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격동의 장 (6)
“큽…….”
옆구리를 베인 루칸이 인상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다.
격한 공방을 주고받으며, 어느새 체력이 위험한 수준까지 떨어져 있었다.
고작 힐러 한 명과의 싸움.
당연하게도 루칸이 주로 공세를 취하며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알리사는 유일급 버프 스킬인 ‘기원’의 효과를 통해 엄청난 스탯 전환과 컨트롤을 보이며 맞섰다.
당장이라도 끝낼 수 있을 줄 알았던 싸움은 예상과 달리 길어지기 시작했고, 심지어 그녀는 치유사답게 회복 스킬까지 지니고 있었다.
포션을 마실 수 없는 상황이라면, 루칸과는 달리 전투 지속력이 뛰어나다는 뜻.
“이건 정말… 생각도 못 한 전개인데. 옛 실력은 어디 안 갔다 이건가?”
헛웃음을 지어 보인 루칸이 말했다.
카앙!
“뭐가 이렇게 급해. 오랜만에 만났는데 말도 제대로 안 받아 주고. 너무 매정해진 거 아니야? 하긴 그때만 해도 우리 중에서 제일 까칠했던 게 너였으니…….”
“시끄러워.”
키릭! 콰악!
발로 차인 루칸이 벽에 부딪혔다.
하나 그는 동요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최근에야 들었어.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진 우리의 부길드장이 워로드에서… 그것도 이름 모를 치유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걸.”
“…….”
이스트혼 최강의 검사이자 알키오네의 부길드장, 알레나.
그것이 현재 알리사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그녀의 정체였다.
전 게임 역사를 통틀어도 그녀만 한 포스를 지닌 플레이어는 같은 길드의 길드장인 워든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게임이 모두 달라 직접적인 비교가 불가능하다고 해도, 역대 최고의 플레이어를 꼽자면 언제나 1, 2위를 다투던 둘이었다.
한데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부길드장이 갑자기 모습을 감추고 사라졌다.
사실을 감추기 위해 급히 길드에선 대타를 세워 놓긴 했지만, 길드 내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비상사태에 한동안 큰 혼란이 있었다.
“너만 길드에 남아 있었다면, 애초에 이런 귀찮은 과정 같은 거 필요 없었어. 왕가니 뭐니 할 것 없이 힘으로 밀어 버리면 그만이었겠지.”
고작 플레이어 하나.
쟁쟁한 랭커들이라 해도 수많은 길드가 얽힌 워로드의 전체 판도 속에서는 하나의 말로밖에 여겨지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그녀의 이탈이 주었던 의미는 완전히 다른 경우였다.
“우리가 움직였다는 건 이미 상황이 다 끝난 거나 마찬가지라는 걸 잘 알고 있겠지. 알레나, 갑자기 사라졌던 이유에 대해선 묻지 않겠어. 공주를 빼돌린 것도 얼마든지 넘어가 줄 수 있어. 그러니까 그만하고 다시 돌아와.”
“그럴 순 없어.”
그의 말에도 알리사는 단호하게 답했다.
그리곤 굳은 표정으로 창을 치켜들었다.
“나는 바뀌었고, 너희는 그대로니까.”
카앙!
맞부딪힌 알리사와 루칸이 합을 주고받았다.
루칸의 위력적인 발길질이 스쳐 지나가며 벽 한쪽을 박살 냈다.
“아예 우리를 막으려고? 미안하지만 고작 나 하나로 쩔쩔매서는 크루거를 막지 못해!”
“그건 나도 알아.”
알리사가 말을 이었다.
“너희를 막을 사람은 내가 아니야.”
“설마… 아까 그 루키 하나에게 희망을 거는 거냐? 고작 그 녀석 하나한테?”
그녀의 말에 루칸의 인상은 험악하게 찌푸려졌다.
알리사 본인도, 6대 길드장들도 아닌 고작 루키 하나가 자신들의 대적자라니.
기분 나쁠 만큼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다.
“고작이 아니야.”
“그 녀석이 뭐라도 된다는 거냐?”
“나와 크루거를 이은 세 번째 오버드라이브 사용자… 라면 의미는 충분하겠지.”
오버드라이브 시스템.
1세대 게임인 이스트혼에서부터 여태까지의 모든 플레이어 중 단 두 명만 사용할 수 있던 테크닉이었다.
하나 워로드가 출시된 지 1년이 지나고 그 이야기는 뒤바뀌었다.
알리사가 처음 에일에게 큰 관심을 보였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의식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동조율을 끌어올리는 특유의 이질감을 느낀 것이다.
굳이 생활 컨텐츠를 제외한 부분에서 손을 놓기로 한 그녀의 상태에, 먼저 적극적으로 동행을 제안할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더군다나 이미 오버드라이브 사용자인 크루거가 다고스까지 직접 보내 가며 에일에게 접근한 것도 바로 그 때문.
‘그래, 유일한 가능성이라면…….’
알리사의 표정이 결의로 가득 찼다.
자신은 이미 치유사의 길을 택한 이상, 크루거를 막을 수 있는 건 오직 에일뿐이었다.
* * *
“됐어!”
통로에서 빠져나온 에일이 외쳤다.
그의 앞에 펼쳐진 것은 고대에 사용되던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유적지 지형.
루칸으로부터 시간을 끌어 준 알리사 덕에 진입할 수 있었고, 이번 탈출의 핵심이 바로 이쪽에 있었다.
어느새 일정 이상 거리가 떨어지며 파티는 해체된 상황이었다.
맞붙은 루칸의 손에 죽었는지 아니면 무사히 피하는 데 성공했는지조차 알 수 없어 아직도 알리사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 유적지의 입구에서 바보같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굳이 루칸이 아니더라도 다른 수많은 추적자가 따라붙는 상황 속에서 그런 짓을 하는 건, 오히려 양쪽 모두 죽을 확률만 높아졌다.
이미 떨어진 이상 양쪽으로 나뉘어 약속 장소에서 합류하는 편이 가장 현명한 선택지였다.
“여기 있었구나!”
에일의 얼굴을 바로 알아챈 남자가 소리쳤다.
유적지의 한 낡은 건물 위에 서 있던 추적자가 안으로 들어선 에일을 발견한 것이다.
‘하필 여기서… 벌써 여기까지 쫓아왔을 줄이야.’
남자의 등장에 에일은 주춤 물러섰다.
뿌리의 길로 진입한 아군 랭커들이 추적자들의 발목을 잡으며 시간을 최대한 끌어 주려 했지만, 방해하던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아폴리온의 랭커들이 본 실력을 드러낸 탓에 이곳 미궁의 숲 일대의 전황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전원이 집결한 아폴리온의 하이 랭커들은 이곳에 파견된 6대 길드의 랭커들을 상대로도 압도적인 전력을 지니고 있었다.
‘잠깐, 저 녀석은 슬렉이잖아?’
건물 위의 남자를 알아본 에일이 생각했다.
광전사, 슬렉.
일반적인 랭커의 수준을 넘어서, 무려 하이 랭커에 진입하기 위한 경쟁권에 있던 최상위급 랭커였다.
원래대로라면 100위권 바로 아래에 있던 자였고, 이번 대규모 변동으로 인해 131위까지 밀려나긴 했지만, 랭킹에 든 유명 용병 중에서도 거의 최고에 가까운 유저였다.
‘북동부 전장에 있을 때 주의해야 할 대상 중 하나였는데, 설마 이 숲에 와 있었을 줄은…….’
슬렉은 이번에 아폴리온에게 고용된 용병 랭커 중 한 명으로, 성전을 시작하면서 받았던 여신의 퀘스트 목록에도 있던 자였다.
당연히 인제 와서 호의적으로 바뀌었을 리는 만무할 터.
에일은 우선 공주를 안전한 곳에 내려놓은 뒤, 장검을 뽑아들었다.
후웅!
콰아아앙!
그새 아래로 뛰어내린 슬렉이 지면을 강타했다.
땅이 갈라지며 커다란 충격이 일었고, 에일은 약간의 대미지와 함께 주르륵 밀려났다.
그러자 슬렉이 대검을 들이밀며 말했다.
“에일 맞지? 내가 의뢰받은 건 공주뿐인데, 그냥 넘기는 편이 낫지 않겠어? 원래 원한 없는 유저 목을 치는 건 그리 안 좋아해서 말이지.”
“그건 당연히 안 되고.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넌 알키오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도 아폴리온의 편에 서는 건가? 이 바닥에서 꽤 평판이 좋은 편이라 들었는데.”
“알키오네에 대한 걸 들었기 때문에 이 편에 선 거다. 나도 내키진 않지만. 때론 자존심을 굽힐 줄도 알아야 하거든.”
“웃기는 소리……!”
카앙!
검이 부딪히며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아니, 웃기는 소리가 아니야.”
바짝 붙은 슬렉이 에일을 향해 말했다.
“난 자존심 세우다간 어떻게 되는지 직접 겪어 봤어. 놈들에게 직접 당해 본 이스트혼 출신이거든. 거기서 당해 봤던 녀석이라면, 워로드는 애들 장난 수준이라는 걸 알 수밖에 없다고!”
카가가강!
그에게 외친 슬렉이 에일을 쉴 틈 없이 몰아쳤다.
검이 부딪힐 때마다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에 에일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역시 대강 쓰러뜨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시작하자마자 동조율까지 끌어올리며 슬렉을 상대했지만, 그럼에도 상대하기에 애를 먹었다.
공격에 치중된 광전사 직업은 여러모로 단점이 많은 직업이었지만, 130위권의 랭커라면 당연히 이야기가 달라졌다.
상대에게 상처를 입혀 피를 흘리게 할수록 자신의 체력이 회복되어 전투 지속력이 뛰어났고, 오래 싸우면 싸울수록 ‘광전사의 피’ 스택이 쌓이며 강해지는 요주의 패시브까지 지니고 있었다.
‘아직 스택이 얼마 쌓이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라면…….’
하이 랭커를 코앞에 뒀던 자였던 만큼, 심히 부담스러운 상대였다.
다행히 광전사들이 기초 스킬로 가지는 위협 수치에 대해선, 에일의 패시브로 아예 무시할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낙관하기엔 다소 힘에 부치는 상황이었다.
‘뭣보다 당장 눈앞만 생각하고 있을 수만도 없어.’
지금도 빠르게 거리를 좁혀오고 있을 다른 추적자들의 존재는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큰 위협거리였다.
이대로 슬렉을 상대하느라 시간 끌리면 끝장이었다.
[‘빛의 심판자, 루’가 서두르라고 전합니다!]
‘좋아…….’
지켜보고 있던 루의 메시지까지 뜨자 에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머뭇거리다 알리사의 희생을 헛되이 잃고 싶지 않았다.
그는 빠르게 다음 결단을 내렸다.
구도자의 열성을 이은 두 번째 전설급 스킬, ‘여신의 가호’.
쿨타임이 무려 6시간짜리 스킬에 아직 효과도 알 수 없어 무턱대고 사용하기엔 부담스러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어쩔 수가 없었다.
파아아앗!
스킬이 발동되자 새하얀 빛이 에일의 몸을 감쌌다.
그리곤 갑자기 치솟는 스탯이 체감으로도 선명히 느껴졌다.
[모든 능력치가 18% 증가합니다!]
스킬이 발동되며 힘과 신앙심을 비롯한 각 스탯이 18퍼센트나 증가했다.
이는 꽤나 큰 폭이었고, 스킬이 활성화된 동안에 한해선 자신보다 더 높은 레벨대인 하이 랭커들과 비교해도 스펙이 밀리지 않을 수준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얻었던 스킬이 단순 능력치 버프 스킬이었다면, 워로드 전체를 통틀어서도 몇 개밖에 없다는 전설 등급은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모든 스킬의 쿨타임이 감소합니다!]
[모든 신성 마법의 캐스팅 시간이 삭제됩니다!]
[가호의 지속 시간에 한해 ‘여신의 권능’ 스킬 1회 사용 가능합니다.]
[남은 시간 ‘1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