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성전 (2)
드륵.
자리에 앉은 에일이 앞을 바라봤다.
그의 맞은편에 묵묵히 앉아 있는 이는 다고스.
직접 찾아온 아폴리온의 최고 간부였다.
막사 밖으론 빛의 교단의 신도들이 가득한 지금의 상황에서, 적진 한가운데에 찾아왔음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자기 위치가 가진 중요성에 대해서 모를 리는 없을 텐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변수야.’
준비를 해뒀거나 무언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것인지.
어쨌든 놈들의 꿍꿍이를 모르는 지금 상황에선 함부로 그에게 손을 댈 수 없었다.
“그래서 할 이야기가 뭐지?”
분위기를 살피던 에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바로 옆에 있던 나이트메어의 길드장인 카린마저도 제치고 자신에게 용건이 있다는 것은 형식적인 대화는 아닐 터였다.
그러자 다고스가 입을 열었다.
“용건은 간단하다. 이번 전쟁에서 손을 떼라.”
“…겨우 그 말을 하려 여기까지 왔다고?”
에일이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오히려 너무 뻔했기에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그것도 아폴리온 최고 간부가 이곳까지 와서 한다는 소리가 겨우 이런 말이었다니.
“우리의 정체에 대해선 대강 눈치채고 있겠지. 철십자와 여러 번 접촉했다고 들었으니까.”
“숨기려 하지도 않네.”
“이제 와서 알아냈다 해도 달라질 건 없다. 떠들고 다녀 봤자 믿어 줄 만한 이야기도 아니고.”
1세대 게임 이스트혼의 절대 길드, 알키오네.
그의 입으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당당히 말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철십자의 길드장인 시르가 처음 말해 줬을 당시, 에일조차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으니.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떠들어 봤자 소용없다는 건 그들도 알고 있었다.
“이스트혼이 어떻게 됐는지는 알고 있겠지. 워로드도 결국 똑같이 될 거다.”
‘자신감이 넘치는군.’
최초로 등장한 가상현실게임으로 한때 지금의 워로드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을 당시.
그 게임을 통째로 장악한 것이 바로 알키오네였다.
자신감에 넘치더라도 아무도 뭐라 하지 못할 과거 전력을 지닌 이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승리를 확신할 만한 단계는 아닐 텐데.’
비장의 수였던 고대 정령 쪽은 사실상 봉쇄된 상황에, 길드 간의 전황도 팽팽했다.
아래쪽에선 빛의 교단이 밀고 들어가는 중이었고, 이번 전쟁의 결과는 누구도 쉽사리 예상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다고스는 아예 확신을 가지고 있는 듯한 태도였다.
‘뭔가 꾸미는 거라도 있는 건가.’
에일이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철십자를 비롯한 6대 길드라면 모두가 한 게임에서 최고거나, 그에 가까운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자들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6대 길드가 얕은 수에 당해 주지 않을 터.
지금 같은 상황에 어지간한 꼼수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한 번이라도 우리와 적대한 길드는 더 이상 발을 들이지 못할 거다. 단, 너에겐 특별히 면죄부를 주겠다는 거다.”
여전히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다고스가 말을 이었다.
면죄부라, 그의 오만한 말투에 걸맞은 단어 선택이었다.
“왜 나만 특별 대상이지?”
“그건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다른 놈들과는 다르게, 크루거가 널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게 전부지.”
“그게 다라고?”
“개인 유저로서 네가 이만한 파급력을 가져올 거란 건, 우리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이 부분은 인정하지. 하지만 우리에게 너희 교단의 전력은 아무것도 아니다. 네가 보일 수 있는 파급력은 더더욱 그렇고.”
다소 도발적인 어투에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하지만 단순히 헛소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현실적, 그리고 보편적인 시각으로 봤을 땐 맞는 말이었다.
유저 하나가 아무리 날고뛰어 봤자, 6대 길드 앞에서는 철저히 무의미해질 정도였으니까.
“그럼 너에게 선택권을 주지. 빛의 교단에서 벗어난다면 아폴리온에 합류해도 좋다. 이미 랭킹에 든 너라면 간부의 지위를 주는 것도 어렵진 않아.”
[‘빛의 심판자, 루’가 발끈합니다!]
“…그럴 일은 없어.”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군. 교단을 움직여 놈들을 치든가, 아니면 이 상황에서 아예 손을 떼고 물러나 있어라. 어느 쪽이건 상관없다. 지금이라도 빠진다면 이번 전쟁이 끝난 뒤의 안위를 보장해 줄 수 있다.”
“먼저 전자. 집행관이라고 해봤자 교단은 내 멋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야. 게다가 후자도 불가능해. 이미 나이트메어와 거래를 주고받은 뒤고, 그 대가로 성물의 핵심 파편들을 받을 예정이거든.”
빛의 교단 그리고 루에게 있어 성물이라면 포기할 수 없는 대가였다.
애초에 아폴리온과 지금 적대하고 있는 것도 모든 핵심 성물 파편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걸 몰라서 이 제안을 한 게 아니다. 교단이 이 전쟁에 발을 들인 것도 모두 성물 때문이었지. 그렇다면 전쟁을 끝낸 뒤 우리가 가진 것은 물론이고, 나이트메어에게서 빼앗을 성물 파편까지도 너희에게 넘겨줄 수 있다. 교단을 움직일 명분도, 나이트메어와의 거래도 발목을 잡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데도 만약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그 뒤에 있을 일은 굳이 말할 필요 없겠지.”
할 말을 모두 뱉어낸 다고스는 입을 다물었다.
이제는 에일의 결정만을 들으면 그만이라는 듯 팔짱을 낀 채 그를 응시했다.
단순히 이번 전쟁에서 손을 떼기만 하더라도 모든 성물 파편을 주겠다니.
훨씬 더 적은 위험 부담으로 보상만 받아 챙길 수 있는 조건이었고, 마지막엔 협박 섞인 말을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누구라도 혹할 만한 제안이다.
하지만 에일의 대답은 지극히 간단했다.
“싫은데.”
“그렇다는 건…….”
“너희하고 끝장을 봐야 한다는 소리지.”
고민 따위는 없었다.
어차피 6대 길드 간의 전쟁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숙이 발을 들인 상황.
상대가 누구건 간에 비굴하게 숙이고 갈 생각 따윈 없었다.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군. 후회 없는 선택이길 바란다.”
다고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갔다.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한 그의 뒷모습이 막사를 빠져나갔다.
* * *
왕도 아스칼론.
왕국의 수도이자 워로드 내에서 가장 크고 발전된 도시였다.
도시의 한가운데에는 왕궁이 한눈에 보였고, 화려한 대로가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도 있는 법.
스륵.
어두운 뒷골목에서 모습을 드러낸 네슈아가 후드를 눌러쓴 채 대로변으로 나왔다.
수도에서 조사를 진행하고 있던 네슈아는 새롭게 얻은 정보를 양피지에 빼곡이 적어가며 내용을 정리했다.
‘시리오…….’
최근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귀족의 이름이었다.
왕궁 내에 몸을 담고 있는 자이자, 의원직까지 맡고 있는 권력자였는데, 미행의 필요성을 느꼈다.
[‘어둠 속 관조자, 힌’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네슈아의 눈앞에 신격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원래도 말없이 과묵한 신격이었지만, 최근 들어선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아마 성물에 대한 문제 탓일 터였다.
이번 조사는 성물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고, 사실상 네슈아는 성물에 대해 포기한 지 오래였다.
신격인 ‘힌’은 여전히 성물을 얻고 싶어 하지만, 자신의 누이인 시르에게 진실을 들은 그는 더 이상 성물 수집에 관한 의뢰를 거절했다.
그 탓에 총애도가 큰 폭으로 떨어지긴 했지만, 네슈아는 상관하지 않았다.
비주류 중의 비주류, 그림자 교단의 사도가 된 것도 그의 의지였을 뿐.
어떤 불이익이 걸려 있다 해도, 내키지 않는 일 따윈 손대지 않았다.
힌의 입장에서도 단 하나뿐인 자신의 사도가 이렇게 단호하게 나온다면 더 이상 손쓸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신격과 사도는 긴밀한 계약 관계일 뿐, 주종 관계가 아니었으니까.
파앗!
대로를 따라 걸으며 정해진 지점에 도착한 네슈아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다음으로 그의 모습이 나타난 곳은 무려 왕궁 내부의 복도.
아무런 제지도 없이 왕궁 안으로 숨어든 것이다.
며칠에 걸쳐 공을 들여 진입 루트를 만들어 놓은 덕에, 문제없이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본래 유저가 왕궁 내에 침투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침묵과 그림자의 사도인 네슈아로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저기 있군.’
은신으로 그림자 속에 숨어든 네슈아의 시선이 한 남자에게로 향했다.
의심 대상이자 미행 표적이었던 시리오가 어디론가 급히 향하는 모습에 그는 곧바로 뒤를 밟았다.
그렇게 시리오가 향한 곳은 왕궁 구석의 한 폐쇄된 창고.
평소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는 곳이었고, 보랏빛 망토와 후드를 한 수상한 자들이 여럿 서 있었다.
‘이건……!’
숨을 죽인 채 고개를 내민 네슈아는 경악했다.
단순히 수상한 접선뿐만이 아니라, 이들이 왕궁 지하에서 은밀히 무언가를 준비 중인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진행도로 보아 이미 손을 쓰기엔 늦은 상황.
단번에 상황을 파악한 네슈아는 지하실에서 나와 서둘러 왕궁을 도로 빠져나갔다.
‘최악의 상황이군…….’
그동안 조사를 하며 가정했던 가장 최악의 수가 진행되고 있었고, 서둘러 이 사실을 철십자에게 알려야 했다.
이젠 단순히 6대 길드나 상위 유저들만의 다툼 문제가 아니었다.
워로드 내 모든 유저의 운명이 걸린 문제였다.
* * *
“이 전쟁통에 적진까지 찾아와서 한 이야기가 그게 전부라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카린이 고개를 저었다.
아폴리온의 최고 간부, 다고스에 대한 이야기는 역시나 황당했다.
하나 한시가 급한 전장 상황 속, 그녀는 이미 다시 전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채비를 갖춘 뒤였다.
보급로도 성공적으로 끊어 둔 데다가, 아래쪽 전선은 빛의 교단에게 맡겨 둔 만큼 당분간 아폴리온과의 맞대결에 전념할 셈이었다.
다만 걱정스러운 점이 있었다.
다른 전선을 맡던 물의 교단 측 신도들이 한데 집결 중이라는 사실.
예상치 못하게 대지 교단이 밀리기 시작하자, 물의 교단까지도 아래쪽 전선에 모조리 투입하려는 것이었다.
그동안 몸집이 더 컸던 대지 교단과 전면전을 벌이며, 오히려 그들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 준 빛의 교단이었지만.
그에 이어 물의 교단까지 합류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물의 교단도 결코 작은 규모의 세력이 아니었고, 단숨에 전황이 뒤집힐 만한 일이었다.
“에일 네가 맡겨 두라기에 그냥 떠나기는 하지만… 이제 어쩔 셈이지? 아무리 너희라 해도 두 교단을 동시에 상대할 순 없을 텐데.”
카린의 걱정 섞인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에일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에일의 머릿속에서 구상 중이었던 계획은 고작 두 교단을 상대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미안하지만, 교단 두 개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거야.’
에일은 자신에게 경고를 하러 왔던 다고스를 떠올렸다.
어차피 아폴리온 길드와 제대로 적대하게 된 마당에 서로 어중간하게 있을 필요 따윈 없어졌다.
아무리 발버둥 쳐 봤자 빛의 교단, 그리고 에일이 보여 줄 수 있는 파급력은 6대 길드 간의 충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
하지만 에일은 그 이상을 보여 줄 셈이었다.
휘익!
휘파람으로 두 마리의 까마귀를 부른 그는 미리 준비해 둔 편지를 다리에 묶어 두 통의 전서를 날렸다.
이 편지들이 향할 곳은 전장 근처가 아닌 지하였다.
엘트리스와 시드나.
두 지하 세계를 향해 날아간 전서는 신앙심 넘치는 지하 세계의 주민들에게 닿을 것이다.
그간 감춰 왔던 그들의 존재였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진정한 성전을 위해 모습을 드러낼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