런 쪽으로는 대단하네.’
결사단의 일원인 대처.
진즉에 붙잡았던 녀석이지만 그를 비롯한 결사단원들에게는 기밀 유지가 강제된 마법이 걸려 있었다.
그 탓에 꽤나 많은 세력이 나섰음에도 이렇다 할 정보를 캐내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헌데 이번에 이단심문소에서 가장 먼저 보안 마법을 해제할 방법을 찾아냈고, 죽음보다 끔찍한 고문을 더해 놈의 자백을 만들어 냈다.
황혼회의 토벌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놈들에 대한 조사에 나서자마자 이런 성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는 엄청난 호재였고, 에일은 서둘러 편지의 다음 내용을 확인했다.
‘역시 왕자의 짓이었나.’
예상대로 월드 퀘스트와 관련된 모든 사건은 왕위를 탐낸 오른 왕자가 배후로서 크게 작용했다.
그는 지금의 불리한 상황을 뒤집기 위해, 금지된 마법의 정상화를 위해 움직이는 결사단은 물론 기존의 질서에 불만을 가졌던 다크 엘프 같은 이종족 세력까지 끌어모았다.
왕가 내부에선 변화를 주기 어려우니, 외부 세력을 움직여 대의회의 의결 좌석을 자신 쪽으로 유리하게 조정하려는 것이다.
하나 왕자가 노리는 건 에일로서는 전혀 예상도 못 한 대상이었다.
‘왕자가 노리는 게 6대 길드라고……?’
에일은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편지에 적힌 내용에 따르면, 왕자는 많은 대의회의 좌석을 차지하고 있는 6대 길드를 통째로 뒤집을 생각이었다.
하나 6대 길드는 왕가조차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거대 세력.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령석의 용도는 대지의 마력을 흡수하는 것… 그 과정에서 오염이 발생했다는 거였군.’
그렇기에 사용한 것이 상식의 범주를 깨는 금지된 마법.
결사단의 도움을 받아 사령석을 마련한 왕자 측은 대륙 각지의 대지에서 빨아들인 검은 마력을 모아들였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막대한 대지의 마력은, 잠들어 있는 고대 정령을 깨운 뒤 그들의 의식을 손에 넣어 조종할 목적으로 사용될 예정이었다.
그런 일이 정말로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엄청난 일이었다.
공주 측에 섰던 6대 길드를 갈아 버린 뒤, 이번 월드 퀘스트에서 왕자의 편에 선 유저 길드로 채우려는 속셈.
6대 길드의 참여로 공주 쪽으로 기울었던 대의회의 상황을 완전히 180도 뒤집어 놓을 수였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목적을 감추는 데에 신경을 쓰더라니… 이런 짓을 꾸미고 있었던 건가. 이거 엄청난 정보를 손에 쥐어 버렸는걸.’
에일의 입가에 웃음이 피어났다.
6대 길드가 군림하고 있는 지금의 워로드 판세를 완전히 뒤집어 놓을 수도 있는 거대한 퀘스트.
에일은 그 퀘스트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핵심적인 단서를 손에 얻게 된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에일은 이 정보를 어떻게 사용할 건지 잠시 생각했다.
‘뭐, 지금으로써는 고민할 것도 없지.’
굳이 고민할 것도 없을 만큼 아주 간단한 문제였다.
에일은 이미 공주 측에 합세한 입장.
퀘스트의 끝에는 ‘왕국이 최초로 인정한 교단’이라는 막대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었고, 다른 것과 저울질할 필요가 없었다.
거기다 6대 길드들이 독주 중인 상태라 해도, 서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나름의 규칙이 자리 잡은 월드였다.
만약 그들이 한순간에 모두 무너진다면, 워로드는 세력들이 자리 잡기 이전의 상황처럼 굉장히 혼란해질 것이다.
그럴수록 죽어 나가는 건 에일과 같은 개인 유저들이었다.
영지를 얻기 위해 혈안인 길드들은 힘을 늘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고, 교단이나 에일 자신에게도 훨씬 더 많은 압박이 들어올 것이다.
‘무엇보다 여기서 입을 닫는다고 한들… 6대 길드가 호락호락 당해 줄 리도 없으니.’
아무리 6대 길드가 여태 월드 퀘스트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지금쯤이면 이미 이상한 낌새를 어느 정도 눈치채고 그에 관해 조사를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 전에 미리 빚을 씌워 두는 편이 좋겠지.’
거래의 중요성을 아는 워로드의 대형 길드들은 빚을 잊지 않는다.
에일은 가장 먼저 나이트메어 쪽과 연결되어 있는 별도의 직통 채널을 통해 연락했다.
그 뒤엔 나머지 6대 길드들에도 우편을 작성해 해당 사실을 전달했다.
이제 에일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이상, 아무리 상대가 눈이 높은 6대 길드라 해도 그의 말이 무시받을 일은 없었다.
물론 그의 말을 전적으로 믿어 줄지는 미지수였지만, 그야 조사를 나서면 알게 될 일이고, 6대 길드가 나서면 이번 월드 퀘스트의 상황이 기울어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사실상 목적이 그에게 들통난 이상 왕자 쪽은 일단락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왕자 측에 함께 섰던 결사단도 급격히 무너질 테고… 그러면 그것도 처분해야겠군.’
에일이 창고에 쌓아 뒀던 아이템을 떠올렸다.
이제 적잖이 모아 뒀던 토륨 주괴들을 내다 팔아야 할 시점이었다.
대처가 털어 낸 사실에 따르면, 마력 전도량이 높은 토륨 주괴가 바로 사령석을 만드는 중요 재료였다.
그들의 음모가 막히는 순간, 다시 수요가 감소하고 시세가 곤두박질칠 게 당연했다.
여기서 익절을 놓는 편이 최고의 이득을 뽑아낼 방법이었다.
“여전히 머리를 굴리느라 바쁘구나.”
갑작스레 뒤편에서 들려온 여성의 목소리.
대화를 나누느라 폐허의 구석진 자리로 옮긴 에일이었는데, 뒤를 돌아보자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아름다운 여성이 서 있었다.
“여, 여신님?”
에일은 그녀를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이번엔 남의 몸을 빌리지 않고 직접 현신한 루.
게임을 처음 시작했을 때 마주했던 그녀의 당시 모습이, 지금 그대로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이셔도 되는 겁니까?”
“온전한 힘을 가지고 강림한 것은 아니니 걱정 말거라.”
루가 간단히 말했다.
그녀는 임의로 화신체를 통해 지상에 내려온 것이었고, 강림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적은 영향력만으로 형체를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이 모습 또한 신도의 몸을 빌리는 것보다는 영향력의 소모가 훨씬 컸다.
“이번 월드 이벤트는 정말 잘해 내어 주었다. 하나 이 모습으로는 오래 내려와 있지 못하니, 어서 용건을 보는 편이 낫겠지.”
“용건이라면……?”
“나의 충실한 사도와 맺었던 약속은 지켜야 하니 말이다.”
미소를 지은 루는 에일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때까지도 영문을 모르던 에일의 한쪽 뺨을 붙잡은 뒤, 허리를 살짝 숙이게 만들었다.
맞춰진 눈높이.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이마에 남았다.
“이… 이게 무슨…….”
얼굴을 붉힌 에일이 당황해 자리에 굳었다.
하나 곧 메시지 하나가 그의 앞에 떠올랐다.
[눈부신 여신의 축복이 당신의 몸을 감쌉니다.]
[일시적으로 행운이 5단계 상승합니다!]
“이건……?”
느닷없이 발생한 행운 보너스.
멍하니 보고만 있는 에일에게 루가 한마디 거들었다.
“여유로워 보이는구나. 내가 알기론 그리 오래 유지되진 않을 텐데.”
“아……!”
행운을 올려 주는 버프는 공통적으로 지속 시간이 짧은 게 특징이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 상기한 에일은 서둘러 인벤토리에서 스킬북을 꺼내 들었다.
엘트리스에서 얻었던 최고 등급의 황금빛 스킬북.
그냥 사용하기에는 아까워 작은 행운 버프라도 얻을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5단계 행운 보너스가 발생한 이상 당장이라도 개봉해야 했다.
파아아앗!
발동된 스킬북에서 쏟아지는 찬란한 빛.
[구도자의 열성(전설)]
-이단심판관 전용 스킬.
-진정한 믿음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구도자는 새로운 경지에 발을 딛게 되었습니다.
-플레이어가 익힌 모든 종류의 신성 마법이 마력이 아닌 다른 기초 스탯의 영향을 받습니다.
“저… 전설?”
에일이 멍하니 화면을 바라봤다.
황금빛으로 찬란히 빛나는 스킬의 이름.
워로드 최고 등급인 전설급 패시브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흐음, 나쁘지는 않구나.”
루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