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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이단심판관-168화 (168/227)

168화 결투 (1)

화륵!

에일의 검날에 붙은 백색의 성화.

동시에 이단의 낙인이 그롬의 머리 위에 떠올랐다.

[이단이 지정되었습니다!]

“오히려 잘됐어. 한번 해 보는 수밖에.”

에일이 검을 바로 쥐었다.

이번 상대는 준랭커급의 네임드 플레이어.

워로드 6대 길드에 정식으로 들어가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상위 플레이어였다.

버거울지도 모르는 상대였지만, 최근 급속도로 성장한 자신의 위치와 수준을 알아보기엔 최적의 상대였다.

으워어어!

에일을 둘러싼 시체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인간과 몬스터, 혹은 그 둘이 기괴하게 섞인 형상까지.

모두 제각각의 모습을 띤 언데드들이 팔을 뻗어왔다.

서걱!

그는 다가서는 녀석들을 단숨에 베어냈다.

신성 마법인 성화의 속성은 언데드의 천적이나 다름없는 것.

에일이 장검을 휘두를 때마다 절단 난 시체들이 나가떨어졌다.

거기다 검이 지난 경로엔 불꽃의 잔상과 열기가 남아, 놈들도 마구잡이로 쉽게 다가서지는 못했다.

크르르륵!

하지만 그가 베어 넘기는 시체들이 무색하게 오히려 언데드들이 늘어나는 속도가 더욱 빨랐다.

미리 대량으로 시체를 준비해 둔 고레벨 네크로맨서의 소환 속도를 따라잡기엔 무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데드들을 향해 스킬을 쏟아부을 수도 없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싸움에서 서로에게 포션을 마실 틈을 주는 일 따위는 없었고, 에일의 마나양은 한정되어 있었다.

이런 잡몹들에게 스킬을 마구 남발하는 건 금물이었다.

‘이런 경우에 정석적인 파훼법은 두 가지. 소환수들을 줄이면서 마나가 모두 떨어지기를 기다리거나, 시전자를 노리거나.’

에일의 머릿속에 그려진 두 가지 선택지.

하지만 그롬은 미리 준비해 둔 시체들 덕에 마나 소모량을 상당량 줄일 수 있었고, 시체 조종만으로 마나가 떨어질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거기다 그가 착용하고 있는 장신구와 방어구들.

둘다 마나 재생 옵션이 붙은 영웅급의 장비 세트였다.

250쯤 되는 고레벨 장비라면 그 숫자나 선택의 폭이 좁아지기 때문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노려야 하는 건 본체……!’

언제까지고 녀석들을 상대할 수는 없는 일.

에일은 시전자를 직접 제압하는 쪽을 선택했다.

화르르륵!

영웅급 스킬, 불의 세례가 발동되었다.

장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성화가 시체들을 불태웠다.

넓은 범위를 자랑하는 에일의 주력 광역기인 만큼, 길을 막고 있던 언데드들이 단번에 사라졌다.

포위망의 한쪽 면이 무방비하게 뻥 뚫린 모습.

“무슨……!”

느긋하게 마법을 시전하던 그롬도 예상 밖의 변수에 깜짝 놀랐다.

근접 캐릭터가 이만한 규모의 광역기를 가진 경우는 흔치 않았다.

하나 그가 대처를 마련하기도 전.

높게 치켜든 장검이 그롬을 향해 떨어졌다.

이미 속도를 살려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선 에일의 움직임 탓에, 그는 반응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끝이다!”

“헤.”

슬며시 올라간 그롬의 입가.

당혹감이 서렸던 그의 표정은 온데간데없어졌다.

오히려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느낀 에일의 시선이 돌아갔고, 자신의 발밑에 불길한 검은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마법진……!’

콰아아아앙!

바닥에서 터져 나온 커다란 폭발.

꼼짝없이 폭발에 휘말린 에일은 한참을 튕겨 나가 나무에 부딪혔다.

‘젠장……!’

피를 토해 낸 에일이 급히 바닥을 짚었다.

상대는 근접전에 취약한 네크로맨서.

방심을 틈타 단번에 잡아냈다고 생각했건만, 꼼짝없이 놈의 수에 당해 버렸다.

녀석은 고의로 당황한 척을 했고, 정작 에일이 다가가자 바닥에 은밀히 그려진 함정 마법진이 발동된 것이다.

단번에 30퍼센트가량이나 날아간 그의 체력.

더군다나 마법진의 효과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악한 저주로 인해 고통스러운 상처가 남겨졌습니다!]

[15분간 모든 치유 효과가 차단됩니다!]

저주가 담긴 마법진.

에일이 지닌 모든 포션과 치유 스킬들이 봉쇄되었다.

“네가 회복기를 갖고 있다는 것쯤은 듣고 왔지.”

“시체에다가 함정 마법진까지… 많이도 준비해 왔네.”

“난 방심 같은 거 안 하거든. 레벨이 얼마나 차이 나든 알려진 전력이 어떻든, 높은 현상금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그롬이 자신만만한 웃음을 흘렸다.

“상성 차이가 있으니까 할 만하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대처법만 알고 있다면, 상성이 전부가 아니야. 이단심판관은 처음이지만, 몽크나 성기사들은 그동안 지겹도록 잡아왔단 말이지.”

그는 천천히 스태프를 들어올렸다.

“워로드 선배로서… 루키한테 좋은 경험 하나 시켜 주지.”

스스스슷!

내려찍힌 스태프에서 검은 마력의 파동이 퍼져나갔다.

안 그래도 고르지 못했던 늪지의 땅이 검게 물들며 썩어갔다.

영웅급 스킬, 부패의 대지.

범위 내에 있는 모든 적의 이동속도와 방어력을 감소시키는 필드형 마법이었다.

넓은 범위 탓에 적당히 피하며 싸우는 게 불가능한 스킬이었고, 일단 자리에서 벗어난 뒤 싸우는 것이 정석적인 상대법이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주위를 둘러본 에일이 간단히 결론을 내렸다.

안타깝게도 그롬은 한 번 걸려든 사냥감을 쉽게 놓아줄 만큼 그리 허술하지 않았다.

이미 주변에 일어난 언데드들로 인해 퇴로는 사실상 모두 막혀 버린 뒤였다.

‘대놓고 도망치기엔 지형도 마땅치 않고… 거기에 함정 마법진이 어디에 더 있을지도 모르니.’

그롬이 준비해 둔 함정 마법진의 존재 탓에 이젠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마력으로 작동되는 함정이기에 직접 걸려들기 전까진 위치를 눈으로 식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로 탐지형 스킬이 있다면 모를까, 에일에게 그런 스킬은 전무했다.

‘물론 안전한 지점 정도는 눈치챌 수 있지만.’

설치 아이템 취급인 함정형 마법진들은 기본적으로 피아를 구분하지 않는다.

마법진을 설치한 그롬이나 그의 소환수인 언데드들이 밟는다 해도 작동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즉, 언데드들과 그롬이 서 있던 위치만큼은 안전하다는 것.

촤악!

에일은 달려드는 언데드들을 베어 나가면서도,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시선을 돌리며 놈들의 움직임을 모두 눈에 담았다.

마법진으로부터 안전한 지점들을 머릿속에 하나하나 새겨 두는 중이었다.

“이크, 그걸 보고 있었단 말야?”

에일의 낌새를 눈치챈 그롬이 재빨리 스태프를 들어 올렸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언데드를 상대하는 와중에 안전지대를 외우고 있었다니.

그런 틈을 만들어 줄 수야 없었다.

드드드득!

갑자기 언데드들의 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불어넣는 풍선처럼 몸집이 커지는 놈들의 모습.

그것도 하필 에일에게서 가장 가까이 있던 녀석들만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낌새를 눈치챈 에일은 기겁하며 몸을 던졌다.

콰과과광!

요란하게 터져 나가는 시체들.

커다란 폭발에 바닥이 움푹 파였고, 갈갈이 찢긴 시체 파편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칫…….”

폭발에 살짝 휘말린 에일이 못 마땅한 표정으로 그을린 팔을 털어냈다.

재빨리 몸을 빼냈지만, 타이밍을 살짝 놓친 탓에 데미지를 입어 버렸다.

‘듣던 대로 짜증나는 스킬을 써대네.’

같은 직업이라도 선택한 스킬들의 구성에 따라 플레이 스타일이 천차만별로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그중 네크로맨서인 그롬이 택한 스킬 구성은 일명 ‘폭발 네크’였다.

일반적인 네크로맨서와 달리, 시체들을 폭발시키며 데미지를 입히는 또 다른 공격 옵션을 가진 방식이었다.

“그걸 피하다니 대단한데? 처음 상대할 때 타이밍 잡기가 어려울 텐데.”

에일의 움직임을 본 그롬이 감탄했다.

시체 폭발의 반 박자 빠른 타이밍은 처음 상대하는 입장에선 절대 대처가 불가능하기로 악명 높았다.

굉장한 반응 속도를 지닌 에일조차도 그롬의 시체 폭발에 대해 미리 염두에 두었기에 피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역시 듣던 대로 골치 아픈 상대야…….’

에일도 네임드 플레이어인 그롬의 전투법에 대해선 미리 알고 있던 정보가 많았다.

시체 폭발 계열은 하나같이 마나 소모량이 큰 하이코스트 스킬들이라, 기본적으로 마나가 많이 필요한 네크로맨서의 부담을 한결 더 키웠다.

그렇기에 그롬이 고등급의 마나 재생 세트를 둘씩이나 두르고 있던 것이다.

저자본으로는 시도조차 못 할 방식.

‘역시 길게 끌어선 안 돼. 어떻게든 거리를 좁혀야 한다.’

시체 폭발은 분명 굉장히 까다로운 스킬이었지만, 마나 소모 외에도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폭발인 만큼 휘말리는 건 시전자 본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즉, 시전자에게 가까이만 접근한다면 시체 폭발은 봉쇄된다.

뒤편에 있는 그롬에게 파고들어 확실히 끝내야 했다.

파앗!

마법진이 없는 안전 지대들을 상기한 에일은 그쪽만을 밟아가며 그롬을 향해 달려들었다.

무서운 기세로 시체를 베어가며 거리를 좁혀오는 그의 모습.

“어딜……!”

드드득!

에일의 앞을 가로막은 괴물의 시체가 큼지막하게 부풀어 올랐다.

강한 폭발의 조짐.

베어낸다 한들 소용없고, 몸을 피하기엔 이미 늦었다.

그 상황에서 에일이 발동한 것은 스킬 ‘역극’.

단번에 놈의 뒤를 파고든 에일은 부풀어 오른 괴물의 등을 힘껏 발로 차내며 도약했다.

녀석은 반대로 나가떨어졌고, 에일은 발판을 얻은 것이다.

콰앙!

뒤편에서 일어난 커다란 폭발.

그사이 그롬의 코앞까지 다가간 에일이 검을 힘껏 휘둘렀다.

콰직!

파고든 장검이 그의 몸 위로 드러난 뼈 갑옷과 마주했다.

1회에 한해 상당한 피해량을 흡수해 주는 방어 스킬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던 수였다.

이단을 대상으로 한 추가 데미지, 패시브가 주는 40퍼센트의 방어 관통, 그리고 영웅급 스킬 ‘일섬’.

뼈갑옷을 부숴 버리고 그롬을 베어 버리기엔 충분했다.

콰아아아!

“컥…….”

한참을 튕겨져 나간 그롬이 바닥에 엎어졌다.

에일은 이 기회를 몰아 아예 그를 끝장내려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때 엎어져 있던 그롬이 급히 마법을 캐스팅했다.

콰과광!

그가 미리 바닥에 매설해 둔 시체들이 연달아 폭발했고, 에일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끝내진 못했네.’

에일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치유가 봉쇄된 이상 최대한 짧게 끝낼수록 좋았고, 이번 기회에 끝내지 못한 것은 아까운 일이었다.

“휴, 큰일 날 뻔했어.”

일어선 그롬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곧 날카로운 그의 눈빛이 에일을 훑었다.

놀라운 실력을 지닌 루키라 듣기는 했지만, 설마 이 정도로 선전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경험도 거의 없는 녀석이 이 정도까지 할 줄이야. 난놈은 난놈이네. 어쩔 수 없나.’

무언가를 결심한 그는 붉은 로브를 펄럭이며 아이템을 꺼냈다.

“설마 이것까지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뭐, 그래도 10만 골드짜리니까. 적자는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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