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성물 (2)
[죄악의 존재, 신성모독자와 마주했습니다!]
“이건…….”
의식으로 태어난 괴물의 등장.
대교구장인 멜리아를 집어삼키고 나타난 녀석은 그동안 상대했던 평범한 몬스터 따위가 아니었다.
[바하무트의 상위 권속 ‘아그리아’가 나타났습니다!]
[‘은밀한 탐구자’가 권속의 개입을 경계합니다!]
[‘화산의 지배자’가 서둘러 그를 처치할 것을 촉구합니다!]
‘설마 이 상황에 권속을 소환하다니…….’
예상 밖의 상황에 에일이 눈살을 찌푸렸다.
워로드에서 통용되는 ‘권속’이란 신격이 거느린 부하로, 일곱 신격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존재들이었다.
당연히 신격만큼은 아니더라도 상위의 존재인 만큼, 일반적인 지상의 존재와는 차원이 다른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존재가 직접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있던 건가?’
이제야 그들이 왜 물러서지 않고 싸움을 이어갔던 건지 이해가 되었다.
혈맹 길드의 합류로 패색이 짙어진 이후, 바깥의 병력은 그저 시선을 돌리기 위한 눈속임에 불과했다.
그들은 가장 먼저 바난 요새를 쳐 성역을 확보한 뒤, 그동안 권속을 현신시키기 위한 의식을 진행하고 있던 것이다.
평범한 권속도 아니고 바하무트가 지닌 상위 권속이라면 한 번에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수였다.
‘하지만 상위 권속을 불러내려면 상당한 영향력을 소모해야 하는데… 어떻게?’
아무리 큰 교단이라 해도, 상위 권속을 불러낸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이번 월드 이벤트를 발동시킨 바하무트가 곧바로 이어서 보일 수 있을 만한 행동은 더더욱 아니었다.
쿠웅!
비틀거린 괴수가 한쪽 벽에 부딪히며 땅을 울렸다.
새롭게 얻게 된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려는 아그리아였지만, 여전히 전체적으로 삐걱거리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현신으로 인한 권속의 힘이 아직 완전히 깃들지 못했습니다!]
[필멸자의 몸에 자리를 잡기 위한 과정을 거치는 중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그리아의 힘이 강해집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가…….’
녀석이 긴 의식을 통해 나타났다 하더라도, 완전한 힘을 발휘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본연의 강대한 힘에 비해 아직은 미약한 지금.
놈이 훨씬 더 강해지기 전에 손을 써야 했다.
「서둘러 끝내야 한다.」
“알고 있어!
동시에 앞으로 나선 둘은 놈과 거리를 좁혔다.
정석대로라면 본격적인 레이드에 돌입하기에 앞서 패턴을 파악해 두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 따위는 없었다.
카가가각!
휘둘러진 아그리아의 공격.
녀석의 긴 손톱이 바닥을 매섭게 긁으며 지나갔다.
하지만 둘은 오히려 안쪽으로 더 들어가 돌파했고, 놈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검을 찔러 넣었다.
푸욱!
녀석의 양 옆구리에서 쏟아진 검은 피가 솟구쳤다.
방어 자세나 단단한 부위도 아닌 분명한 유효타.
하나 정작 상태창에 나타나 있는 아그리아의 체력은 단 1퍼센트도 달지 않았다.
그가 지니고 있는 체력 통 자체가 엄청났다.
스스스.
아래로 쏟아진 검은 피는 이미 멜리아가 의식을 치르며 흩뿌려 놓았던 선혈을 검게 물들였다.
그때, 아그리아가 몸을 크게 비틀자 충격파가 사방으로 터져 나왔다.
근접해 있던 에일과 네슈아는 서로 반대편으로 튕겨져 나갔다.
끄아아아!
고통에 찬 괴수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나 에일의 귀에는 단순한 몬스터의 포효가 아닌, 흡사 사람의 비명처럼 들렸다.
기도문을 읊던 멜리아와 괴물의 목소리가 반씩 섞인 듯한 불쾌한 소리였다.
주르륵.
거대한 괴물의 온몸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검을 찔러넣은 상처 부위가 아닌 모든 피부에서 쏟아지는 검은 피.
그렇게 바닥에 퍼져 있던 피 웅덩이는 완전히 검게 물들게 되었다.
번쩍 뜨인 아그리아의 눈에서 강렬한 안광이 흘러나왔다.
‘온다!’
콰드드득!
사방으로 얽히며 뻗어진 피의 가시들.
바닥에 고인 피들이 형체를 가지며 빽빽이 주변을 뒤덮었다.
공격의 범위는 성역의 지하 공간 전체.
방 안은 물론 바깥으로 통하는 성역의 복도까지도 뒤덮은 가시들은 촘촘히 쏟아져 스치는 모든 걸 꿰뚫어 냈다.
‘무슨 패턴이……!’
에일은 겨우 가시의 좁은 틈 사이로 몸을 빼냈다.
하지만 방 전체를 뒤덮은 가시들을 모두 피하기는 무리였고, 치명상을 피하는 것이 전부였다.
[남은 체력 - 30.1%]
최대한 빠르게 반응해 피해 낸 공격.
그 공격 한 번으로 인해 전체 체력의 70퍼센트가 날아갔다.
이조차도 겨우 최선의 수를 찾아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던 것이었다.
에일뿐만이 아니라 반대편의 네슈아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이게 상위 권속이라는 건가…….’
에일이 진땀을 삐질 흘렸다.
이제 막 하나 꺼내든 놈의 공격 패턴은 회피할 수 없는 필중기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빠른 발동 속도와 강력한 대미지, 말도 안 되는 범위까지.
랭커에 버금갈 만한 반응 속도를 지닌 게 아닌 이상, 살아남을 방법조차도 없었다.
챙그랑!
동시에 병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나마 가시를 거두는 사이에 약간의 딜레이가 있었고, 에일과 네슈아는 포션을 단숨에 마셔 회복했다.
상대에 감탄해 벙해 있을 틈은 없었다.
다시 한 번 더 발을 박찬 둘은 괴수의 기다란 두 팔과 손톱을 피해가며 공격을 쑤셔 넣었다.
특수한 성역이라 그런지 용케 지형이 부서지는 일은 없었지만, 녀석의 본체는 한 대만 제대로 직격당하더라도 위험할 정도였다.
단 한 번의 실수만으로 끝장날 수 있을 만큼 신중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감함을 잃지는 않았다.
많지는 않았지만 둘의 공격 스킬들이 연달아 꽂히며, 녀석의 체력도 차차 줄어들었다.
콰드드득!
또다시 발동된 아그리아의 가시 패턴.
이번엔 징조도 없이 패턴이 발동되었고, 조금 더 근접했던 에일은 훨씬 촘촘한 가시들 사이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큭……!”
주르륵 물러난 에일이 바닥을 짚었다.
간신히 살아남긴 했지만, 빈사 상태 직전만큼이나 체력이 줄어들었다.
‘방패는 아예 소용도 없네.’
에일이 걸레짝이 된 방패를 옆으로 내던졌다.
피해 감소 옵션까지 붙은 희귀 등급의 방패였음에도 녀석의 가시엔 조금도 버티지 못하고 뚫렸다.
포션병을 내던진 그는 치유의 빛 스킬을 발동해 남은 체력을 마저 채웠다.
하나 치유를 할 수 있는 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기이한 괴수는 생김새에 어울리지 않게 기도하듯 두 팔을 모았다.
츠츠츠츠!
하얀빛이 감싸자 온몸의 상처들이 아물기 시작한 모습.
녀석의 치유 패턴이었다.
‘누가 물의 교단 아니랄까 봐……!’
에일은 재빨리 무기를 스왑했다.
기껏 깎아 놓은 체력이 다시 차오르고 있었고, 곧바로 패턴을 멈춰야 했다.
파악!
그가 던진 단검이 정확히 놈의 가슴팍에 꽂혔다.
에일이 보조 무장으로 지닌 단검으로, 치유 불가 옵션을 가진 제법 고가의 장비였다.
뿜어져 나오는 하얀 빛은 여전했지만, 정작 더 이상 상처가 아물지 않았고 체력이 차오르는 것 또한 뚝 멈췄다.
그동안 여러 보조 무기들에 괜히 투자를 하고 있던 게 아니었다.
이렇듯 각 상황에 유연히 대처할 수 있도록 할 수 있기 위함이었다.
“네슈아!”
에일이 반대편을 바라보며 외쳤다.
그러자 시선을 받은 네슈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처럼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 자세히 뜻을 나눌 수는 없었지만, 긴말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상급 심판의 창 스크롤 - 167Lv]
[상급 침묵의 창 스크롤 - 163Lv]
파아앗!
동시에 사용된 두 스크롤이 빛을 발했다.
상대는 바하무트 아래의 상위 권속.
아직 약화된 상태라고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존재의 격이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고작 상급 스크롤 정도로는 이렇다 할 대미지도 들어가지 않을 상대라는 것.
‘하지만 아주 찰나의 속박 정도는 가능해!’
쩌어엉!
양쪽에서 날아든 거대한 창이 괴수의 몸뚱이를 관통했다.
X자로 꽂힌 창에 아그리아의 움직임은 잠시나마 멈추었다.
콰드득!
녀석이 몸에 힘을 주어 꿈틀거리자 거대한 창에 금이 생기며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했다.
하나 창들의 효과가 사라지기 전.
에일은 바닥에 검을 찍어 내리며 스킬을 시전했다.
콰아아아!
위에서 떨어진 징벌의 검이 아그리아에게 꽂혔다.
이단을 상대로 적용되는 온갖 데미지 보너스에 더해져, 유일 등급의 신성 마법에 끼얹어졌다.
막대한 대미지로 놈의 체력바가 주르륵 줄어들었다.
그렇게 남은 아그리아의 체력은.
[남은 체력 - 81.1%]
“하… 좀 더 굴러야 한단 건가…….”
헛웃음을 지은 에일이 땅을 박찼다.
* * *
촤아아악!
충격파에 밀려난 에일이 간신히 균형을 잡으며 바닥을 짚었다.
하지만 곧바로 날아드는 가시 패턴에 몸을 날려야 했다.
‘휴, 이번엔 선방했네.’
절반만 날아간 자신의 체력에 에일이 만족감을 표했다.
불규칙한 발동 시점과 공격 방식 덕에 눈에 익혀지지도 않는 극악의 패턴이었다.
아무리 그들이라고 한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속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진행된 레이드는 어느 정도 종착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무지 죽을 생각이 없어 보이던 녀석의 체력이 어느새 30퍼센트밖에 남지 않았다.
끄아아아!
또다시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괴물.
상처투성이인 두 팔로 머리를 감싸며, 이성을 잃은 듯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보이던 패턴과는 완전히 다른 행동.
“뭐… 쉽게 끝날 거라 생각은 안 했어.”
다음 페이즈의 낌새에 에일이 장검을 들어 올리며 준비했다.
체력이 적어질 시점에 무언가 더 보일 거란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페이즈가 닥칠지에 대해선, 완전히 그의 예상 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츠츠츠츳!
“……!”
네슈아가 서 있던 주변의 공간 자체가 비틀렸다.
깜짝 놀란 네슈아가 발을 박차 몸을 피하려 했지만, 이미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공간 속에서 빠져나가는 건 무리였다.
파앗!
흔적도 없이 완전히 사라진 네슈아.
“무슨…….”
에일은 급히 파티창을 확인했다.
하지만 네슈아의 체력바는 여전히 활성화되어 있었고, 사망 표시가 붙어 있지도 않았다.
즉, 방금의 패턴으로 그를 어딘가 다른 공간으로 보내 버렸다는 것이다.
에일이 녀석을 혼자 상대해야 한다는 뜻.
하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덤벼들 거란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우뚝 멈춰선 괴물은 구역질을 하기 시작하더니 무언가를 속에서 토해냈다.
후두두둑!
녀석의 거대한 입속에서 떨어진 한 여성.
그때, 괴물 근처에 네슈아에게 생겨났던 것처럼 공간의 왜곡이 발생했고, 녀석 역시 어딘가로 갑자기 사라졌다.
‘네슈아 쪽으로 간 건가?’
터억!
바닥을 짚은 여성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좀 전의 이성을 잃은 야수가 아닌, 대교구장 멜리아의 모습을 되찾은 그녀.
하지만 섬뜩하게도 새까맣게 물든 양쪽 눈은 원래의 그녀가 아니라는 걸 알려 주고 있었다.
“최초의 사도, 여섯 번째 집행관, 루의 장기말.”
삐딱한 고개로 에일을 응시한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이하게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가 동시에 섞여 나왔다.
“더 이상 설치지 못하도록… 숨통을 끊어 주지.”
그녀가 서리가 맺힌 긴 창을 치켜세웠다.
‘이쪽이… 진짜라는 건가.’
상대의 상태창을 확인한 에일은 검을 움켜쥐었다.
[바하무트의 상위 권속 ‘아그리아’]
[남은 체력 - 1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