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개입
에일이 남부 늪지대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는 소식은 일반 유저들 사이에서도 많이 알려져 있었다.
늪지대 곳곳에 온갖 유저와 괴물들의 시체가 걸려 있는 모습은 모두의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빛의 교단의 문양까지도 곳곳에 새겨 놓으며, 광기에 찬 처형대를 만들어 놓은 그의 행적.
이제 그런 짓을 할 사람은 에일밖에 없었다.
심지어 몇몇 열성적인 에일의 추종자들 사이에선 성지 순례길이라고도 불리며, 다양한 처형의 흔적들을 눈에 새기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워튜브에 실시간으로 공개된 한 영상.
에일이 습격해 온 유저를 제압한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고, 유저들 사이에선 놀라운 화젯거리가 되었다.
- 저거 그롬이잖아! 250짜리 네크로맨서 네임드!
- 갑자기 왜 공격한 거지?
- 누가 현상금이라도 건 모양인데?
- 진짜 준비 엄청 해왔네.
- 솔직히 이건 못 뒤집는다.
시시각기 올라오는 반응들.
첫 공개는 실시간 방식으로 올라온 탓에 시청자들은 아직 결과를 알 수 없었다.
그것이 바로 긴장감을 높여 주는 요소였다.
게다가 비록 편집을 거친 영상이라 해도, 블러디직 스튜디오의 손을 거치자 오히려 원본보다도 더욱 생동감 넘치는 장면들이 연출되었다.
그리고 영상이 진행됨에 따라 가망이 없어 보인다는 사람들의 반응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 뭐야? 진짜 이겼어? 40레벨 차이를??
- 그롬 엄청 잘하던 애 아니었냐. 폭발 네크는 상성도 덜 타잖아. 거기다 함정까지 파 놨는데 졌다고?
- 로덴 잡았을 때부터 내가 줄곧 말하고 다녔잖아. 진짜 물건이라고.
- 여 신 만 세
- 띄워 주는 거에 비해 거품이다 뭐다 하던 놈들 싹 사라졌죠?
- 저도 저기 성지순례 갑니다.
후발 주자로 시작했던 루키가 무려 40레벨 차이의 유저를 제압한 것.
준랭커급들이 도사리고 있는 상위 구간은 전원이 만만히 볼 수 없는 실력자들뿐이었고, 이러한 이변은 결코 쉽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단순히 방심이나 상성 정도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
그것을 에일은 보기 좋게 해내 보였다.
6대 길드 중 네 곳이 전쟁을 벌여 온 유저의 신경이 쏠려 있는 지금 상황에서도 커뮤니티들에 폭발적인 반응이 나올 정도였다.
이는 상대가 준랭커들 중에서도 유명세를 가진 네임드 플레이어라는 점도 작용했다.
폭발 네크로 유명한 그롬은 이미 대중에게도 검증이 된 유저였고, 그를 쓰러뜨린 것은 기념비적인 일이었다.
단순히 그를 실력 있는 루키 수준으로 보던 각 길드의 관계자들 또한 완전히 시선을 달리하게 되었다.
아직 레벨 자체는 덜하다 해도, 이젠 실질적으로 랭커의 자리까지도 노리고 있는 최상위권 유저라고 여겨야 한다는 것.
끄아아악!
콰드드득!
그리고 영상의 마무리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번엔 특별 재료라서 그런지 평소 에일의 영상을 즐겨 보던 이들도 깜짝 놀랄 만한 처형이 이루어졌다.
영상을 보고 있던 나이트메어의 길드장, 카린마저도 인상을 슬쩍 찌푸리게 만들 정도였다.
툭.
영상이 끝나자 화면을 멈춘 카린은 옆을 돌아봤다.
“어때? 미친 짓만 빼놓고 본다면.”
“음, 인정해야겠습니다. 단순히 루키 수준은 아니네요.”
람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과거 에일에 대한 그녀의 의견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나도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할 줄 알았는데, 벌써 여기까지 오다니. 제법이야.”
카린이 흥미로운 눈으로 화면 속 에일을 바라봤다.
그녀의 입가엔 바로 옆의 람빅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희미한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거기다 마지막에 재밌는 점도 있고. 람빅, 이 정도는 봤겠지?”
“예, 물론입니다.”
저번에 그녀가 말하던 영상 속 ‘무언가’는 아직도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의 영상에서는 람빅도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그롬을 늪지 거인과 함께 마무리할 때, 에일이 사용한 것은 보통의 스킬이 아닌 공격계 신성마법.
수준급의 편집 기술로 영상이 뚝 끊기지 않게 하면서도 마무리 일격의 정체를 잘 숨겨냈지만, 블러디직 스튜디오의 실력으로도 하이 랭커들의 눈으로부터 완전히 감추진 못했다.
‘그것도 상당한 대형 마법이었지.’
편집 탓에 정확히 어떤 스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이단심판관이 어째서 저런 고화력 신성마법를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선 그녀도 쉽게 짐작할 수 없었다.
워로드엔 엄청난 수의 스킬과 아이템, 그 외의 변수들로 넘쳐났고 이것만으로는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혹시 전설급 스킬은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그냥 해본 소리야.”
전설 스킬은 전 유저를 통틀어도 손가락에 꼽힐 만한 수였고, 그걸 개인 유저가 얻어냈을 거란 생각은 누구도 하지 못했다.
6대 길드의 수장인 카린도 하나의 전설 스킬을 지닌 게 전부였다.
“어찌 됐건 수준은 확실히 확인했어.”
카린이 간단히 말했다.
에일은 이미 루키급 아니라 실제 전력으로도 어느 정도 활약이 가능할 수준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더 빠른 속도로 격차를 따라잡으며 그 이상의 전력을 보여 줄 것이었다.
“그러면… 슬슬 우리의 판 안으로 끌어들여 볼까.”
* * *
[고대 성물의 두 번째 파편을 회수하였습니다!]
[성물을 구성하는 네 가지 핵심 파편 중 하나를 모았습니다.]
[신격, ‘빛의 심판자’가 막대한 양의 영향력을 획득하였습니다.]
[여신의 총애 +7.39% (현재 151.41%)]
[빛의 교단 공헌도 +50,000]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
.
에일의 앞에 떠오른 화려한 메시지들.
무사히 교단으로 복귀한 그는 성물의 회수 임무를 끝마쳤다.
이것으로 성물의 두 가지 핵심 파편을 자력으로 회수해 내는 데 성공한 셈이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위업을 달성한 집행관이었다.
[‘빛의 심판자, 루’가 자신의 사도에게 무한한 신뢰를 표합니다!]
[‘생명의 어머니’가 이를 갈며 그녀를 노려봅니다.]
‘15개 중에서 6개라…….’
이제는 익숙해진 신격들의 다툼들의 다툼을 뒤로한 채, 에일은 교단의 성물 회수 상황을 확인했다.
그동안 대륙 안쪽에서 찾아낸 다른 성물 파편들까지 합치면 빛의 교단은 총 여섯 개의 파편을 회수해 냈다.
워로드의 여섯 교단 중에선 단연 앞서나가고 있는 셈.
물론 이것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아직 끝이 아니니까. 핵심 파편만 쳐도 두 개가 남았고.’
남은 것은 동부 황야와 서부 사막.
다음 성물을 늦지 않게 찾으려면, 가급적 발빠르게 움직이는 게 좋았다.
심지어 지금 시점이라면 한쪽 정도는 누군가가 챙겨갔을지도 몰랐다.
남부 성물을 노리고 있는 유저들도 이미 에일이 채간 줄은 꿈에도 모르고 고생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6대 길드 쪽은 대체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그가 임무를 마치고 복귀하는 사이. 워로드 대륙의 상황은 이전보다도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특히 갑자기 동북부 지역에서 나타난 고대 정령의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무사히 끝날 줄만 알았던 월드 퀘스트였는데, 왕자 측의 음모대로 고대 정령 한 마리가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그리핀의 영토 한쪽 면은 완전히 초토화되고 있었다.
고대 정령만 나타났다면 모를까, 안 그래도 벅찬 아폴리온과의 전면전 중에 일어났으니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전세가 완전히 기울어진 상황.
이대로 가다간 6대 길드의 한쪽 기둥이 꼼짝없이 무너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런 상황인데도 다른 쪽이 요지부동이란 거지…….’
이미 전쟁을 치르고 있던 여명과 나이트메어 길드는 움직이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나머지 두 길드.
철십자와 켈베로스는 이런 상황에서도 아무런 대처도 없이 개입을 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 에일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
그때 마침 미리 연락을 달아뒀던 철십자 측의 연락이 왔다.
- 지금 좀 바쁜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시르?”
궁금하던 참에 들려온 시르의 목소리.
전투라도 하고 있는 건지, 고함 소리와 쇳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마침 잘됐네. 상황이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길드 한쪽이 무너지고 있는데 철십자가 왜 움직이질 않는 거지? 아폴리온이 북동부를 통째로 집어삼켰다간 감당이 안 될 텐데.”
-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야. 움직일 수 없는 거지. 꼼짝없이 발목이 묶여 버렸거든.
“발목이 묶였다는 건…….”
- 그래, 켈베로스가 전쟁을 선포했다.
“말도 안 돼.”
충격적인 소식에 에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켈베로스가 오히려 철십자에게 전쟁을 걸었다는 것,
‘아니… 전 게임에서 경쟁자였긴 해도 그 정도는 아닐 텐데?’
아르메니아 온라인의 두 명문 길드, 켈베로스와 철십자.
한 게임에서 최고의 자리를 놓고 싸운 만큼, 둘은 당연히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굳이 지금 시점에 서로 전쟁을 벌일 만큼 죽일 사이도 아니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뒤로 거래가 오갔다는 가정을 해봐도, 이 정도 확장을 묵인해 주는 건 끝까지 갔을 때 켈베로스의 입장에서도 치명적이었다.
더군다나 켈베로스의 길드장 유론이 망나니라고 알려져 있기는 해도, 결코 머리를 못 굴리는 인물도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전쟁을 선포당한 시르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했다.
- 사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일이야. 그래서 성물을 먼저 넘겨주면서까지 빛의 교단과 거래를 했던 거고.
“설마 저번 거래 조건도 이럴 줄 예상하고서…….”
- 그래, 조만간 움직여 줘야겠어.
콰득!
메신저 너머로 들려오는 섬뜩한 소리.
다행히 시르가 당한 소리는 아니었다.
- 그러고 보니 남부 쪽 성물은 회수했나?
“방금 회수를 끝냈어. 그건 왜?”
- 우리 쪽에 마침 쓸 만한 정보가 있거든. 동부와 서부, 다른 두 핵심 성물은 6대 길드의 손에 있어. 나이트메어와 아폴리온 두 길드가 회수해 갔다.
“…복잡하게 됐네.”
- 그래, 상황이 복잡하지.
교단은 성물의 핵심 파편을 반드시 얻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나머지 두 핵심 파편이 6대 길드의 손에 들어가게 됐을 줄이야.
거래를 하든 힘을 쓰든, 이젠 거인들이 싸우는 저 거대한 전장에 직접 발을 들여야 할 때가 와버렸다는 뜻이었다.
“후, 벌써 이렇게 나서야 하는 건 계산에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