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성전 (6)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당한 기습.
미리 기습을 준비하고 있던 것답게 이단심판관들의 숫자가 길드원보다 더 많았다.
정확히 그들을 제압할 수 있는 숫자가 나타난 것으로 보아, 이미 그들의 규모와 향할 경로까지 모두 읽고 있었단 뜻이었다.
아마도 지금쯤 다른 쪽도 습격을 당한 것은 마찬가지일 터였다.
하나 에일과 마주한 켈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렇게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날 줄은 몰랐지만… 차라리 잘됐군.’
이미 한참 전에 현상금을 걸었던 대지 교단은 물론, 에일이 개인 랭커를 쓰러뜨리며 랭킹에 오른 이후로 걸린 아폴리온의 거액의 추가 현상금까지.
에일의 목에 내걸린 현상금은 전문 현상금 사냥꾼이 아닌 다른 랭커들이 보더라도 군침이 돌 만큼 굉장했다.
‘이 인원수라면 우리가 불리하긴 하지만, 저 녀석만 잡고 나서 싸움에 가담하면 얼마든지 상황을 뒤집을 수 있어. 뭣보다 기대도 안한 기회가 스스로 나타나 줬고.’
이번 전쟁에서 에일의 목에 걸린 의미는 현상금 이상으로 영향이 컸다.
빛의 교단 측 움직임 전체를 주도하고 있는 교단 내 유일한 랭커.
아래쪽 전선 상황을 결정지을 수 있는 핵심 인물 중 하나가 스스로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셈이었다.
‘그리고… 내 쪽이 운이 좋았군.’
카가가각!
“커헉!”
한데 엉켜 벌어지던 전투 속에서 갑작스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당한 두 명의 심판관.
그것도 양쪽으로 한 명에게 달려들었던 상황이었다.
‘잠깐, 방금 저 스킬은……?’
뒤를 바라본 에일의 표정은 경악에 물들었다.
터져 나온 마찰음과 바닥이 패인 흔적으로 보아 방금 사용된 스킬은 유일 등급의 공격기, 칼날 폭풍.
이 기술을 사용한다고 알려진 랭커는 단 한 명뿐이었다.
“이거 생각지도 않은 대어네.”
눌러썼던 후드를 훌러덩 벗은 에렌.
아니나 다를까 용병 길드 루나틱의 길드 마스터인 그가 바로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분명 루나틱 길드는 완전히 다른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정보는 확실하다는 것은 꼼꼼히 확인했다.
하나 에렌이 자기 길드원들을 움직여 놓고 오닉스 길드와 함께 있음은 물론, 아예 두 길드장이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니.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움직임이었다.
“켈즈가 손 좀 빌려달라기에 잠깐 합류해 준 건데. 일이 재밌게 됐어.”
에렌이 단검을 빙글 돌리며 씨익 웃었다.
일반적으로 적진으로 침투하는 위험성 높은 임무에서, 길드장만 따로 다른 길드와 합류하거나 같이 다닐 일 같은 건 없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이번엔 두 길드장 사이의 친분이 문제였다.
게임이 아닌 현실에서 둘은 이미 아는 사이였고, 모종의 문제가 생길 걱정 같은 건 없었다.
밖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기에, 에일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젠장… 아무튼 일이 꼬였어.’
랭커 하나를 상대해 보려 이곳을 고른 것이었는데, 랭커가 무려 둘이나 자리에 있었다.
후드를 눌러쓴 채 길드원들 사이에 숨은 채 모습을 감추고 있어서 습격 직전까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다른 녀석들이 더 오기 전에 끝낸다!”
“오케이!”
두 랭커가 동시에 움직였다.
양쪽에서 에일을 노리고 달려드는 모습.
이미 앞에선 간격을 바짝 좁혀든 켈즈와 검을 맞닿고 있었기 때문에, 에렌까지 반응하기는 어려웠다.
쩌엉!
“크으읏……!”
그 순간 둘의 사이에 끼어든 메이가 등 뒤를 막아섰다.
교차하며 다가온 에렌의 쌍수 단검을 겨우 받아낸 그녀는 힘껏 쳐내며 그를 떨어뜨려 놓았다.
카앙!
에일도 장검을 크게 휘둘러 켈즈를 떨어뜨린 뒤 간격을 벌렸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집행관님, 이제 어떻게 하죠?”
메이가 근심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앞뒤로 그들을 노리고 있는 켈즈와 에렌.
741위의 포식자와 913위의 도적 랭커였다.
그녀가 교단 내에서도 손꼽히는 준랭커라 하나, 최상위 천 명에 진입한 랭커를 감당해 내기에는 무리였다.
“바로 교단에 연락은 취했지만, 다소 거리가 있어서 저희가 버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도망가죠?”
“예……?”
파앗!
에일이 메이를 데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미 이단들을 앞에 둔 데다, 전투 중이던 이단심판관들까지 버리고서 도망을 치다니.
메이로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놓칠 순 없지!”
하나 곧바로 따라붙은 두 랭커가 에일을 쫓아왔다.
에일은 애초에 그들이 자신을 쫓아올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대로 랭커들과 심판관들의 거리를 어느 정도 벌려 놓는다면, 만약 자신이 지더라도 다른 심판관들 쪽이 몰살당할 리는 없을 것이다.
‘랭커들만 없으면 나머지 길드원들은 우리 없이도 처리가 가능해.’
느닷없이 등장한 두 번째 랭커라는 변수가 문제였지, 기습 전에 이미 충분한 전력 차를 확보해 두었다.
랭커의 개입만 없다면 그 전에 결판이 나있을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어이, 네 길드원들은 상관없는 거야?”
“지금은 이쪽이 우선이다.”
에일의 뒤를 쫓으며 묻는 에렌의 물음에 켈즈가 답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켈즈도 그 정도 희생은 기꺼이 감수할 작정이었다.
비록 자신의 길드원들이기는 해도, 고작 스무 명 정도의 희생 정도로 에일의 목을 딸 수 있다면 얼마든지 남는 장사였다.
현재 빛의 교단을 대표하고 있는 에일의 목은 단순히 랭커 하나의 목값이 아니었다.
다소 앞서 가던 에일은 폐허 속에서 반파된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 숨어들었다.
“녀석들의 속도가 빨라 더 따돌리기는 무리입니다. 바로 준비하죠.”
“알겠습니다.”
메이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두 손을 모은 채 기도 올리며, 버프 마법을 시전했다.
같은 이단심판관이라도 여러 갈래로 나뉘기 마련이었고, 그녀는 버프쪽에도 투자해 둔 스킬 구성을 지니고 있었다.
파아아앗!
하얀빛이 터져 나오며 시전자인 그녀 자신은 물론, 곁에 있던 에일의 능력치까지 상승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좋은 상황이 아닌 건 다름없었다.
‘소용없을 듯하지만, 아낄 때는 아니겠지.’
촤르르륵!
그는 공헌도 상점에서 구매한 마법 스크롤들을 꺼내 들었다.
콰앙!
그때 한쪽 벽을 부수며 나타난 에렌이 스크롤을 든 채 준비하고 에일의 모습 목격했다.
그러자 그는 곧바로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꺼내들었다.
촤아아악!
보랏빛 파동이 넓게 퍼지며, 스크롤의 발동이 일제히 멈춘 모습.
스크롤의 사용을 막는 마력 차단의 서가 발동된 것이다.
‘역시…….’
완전한 카운터성 아이템인 만큼, 스크롤보다도 훨씬 값비싼 일회성 아이템이었지만, 평소 엄청난 돈을 쓸어 담는 워로드의 랭커들에겐 별문제 될 게 아니었다.
후웅!
순식간에 뒤쫓아온 켈즈와 에렌이 검을 뻗었다.
앞으로 나선 에일은 켈즈를 정면으로 막아섰다.
그때 에렌이 도적의 기동성을 살려 배후를 돌았고, 에일의 등을 노리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몸을 던진 메이가 뒤를 지키며 공격을 쳐냈고, 겨우겨우 에렌의 맹공을 받아쳐냈다.
‘치잇, 일대일도 쉽지 않은 상대인데.’
켈즈와 검을 맞대고 있는 에일이 인상을 찌푸렸다.
공들여가며 그와 수싸움을 벌여도 모자랄 판에, 위태로운 후방을 신경쓰랴 시간에 쫓기듯 싸워야 했다.
카가강!
콰앙!
벽이 박살 나며 메이가 튕겨져 나갔다.
“크윽…….”
바닥을 나뒹군 메이가 땅을 짚었다.
머리에서 피를 뚝뚝 흘리는 모습.
역시나 랭커인 에렌을 상대하며 밀릴 수밖에 없었다.
“너부터 끝을 내주마!”
에렌이 돌진기를 발동하며 메이의 숨통을 끊으려 했다.
이단심판관처럼 치유 능력을 보조로 가지고 있어, 전투 지속력이 좋은 직업은 하나를 확실히 끝장내 놓는 게 중요했다.
콰아앙!
쿠구구궁!
바로 그 순간, 에일이 옆으로 일섬을 사용하며 기둥을 박살 냈고 위태롭던 건물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미리 폐허 속 건물 구조를 봐두고 들어온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시간 벌이일 뿐, 그는 메이를 어깨에 들춰 매고 달아났다.
“죄송합니다. 역시 제가 짐이…….”
“아뇨, 오히려 저 혼자였으면 이렇게 버티지도 못했을 겁니다.”
에일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랭커를 상대로 이만큼이나 시간을 벌어 주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그녀가 배후를 막아 줬기에 버틸 수 있던 것이었다.
‘위기야, 위기.’
끊임없이 시선을 움직이는 에일의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지금 이 상황 속에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변수들을 떠올렸다.
현재 그의 레벨은 225.
전쟁에서 적들을 베어가며 빠르게 올리긴 했지만, 랭커들과의 격차는 여전했다.
광기와 총애도로 그 격차를 메웠다고는 해도 우위에 설 정도는 아니었다.
‘이걸 어떻게 한다.’
마치 아마란스에게 쫓기던 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의 상대는 차원이 달랐다.
양쪽 다 정예 용병 길드를 이끌어온 길드장이자 랭커였다.
필드 PVP 경험이 풍부한 건 당연한 일이었고, 그들을 속였던 얕은 수로는 어림도 없었다.
‘상황을 뒤집을 확실한 방법 같은 건 없어… 그렇다면 도박을 할 수밖에.’
지금 그에겐 이길 수 있을 확률을 절반만큼이라도 끌어올릴 수 있는 수가 필요했다.
뒤로는 이미 두 랭커가 따라붙었고, 생각을 정리한 에일은 개인 화면의 지도 위치를 확인하며 움직였다.
‘여기다.’
그리곤 정확한 위치 위에 우뚝 멈춰 섰다.
공헌도 상점을 통해 준비한 아이템들을 바닥에 부착한 뒤, 두 손을 바닥에 짚었다.
촤아악!
마침 뒤따라온 에렌과 켈즈가 모퉁이를 돌았다.
그렇게 먼저 움직인 에렌의 단검을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
“무슨 짓을 하려는……!”
콰아아앙!
부착해 둔 폭발물이 요란한 굉음을 내며 터졌다.
강한 충격에 얇은 바닥은 우르르 무너져 내렸고, 물러서던 랭커들까지도 휘말렸다.
무너지는 범위가 너무 넓어 피할 수 없었다.
보통의 지면이 아닌 얇은 천장으로 되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
부스스.
바닥 깊숙이 떨어져 내린 4명의 유저는 겨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들이 내려선 곳은 낡은 모습의 지하 던전.
“여긴……?”
“거점 지하에 자리 잡고 있던 50레벨 던전이야. 사악한 악마가 봉인되어 있다는 컨셉이라, 봉인을 풀려는 몬스터들을 막아 내는 게 이 던전의 원래 목표였지. 듣기론 큰 보상 덕에 대기 순번이 꽤나 길었던 모양이지만, 이번 전쟁 때문에 그런 이야기도 옛말이 됐고.”
“그래서 뭐, 같이 던전이나 돌자는 건가?”
“아니.”
넓은 방 안, 정 중앙에 선 에일은 한가운데 놓인 정체모를 함을 슥 내려다봤다.
큰 보상을 가진 워로드의 던전이 늘 그렇듯, 이 곳 또한 공략에 실패할 시의 리스크가 컸다.
만약 몬스터에게 밀리거나 놓쳐 악마의 봉인이 깨어날 경우, 유저들이 전멸하도록 설계된 던전이었다.
그것도 유저가 감당 못 한 고레벨의 몬스터 하나를 던져 놓는 방식으로.
“싸우는 건 좋은데, 한 명만 더 끼고 하자는 거지. 공평하게 말이야.”
카앙!
방 가운데에 있던 함의 봉인.
그를 유지하고 있던 쇠사슬을 에일이 검으로 내려쳐 깨 버렸다.
콰아아아!
뜨거운 열기가 터져 나오며 어두웠던 방 안에 붉은 안광이 나타났다.
악마의 하수인이자, 250레벨의 보스 몬스터 ‘샤고어’가 거대한 팔을 끄집어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죄악의 존재, 신성모독자와 조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