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강의 폭군 (6)
“커헉…….”
볼튼이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스태프가 힘이 풀린 그의 손에서 바닥에 떨어졌다.
남은 체력은 불과 1퍼센트 남짓.
심한 상처투성이의 볼튼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말도 안 돼!”
“이… 이게 무슨 일이야.”
믿기지 않은 일이 벌어지자 혈맹의 길드원들이 술렁이며 동요했다.
40레벨 넘게 차이 나는 두 유저 간의 결투.
하나 결과는 모두의 예상과 정반대였다.
눈으로 쫓기도 어려울 만큼 치열한 접전이 벌어진 데다가, 레벨이 더 낮은 쪽인 에일이 끝내 승리를 거머쥔 것이다.
심지어 에일의 경우 아직 30퍼센트나 체력이 남아 있는 상황.
멋모르는 초보끼리 붙은 결투도 아니고, 일반적인 상식선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철컥.
싸움을 끝낸 에일이 느긋하게 장검을 회수했다.
분명 볼튼의 실력은 거짓이 아니었다.
빙결 마법사로서 상대하기에 상당히 골치 아픈 전투법을 구사하며, 끊임없이 그를 압박해 왔다.
하나 문제는 그의 플레이 스타일을 에일이 훤히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너 이 자식……!”
낭패에 찬 얼굴의 볼튼이 에일을 올려다보며 이를 빠득 갈았다.
에일은 이미 그의 스킬 세팅에 대해 모두 알고 있었고, 전투 방식에 대한 파악이 끝내 둔 뒤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떤 플레이를 선호하는지, 전투 중에 보이는 패턴이나 습관, 특정 상황에 보이는 약점 등.
그가 가진 장단점까지 모두 꿰뚫고 있었다.
반면 상대는 에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러한 차이는 수 싸움이 중요한 워로드의 일대일 결투에서 굉장히 크게 작용했다.
아무리 결투에 자신이 있던 볼튼이라도, 싸움이 시작하기도 전에 미리 약점과 파훼법을 짜둔 에일을 당해내기엔 무리였다.
‘마침 저번에 얻어 놨던 패시브도 톡톡히 도움이 됐고.’
에일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
엘트리스에서 150레벨을 달성하고 얻었던 스킬은 마법 저항력을 크게 증가시켜 주는 영웅급 패시브, ‘마녀의 최후’.
위치 엔드라고도 불리는 이 스킬 덕에 마법사를 상대함에도 굉장히 여유가 있었다.
[‘화산의 지배자’가 당신의 전투에 만족감을 표합니다.]
[‘생명의 어머니’가 눈을 빛내며 계약을 촉구합니다.]
[‘은밀한 탐구자’가 즐거운 마음으로 당신을 후원합니다.]
.
.
.
누가 보더라도 힘들 거라 생각했던 승부.
그것은 다른 차원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던 신격들 또한 지금의 결과에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자신의 사도가 아님에도 세 신격 모두가 약간의 공헌도를 보내올 정도였다.
[‘빛의 심판자, 루’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습니다.]
[빛의 교단 공헌도 +300]
이미 에일을 잘 알고 있던 루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우쭐한 태도를 보였다.
마치 그가 자신의 사도임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한 모습.
하지만 신격들의 관심을 뒤로하고 아직 에일에겐 이끌어 내야 할 결과가 하나 있었다.
“이제 값을 치러야지.”
에일이 무릎 꿇은 볼튼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제 결투의 결과에 따라, 스스로 캐릭터 삭제가 이루어져야 했다.
주변에 볼튼을 따르던 수많은 혈맹의 길드원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나서 제지할 수 없었다.
양쪽이 동의한 정당한 결과인 데다가, 조금 전 목격한 경이로운 실력으로 인해 압도된 분위기의 탓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 혈맹의 길드장, 듀크가 앞으로 나섰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네가 원하던 것을 들어주지.”
“원하는 거라면?”
“모르는 척할 것 없어. 처음부터 그걸 노렸잖나?”
괜한 소리는 사절한다는 듯 듀크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에일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띠었다.
“이야기가 빨라서 좋네.”
혈맹의 부길드장인 그의 캐릭터를 삭제하지 않는 대신, 이번 월드 이벤트를 블랙번 길드와 함께 막아 내라는 것.
그것이 방금 대화 없이 이루어진 거래의 내용이었다.
그러자 길드원들 사이에서 홀로 분위기를 파악한 볼튼이 즉각 반발했다.
“잠깐…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겨우 저 하나 때문에 길드 결정을 바꾸다니요! 그건 절대 안 됩니다!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러면 여기서 이대로 게임을 접을 생각인가? 이제야 한데 뭉쳐서 겨우 뭔가를 하려던 참에, 네가 그만두면 길드가 잘도 굴러가겠군.”
“그건…….”
그들의 출신 게임 ‘린에이지’는 본래 수많은 세력으로 나뉘어 극심히 대립하던 난세의 게임이었다.
어느 정도는 규모를 갖췄던 게임임에도, 린에이지 출신 길드들이 여태 두각을 전혀 드러내지 못한 것도 그 탓이었다.
하나 그들이 극적으로 타협한 뒤, 하나의 길드로 뭉치자 이야기는 달라졌다.
최근 혈맹 길드가 급성장할 수 있던 것은 당시 랭킹 1, 2위였던 듀크와 볼튼이 앞에 나서 강력한 구심점이 되어 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게임을 그만두게 된다면, 볼튼이 대표로 이끌던 전 연합의 길드원들 쪽에서 불만이 터져 나올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길드는 다시 이전처럼 분열될 것이고, 사실상 지금까지 보인 성장은 완전히 끝장나게 될 게 뻔했다.
느닷없이 볼튼을 도발하고 결투를 신청한 에일도 그걸 노린 것이다.
“그리고… 안 그래도 찜찜했던 참이야.”
협상 자리에서 에일의 주장을 들은 뒤부터 듀크는 상당히 거슬리는 게 있었다.
실제로 물의 교단이 신도를 동원한 규모는 조금 과한 감이 있었고, 혹시나 다음 이벤트가 정말 자신들을 겨냥한다면 상당히 위험했다.
방금 협상에서 당장 블랙번을 치지 않고 싸움이 끝날 때까지 물러서겠다고 한 것도 그를 의식한 것이다.
‘마음 같아선 이 기회에 놈들을 몰아내고 싶지만, 길드가 걸린 상황에 택하기엔 조금 과한 리스크야. 이번엔… 안전하게 월드 이벤트의 방어 보상을 챙기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결투를 지켜보는 동안, 듀크가 내린 결론.
에일이 볼튼에 대해 미리 파악해 뒀듯이, 듀크가 길드를 움직일 때 굉장히 신중한 성격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거절을 당하고도 그가 속으로 내심 망설이는 동안, 볼튼과의 대결이라는 도박수를 던져 본 것이다.
부길드장이라는 중요 인물이 나선 쓸데없이 리스크만 큰 대결을 즉시 제지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한 망설임이 있었다는 것.
하나 그렇다고 해서 에일에게 볼튼이 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건 절대 아니었다.
‘아무리 자세한 정보를 미리 파악해 뒀다 해도, 실전에서 저만큼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은 워로드 전체를 따져도 손에 꼽는다.’
직접 맞붙기 전만 하더라도 듀크는 설마 에일이 정말 볼튼을 이겨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정말 그가 아르메니아의 네임드인 로덴을 이겨냈던 것인지 여러모로 의구심이 들었었는데, 이제 와선 에일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시선을 돌린 그는 에일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번 이벤트가 끝난 뒤, 따로 길드 차원에서 조사를 진행할 거다. 그리고 만약 그때 네 말이 거짓으로 판명된다면… 뒷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겠지.”
마지막으로 내세운 살벌한 조건.
듀크는 준랭커 사이에서도 랭킹권 진입을 노리고 있는 상위 플레이어였고, 만약 그를 상대했으면 아무리 전략을 잘 짜뒀다 한들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걱정할 게 없는 에일은 간단히 답했다.
“얼마든지.”
그가 자리를 떠났다.
* * *
혈맹 길드의 개입 이후, 상황은 매우 빠르게 바뀌어 나갔다.
바하무트의 신도 그리고 블랙번 길드 사이에 벌어진 월드 이벤트가 어느새 뒤집힌 전세를 맞이하고 있던 것이다.
그간 사이가 안 좋던 두 길드가 힘을 합치는 것인 만큼, 수차례 잡음이 있긴 했지만 결국 공통의 적 앞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웬만한 병력 차가 아닌 이상, 성채 안에 틀어박힌 수성 측에 상당히 큰 이점이 있었다.
그만큼 굳건히 버티는 것이 가능했고, 그들은 물의 교단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는 중이었다.
콰악! 털썩!
에일의 장검에 찔린 마지막 신도가 바닥에 쓰러졌다.
바닥에 흥건해지는 핏줄기 위로 에일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이게 마지막인 건가? 다행히 늦지 않았네.”
에일은 우회한 바하무트의 신도들이 소규모 거점을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지원을 나섰다.
다른 파티원들은 공성전을 치르는 중이라 움직일 수 없었고, 마침 같은 성채에 있던 네슈아가 그를 거들어 거점을 온전히 지켜냈다.
「이제 얼마 안 남았군」
“그러게.”
그들은 지난 며칠간 정말 수많은 물의 교단의 신도들을 베어냈다.
그렇게 방어에 전념한 결과, 어느 정도 승기를 잡은 상태였고 방어 성공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쿠구구구!
갑자기 땅 밑에서 느껴지는 격렬한 진동.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에일과 네슈아는 당황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나 주변의 혈맹 측 길드원들은 이 진동을 아예 느끼지 못하는 건지, 전혀 동요하지 않고 있었다.
“이게 무슨……?”
쩌저저적!
이젠 대지가 급격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멈춘 듯 다른 길드원들은 완전히 행동을 멈췄고, 에일과 네슈아는 시선만 간신히 주고받았다.
대체 갑자기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파악하기도 전.
주변 바닥이 온통 무너지며 그 아래에서 뿌연 물이 차올랐다.
빽빽한 나무와 수풀밖에 없던 숲속은 급격히 깊은 늪지로 변해 버렸다.
[신격, ‘강의 폭군’의 개입이 이 땅에 영향을 미칩니다!]
드드드드!
꺼진 땅 위로, 사방에 가득 차오른 수면.
그 사이로 정체 모를 거대한 몸이 떠올랐다.
거대하고 긴 몸집을 지닌 괴수가 물을 가르며 둘의 주위를 유유히 돌았다.
쏴아아아!
갈라지는 물 사이로 그 어떤 생물도 비견하지 못할 만큼 거대한 메기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산맥보다도 긴 수염이 물 아래로 끝없이 늘어져 있었고, 수만 개의 이빨이 나 있는 입이 쩌억 벌어졌다.
“바, 바하무트……?”
순환과 물, 멸망의 신격. 바하무트.
이번 월드 이벤트를 꾸민 장본인이 직접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영리하다고 생각했겠지. 모든 일을 제멋대로 할 수 있을 거라고.”
세상을 집어삼킬 듯 거대한 입에서 거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탐욕의 악마였던 베나론을 마주하던 때와는 차원이 다른 압박감.
위협적인 울림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다. 나의 권속들이 곧 지상에 오른다. 파멸의 물결이 흐르고, 영원한 순환이 다가온다. 운명이 네놈들을 산산조각 낼 것이다.”
바하무트가 그들을 향해 서서히 다가왔다.
그로 인해 소용돌이치는 물살은 당장에라도 그들을 집어삼킬 듯이 위험하게만 느껴졌다.
“언제까지고 알량한 신격들의 뒤에 숨어 무사할 거란 생각은 마라.”
츠츠츠츳!
가까이 마주하는 것만으로 공간의 뒤틀림이 발생했다.
몸을 뒤튼 바하무트는 다시 깊은 늪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차올랐던 수면이 아래로 빨려 들어갔고, 온몸을 감쌌던 위압감이 사라졌다.
그렇게 신격의 개입이 완전히 사라지자, 어느새 대지와 숲은 원래의 모습 그대로 돌아와 있었다.
“이거… 제대로 찍힌 모양인데.”
「동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