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구원의 사도
후두두둑!
높은 천장에서 물줄기와 함께 고꾸라진 에일이 떨어져 내렸다.
겨우 영원의 호수에서 빠져나온 그는 흠뻑 젖은 옷과 머리를 털어 냈다.
다행히 수중 호흡 포션의 지속 시간이 끝나기 전에 입구를 발견했고, 마침 그의 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포션의 지속 시간이 끝났습니다.]
“진짜 죽을 뻔했네.”
에일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영원의 호수에 살던 무시무시한 생김새의 해양 괴수들은 그에게 별 관심 없는 듯 지나쳐 주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 넓은 호수에서 조그만 입구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참을 내려간 에일은 바닥에 닿았고, 가장 깊은 곳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여야 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찾은 가장 깊은 바닥.
그 바닥 끝에는 정체 모를 균열이 나 있었다.
입구라는 걸 직감한 에일은 그 안으로 들어서려 했지만, 갑자기 다리에 휘감기는 촉수가 그를 방해했다.
징그럽게 생긴 시꺼먼 촉수들은 한두 개가 아니었고, 수십, 수백 개의 촉수들에게 꼼짝없이 붙들려 죽을 뻔했다.
“어우씨……!”
에일은 지금도 다리에 붙어 있던 조그만 촉수 하나를 발견했고, 기겁해서 촉수를 서둘러 떼어 냈다.
정신없이 잘라 냈던 촉수 중 하나가 남아 있던 것이었고, 꿈틀거리는 녀석을 검으로 내려찍었다.
‘휴, 불을 싫어해서 겨우 살았어.’
수중에서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다행히 에일에겐 쥐여져 있던 장검과 성화가 있었다.
뜨거운 불길에 익숙하지 않았는지 기겁하는 촉수들.
장검에 붙은 불꽃으로 떨쳐 낸 뒤, 겨우 이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여기가 맞나……?”
무사히 도착했다는 걸 자각한 에일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호수의 가장 깊은 바닥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린 그였지만, 정작 지금 자리하고 있는 곳은 어딘지 모를 높은 산맥의 꼭대기였다.
드넓게 펼쳐진 밀림과 습지.
엘트리스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처럼 또 다른 세계가 그를 맞이했고, 호수의 균열에서 조금씩 흘러나오는 물줄기는 강이 되어 사방으로 흐르고 있었다.
“하하…….”
에일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곳이 정말 성물 파편과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또다시 이런 지역을 발견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임은 변함없었다.
복잡한 지형을 살피던 에일의 시선은 곧 아래에 보이는 수많은 마을들과 마주했다.
“음, 전도해야 할 대상이 또 생겼네.”
[‘빛의 심판자, 루’가 미소 짓습니다.]
* * *
시드나.
남부 늪지대의 깊은 지하에 위치한 또 다른 지역이었다.
유저에게 처음으로 발견된 지역이자, 엘트리스와 같은 지하 세계이기도 했다.
인간이 전무하고 이종족으로 가득했던 엘트리스와 달리, 오히려 시드나는 인간 종족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강인한 전사 부족을 이루고 있는 데다가 거뭇한 피부가 특징이긴 했지만, 지상의 인간과 다를 건 없었다.
에일은 거리상 가장 가까운 첫 번째 마을로 향했고, 그들은 낯선 이방인이자 하얀 피부를 가진 에일을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그건 단지 호기심일 뿐이었다.
그들은 다가온 에일을 경계하며 그가 소개하는 종교에 대해선 조금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엔 관심 없어.”
“당장 먹고 살기 바쁘다고.”
냉랭한 마을 사람들의 반응.
거대한 여신의 신전이나 다름없게 되어 버린 엘트리스에서의 상황과는 완전히 달랐다.
‘역시나 쉽지 않네.’
갑자기 찾아온 이방인의 종교.
그동안 믿어 왔던 신이 있던 것도 아니고, 대지가 오염되는 등의 존속이 걸린 대위기가 찾아왔던 것도 아니다.
단지 힘들게 자연과 싸우며 생존 중일 뿐이었다.
‘누가 오지 아래에 있는 지역 아니랄까 봐, 이 동네도 참 극한 환경이란 말이지.’
오는 동안에 보았던 것도 그렇고, 이곳 마을 사람들의 생활 환경도 그렇고.
지상의 왕국은 물론, 같은 지하 지역인 엘트리스에 비해서도 한참이나 낙후된 환경이었다.
이곳 시드나 지역 자체가 터를 잡고 살기 굉장히 열악한 환경이었다.
위쪽의 늪지대만큼이나 사람이 지내기 힘겨운 곳이었고, 상당한 수의 몬스터들이 리젠되었다.
강인한 전사 부족임에도 하루하루 생존과 싸우는 것만으로도 벅차 보였다.
보통 이렇게 힘든 상황이면 더 신을 찾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는 시드나 주민들의 성향 탓인 듯했다.
‘그럼 여기서 이것저것 도와주면 되겠지?’
이곳에 있을지 모르는 성지나 성물 파편에 대해서 묻고 싶었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제대로 된 답변을 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우선 마음을 열 수 있도록 천천히 다가가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광활한 지상의 남부 늪지대와 달리 이곳은 그렇게까지 넓은 지역은 아니었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그의 힘으로도 유의미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대강 계획을 정한 에일은 이곳 마을을 이끄는 부족장인 매드낙에게 향했다.
처음 마을에 들어왔을 때 그와 마주친 덕에 누가 마을의 책임자인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뭐야. 아직도 여기 있었나?”
“당분간 여기서 신세를 질 수 있을까 해서.”
“귀찮게 하지 말고 빨리 떠나라고 했을 텐데.”
매드낙이 에일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부족원들 중에서도 유독 커다란 덩치를 지닌 그가 험악한 표정까지 짓자 짐승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러지 말고. 혹시 해결했으면 하는 골치 아픈 일은 없어?”
“수상쩍은 외지인에게 맡길 일 같은 건 없다. 우리 문제는 우리가 해결해.”
여지없이 배타적인 성향을 드러내 보이는 매드낙.
질문 하나 제대로 받아 주려 하질 않으니, 에일은 여기만 이런 건지 다른 마을도 똑같은지 알 수가 없었다.
“지상에서 내려와서 갈 곳이 없다니까. 여기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도 없어.”
“그건 네 사정이고.”
매드낙이 까칠한 반응을 보이며 등을 돌렸다.
하지만 그때 어디선가 급박한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습격이다!”
마을 외곽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에일도 마을에 들어오며 봤던, 높게 세워진 감시 초소에서 습격해 오는 몬스터 무리를 발견한 것이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닥쳐, 개죽음 당하기 싫으면 당장 반대편으로 빠져나가라.”
신신당부한 매드낙이 큼지막한 도끼를 꺼내든 채 성큼성큼 나아갔다.
다른 부족 전사들도 각자 무기를 챙기더니 그를 따라 분주히 움직였다.
얼핏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
“음, 그럴 수야 없지.”
마침 딱 좋은 타이밍에 일어난 이벤트.
에일이 그를 놓칠 리가 없었다.
전사들이 향하던 방향으로 슬쩍 뒤따라간 에일은 도중에 발견한 가장 높은 나무로 올라타 아래를 내려다봤다.
나무들이 무성해 모든 상황을 한 눈에 파악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적당한 눈썰미만 있다면,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는지에 대해서 얼마든지 파악할 수 있었다.
‘저기 있다.’
한쪽 숲을 가득 채우며 마을로 밀고 들어오고 있는 언데드 군단의 모습.
반대편에는 부족 전사들이 모여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습격 이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네포스의 언데드 군단에게서 투샤 마을을 지켜 내십시오!]
‘좋았어.’
마침 그의 앞에 생겨난 이벤트 퀘스트.
부족원에게 이런저런 정보를 얻어 낼 기회인 데다가, 퀘스트까지 생겨났으니 끼어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파앗!
나무에서 뛰어내린 에일은 곧장 전장으로 향했다.
지금 나타난 언데드 군단의 몬스터들은 최소 200 이상의 구성이었다.
하지만 부족원들도 전부 200을 넘어서고 있는 강력한 전사들인 건 마찬가지였다.
이런 극한의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녀석들이 아니랄까 봐, 몬스터나 사람이나 온통 괴물투성이였다.
하지만 에일도 이젠 어디 가서 레벨이 부족한 수준은 아니었다.
키에에엑!
“놈들을 막아 내!”
몬스터와 전사들이 한데 뒤엉킨 혼란한 전장.
사람과 짐승, 흉측한 괴수들까지 늪지에서 떠오른 온갖 시체들이 마을을 향해 진격해 온 상황이었다.
콰드득!
반으로 쪼개진 거대한 괴물.
선두에 선 매드낙은 자신보다 세 배 크기가 넘는 거체를 단숨에 갈라 냈고, 그야말로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며 전장을 휘저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을의 전사들은 한두 번 습격에 당해 보는 것이 아닌지 능숙하게 대처했고, 언데드 대군을 완벽히 막아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다른 시체들과는 조금 다른 몬스터가 나타났다.
스스스슷!
영혼체로 이루어진 듯 몸이 떠올라 있는 반투명한 괴물.
악령 보르쿨, 220레벨의 보스 몬스터였다.
갑자기 나타난 녀석은 기다란 손톱을 휘두르며 주변의 전사들을 마구 베었다.
그러자 매드낙이 달려들어 녀석의 몸통에 깊숙이 도끼를 꽂아 넣었다.
하지만.
후웅!
매드낙의 공격은 맥없이 허공을 갈랐다.
빗나간 것이 아니라 몸을 그대로 통과해 버린 상황.
“이런……!”
“설마, 네포스의 하수인인가!”
전사들의 얼굴이 일순간에 창백해졌다.
네포스의 하수인이라면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시드나 지역에서는 하나의 재해로 일컬어지는 죽음의 하수인.
막을 수 없는 존재로 알려진 재앙과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하나 게임 시스템상으로 보았을 때는 물리 계열 공격이 아예 안 통하는 특수 보스 몬스터였고, 오로지 전사들로 이루어진 시드나의 부족원들로서는 대항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옆 마을도 꼼짝없이 당했다고 들었어!”
“부족장! 어서 달아나야 해!”
“아니, 이대로 도망갈 순 없다. 이쪽에서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해.”
당황하는 전사들과 달리, 매드낙은 비장하게 도끼를 잡아 쥐었다.
아직 마을의 부족원들이 몸을 피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고, 그들을 위해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벌어 줘야 했다.
그렇게 그가 비장하게 죽음을 다짐한 순간.
촤아아악!
모습을 드러낸 에일이 괴물를 가르며 나타났다.
장검에 일렁이던 강렬한 성화가 보르쿨을 갈랐고, 녀석은 극심한 고통 속에 몸부림쳤다.
키이이이익!
“이,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네포스의 하수인에게 공격이 허용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하지만 지금 녀석에게 대미지가 들어간 건 누가 보더라도 확실했다.
직접 눈앞에서 보고 있음에도 전사들은 이방인의 공격이 적중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을 지경이었다.
워로드에 공략 불가능한 몬스터란 없는 법.
모든 물리 피해를 무시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 보르쿨이었지만, 오히려 마법 피해에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성화를 비롯한 신성 마법의 대미지는 확실하게 들어간다는 것.
“이거… 타이밍 딱 좋은걸.”
에일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