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격동의 장
[현재 레벨 - 246]
에일의 눈앞에 떠 있는 메시지 창.
보스룸에 진입하던 시점, 238이었던 그의 레벨이 이번 전투 한 번에 8레벨이 오른 것이다.
퀘스트, 시나리오 클리어, 에픽 보스 몬스터 2인 클리어 등.
온갖 경험치 보상들이 겹치며 이루어진 급성장이었다.
이 정도 레벨 대라면 다른 랭커들과 비교를 한다 해도, 전처럼 크게 밀리는 수준은 아니었다.
“후우…….”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에일은 여전히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단순히 전투의 여운 때문이라기보단, 정말 지쳐서 일어서 있는 것도 힘들 지경이었다.
이미 기운을 차린 알리사는 공주의 상태를 확인한 뒤에, 지도를 펼쳐 두며 빠져나갈 경로를 검토하고 있었다.
반면 에일은 몬스터들로 넘쳐났던 던전을 돌파한 이후에, 보스 몬스터와의 2연전을 치른 것이나 다름없었고, 더욱 체력 소모가 극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게임 속이라 회복이 빠르기는 해.’
한숨을 돌린 에일이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한 덕에 후들거리던 다리는 멀쩡히 돌아왔고, 슬슬 다음 행동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 들어찼다.
하지만 그대로 생각에 빠져들던 그 순간, 그의 눈앞에 찬란한 빛이 터져 나왔다.
파아아앗!
새하얀 빛 속에서 직접 모습을 드러낸 루가 입을 열었다.
“수고가 많았다. 잘해 내 주었구나.”
그녀의 입가엔 가벼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바로 옆에 있는 알리사의 눈치를 슬쩍 본 에일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루의 미간이 슬쩍 좁혀졌다.
“그대는 지금 내 말을 무시하는 건가?”
심히 불경한 태도에 성큼 가까이 다가온 루는 그에게 압박을 가하며 대답을 재촉했다.
“그래, 나보다 저 여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
“아니… 그야 여신님이 더 중요하죠. 옆에 사람도 있는데 굳이…….”
“네?”
아니나 다를까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에일의 모습에 알리사가 의아한 눈빛을 보내 왔다.
“아뇨, 그게…….”
뜨끔한 에일이 말을 얼버무리려 했다.
그녀의 눈엔 보이지도 않을 신격에 대해 뭐라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하지만 그는 곧 생각을 바꿨다.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건 다른 이도 아니고 알리사였고, 6대 길드장들만큼이나 신격에 대해서 이미 잘 알고 있는 유저였다.
그녀가 각종 사이트에서 활동하던 ‘Lotus’였다면, 신격과 신도의 관계에 대해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너무 깊게 말하지 않는 이상,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저희 여신님이 여기 와 계셔서요.”
“저, 정말요?”
에일의 말에 깜짝 놀란 알리사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격이 직접 신도의 앞에 나타나는 건 특별한 일일 텐데… 하긴 에일 님이라면 여신이라 해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겠죠.”
에일이 신격의 선택을 받은 사도라는 것은 그녀 역시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빛의 교단 내에서 그가 지닌 비중을 생각한다면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다.
“그럼 이쯤 어디에 여신이 서 있겠네요? 신기해라.”
알리사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는 신기하다는 듯 허공에 손을 휘휘 저었다.
잠시 헤매던 그녀의 손은 곧 루의 몸을 훅 뚫고 나오기까지 했다.
“시… 신성 모독이다.”
흠칫 물러난 루가 에일에게 눈짓했다.
어서 그녀를 처리하라는 듯한 여신의 제스처에 에일은 심히 난감함을 느꼈다.
“그 정도는 좀 봐주시죠.”
“흥.”
에일의 부탁에 루는 못마땅한 듯 고개를 돌렸다.
이번 레이드도 그렇고, 그간 알리사의 공로는 그녀도 잘 알고 있었기에 무리한 요구를 할 순 없었다.
하지만 루는 여전히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그녀를 응시했다.
“그나저나 갑자기 원래 모습으로 나타나신 이유라도 있습니까?”
에일이 재빨리 주제를 돌렸다.
이제 루가 직접 자신의 앞에 나타나는 것 자체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평소대로라면 소모되는 영향력을 아끼기 위해, 본연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을 하고 나타나야 했다.
“내 사도를 보러 왔는데 이유가 필요한가?”
“그 말을 하는 게 아니란 것쯤은 잘 아시지 않습니까.”
“확실히… 저 말고 다른 사람하고 있을 땐 조심하는 편이 좋겠네요.”
에일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던 알리사가 감상평을 남겼다.
허공을 바라본 채 혼잣말을 던지는 그의 모습은 속사정을 알지 못했다면 심히 우스꽝스럽게 보일 만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미간이 좁혀진 루의 고개가 돌아가기 전에, 에일은 서둘러 대화를 이어야만 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아니, 이번 퀘스트의 보상 때문이다. 경험치와 공헌도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쯤은 임무를 부여했을 때 말했었지.”
“아.”
그때의 일이 생각난 에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가 부여했던 퀘스트의 내용은 공주를 안전하게 확보하라는 것이었고, 바깥을 틀어막던 보스 몬스터 레기아스를 처리하자 완료 처리가 되었다.
완료와 동시에 그에게 주어진 큰 폭의 경험치와 만 단위의 공헌도는 신격이 직접 부여한 퀘스트라는 거창한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만했다.
하지만 거기서 무언가를 더 준다니, 무얼 말하는 건지 쉽게 진작이 가지 않았다.
“보상을 주는 데에 직접 나타날 필요야… 읏?”
갑자기 스륵 다가온 루가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느닷없는 부드러운 촉감에 움찔한 에일은 잠시 움직임이 멎었고, 그녀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 뒤에야 움직일 수 있었다.
“이건…….”
얼굴을 붉힌 에일이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저번처럼 당황하지는 않았다.
루가 어째서 갑작스러운 행동을 보인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영광스러운 여신의 축복이 당신을 감쌉니다!]
[행운 보너스가 큰 폭으로 주어집니다!]
상태창을 확인하자 저번과 같은 행운 보너스가 주어져 있었다.
“미리 말은 좀 하시지.”
“그게 재미있는 것 아니겠느냐.”
루는 놀랐던 에일의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갑자기 행운 보너스를 주신 이유라도 있습니까?”
“이제 새로운 기술을 배울 시점이지 않느냐. 곧 쓰일 곳이 있을 거다. 그리고…….”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다.”
어째서인지 루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알리사를 슬쩍 바라봤다.
물론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알리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에일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직 퀘스트가 모두 끝난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에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의 퀘스트가 한 차례 완료되었다고는 하나, 그와 동시에 다음 연계 퀘스트가 발동되었다.
단순히 세이아를 확보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닌, 완전히 그녀의 목숨을 노리는 손길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구출해 내는 게 최종적인 목표였다.
“바깥의 상황은 생각보다 좋지 않다. 하지만 그대라면 충분히 헤쳐 나갈 수 있겠지. 그럼 행운을 빌겠다.”
스르륵.
루의 모습이 빛과 함께 사라졌다.
평소라면 더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눴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퀘스트의 큰 보상에 더해 원래 모습으로 직접 나타나 행운 버프까지 주었으니, 영향력을 꽤나 소모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제는 대화를 나누기보단 던전을 떠나야 할 때였다.
“벌써 끝났나요?”
“네, 이제 출발하죠.”
에일이 무기를 챙기며 떠날 채비를 갖췄다.
잠시 숨을 돌리는 건 이쯤으로 충분했고, 자리를 피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들이 있는 곳이 밝혀지지 않은 지하 던전 속이라 덜하다곤 하지만, 현재 워로드 대륙 내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 바로 여기 미궁의 숲일 터였다.
손꼽히는 랭커들이 이 위에서 살벌하게 싸워 가며 공주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었다.
언제 던전 입구를 발견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중간한 전문 탐험가 유저들이 잔뜩 몰려든 것보다, 제대로 추적에 나선 랭커들이 훨씬 수완이 좋은 법이었다.
“그런데 에일 님, 혹시 무슨 이야기했는지 알려 줄 순 없나요?”
“그건… 절대 안 됩니다.”
방금의 대화를 떠올린 에일의 답은 단호했다.
그러자 알리사는 단지 신격과의 대화를 함부로 누설할 수 없어서라고 받아들이며 약간의 아쉬움만 느낄 뿐이었다.
“그럼 떠나기 전에…….”
“저것만 챙기면 될 듯하네요.”
에일과 알리사의 시선이 바위 무더기로 향했다.
보스와의 전투에서 절벽이 무너져 생긴 잔해였고, 그들은 다가가 바위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쿠구궁!
그러자 아래에 깔린 레기아스의 시체가 드러났다.
루팅이 가능해 옅은 빛이 감돌고 있는 시체 앞에서, 그들은 보상을 얻기 위해 시체 주변을 더욱 파헤쳤다.
원래대로라면 진작에 챙겼어야 할 보상이었지만, 녀석을 처리하고 나서 워낙 기진맥진했던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
아예 해체 작업까지 하기 위해선 녀석의 시체를 잔해 속에서 빼내기까지 해야 하는데 손이 여간 많이 드는 게 아니었다.
[아이템이 드롭되었습니다!]
[아이템이 드롭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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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 아닌데요?”
녀석의 시체를 완전히 빼내자 루팅 아이템들이 쏟아졌다.
워낙에 애를 먹인 녀석인 데다가 애초에 공략 인원도 여럿으로 설정되어 있던 만큼, 내뱉는 아이템이 몇 개 수준이 아니었다.
분배하는 것만 해도 꽤나 오래 걸릴 정도의 물량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우선 늘 해 왔던 대로, 직업과 장비의 가치를 고려해 하나하나 차분히 아이템을 나누었다.
가장 많이 다투곤 하는 분배 비율에 대한 문제도 이견은 없었다.
애당초 에일이 혼자 들어가 공략한 시나리오 던전인 데다가, 보스마저 첫 번째 페이즈는 그 혼자 깨 낸 것인 만큼 분배 비율에 대해선 알리사가 큰 폭으로 양보했다.
우선 에일의 손에 들어온 아이템 중 눈에 띄는 것은 무려 유일 등급의 경갑 방어구 풀세트.
240레벨제의 아이템으로 5피스 세트 효과가 무려 공격력의 50퍼센트 상승이었다.
아주 직관적이면서도 강력한 효과였다.
이 정도 효과면 유일 등급 세트 아이템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칠 만했고, 에일은 당장 방어구를 교체, 장착했다.
하지만 이 방어구 세트조차도 다음에 나올 아이템에 비하면 무덤덤하게 느껴질 수준이었다.
“엇?”
아이템들을 주르륵 확인하던 알리사가 순간 행동을 멈췄다.
레기아스가 드롭한 아이템 중 가장 마지막 목록에 놓여 있는 단 하나의 아이템.
그녀의 반응에 에일의 시선 또한 그리로 갔고, 곧 놀라움에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이… 이건…….”
황금빛을 내뿜는 스킬북.
워로드 최고 등급의 스킬북이 그의 손에 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