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序)
짓쳐들어오는 칼날. 거기에 실린 힘이 무겁다. 하지만 버거울 정도는 아니다.
카르릉!
짓눌려 기울어진 칼날 위로 상대의 칼날이 타고 들어오는 순간, 힘을 불끈 주며 손목을 비튼다.
카앙! 텅!
치솟아 오르는 도격에 미끄러지던 칼이 휘말려 주인의 손을 떠났다.
“젠장!”
상대가 급히 뒤로 몸을 물렸지만, 여유롭게 따라가 상대의 목에 칼을 겨눈다.
“계속 하실 텐가?”
내 물음에 상대가 이를 악물었다.
“졌다.”
“과연 흥국 흑도의 별!”
“청도방(菁刀幇)의 섬패(閃覇)다운 힘이다.”
패배 선언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낯간지러운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말이 좀 짧다?”
마무리는 확실히 해야 한다.
“비무는 져도 실전으로 붙으면 모른다. 뭐 그런 건가?”
히죽 웃으면서 칼을 어깨에 짊어졌다. 흥국에서 모르는 사람 없는 자세. ‘청도방의 첫 번째 칼’이라 불리는 섬패 이도연이 사람을 세로로 쪼개….
“흑조회(黑漕會)는 패배를 인정하오! 청도방과의 약조대로 오늘부로 주작로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겠소!”
이로써 청도방이 흥국 흑도의 패권을 오롯이 움켜쥐게 되었다.
이렇게 좋은 날 술이 빠질 수 없다. 허나, 뭐든지 적당한 게 좋은 법. 불콰한 얼굴이 하나 둘 늘어 갈 때쯤 술자리를 파했다.
거처로 돌아와 침상에 누웠다. 그렇게 막 잠이 들려는 찰나.
- 경표야, 박경표! 내 말 들리니?
난데없이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 아니 목소리가 문제가 아니다.
어떤 전조도 없이, 그야말로 불쑥 나타나 시야를 채우는 안면.
“헉!”
반사적으로 주먹을 내지르지만 소용없다. 허공을 후려치듯 주먹이 얼굴을 통과한다.
“젠장!”
침상 위를 굴러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바로 바닥을 박차 몸을 날려 벽에 걸어 놓은 칼을 잡았다.
- 경표야, 진정해. 진정!
유령 같이 뒤가 훤히 보이는 얼굴이 나와 거리를 벌렸다. 위해를 끼칠 마음이 없다는 듯 말이다.
“경표?”
귀에 익숙하지만 내 이름이 아니다. 내 이름은 이도연. 청도방 방주의 대제자이며 후계자다.
- 엄마 알아보겠어?
그리고 눈앞의 얼굴은 2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도 아니고.
- 박경표. 박진만과 천혜숙의 아들. 난치병 때문에 침대에 누워 책만 보던 아이.
“어, 어?”
무림에서 누구도 알 리 없는 내 과거다. 당연하다. 이도연이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 내가 기억하는 전생의 일이니.
- 이렇게 활발히 움직이다 못해 칼까지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엄마가 고생한 보람이 있네.
유령이 미소를 지었다.
- 내 아들, 이름도 엄마도 당장 기억 못할 만큼 지금의 삶에 만족하는 모양이구나.
그리고 그 미소에 깃든 처연함에 익숙함을 느꼈다.
“엄마?”
확실히 기억이 났다. 저건 엄마다. 현생 이도연의 엄마가 아닌, 전생의 엄마가 분명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내 수호령이라도 된 거야?”
- 애가 중원에서 몇 년 구르더니 문명의 이기는 다 잊었나? 3D 홀로그램도 못 알아보네? 엄마는 아직 쌩쌩하거든!
“3D 홀로그램?”
영사기도 없는 게 중원 무림인데, 난데없이 홀로그램이라니! 나 환생한 거 아니었어? 설마, 가상현실 같은….
- 네가 살고 있는 중원 무림은 실존하는 세상이야. 그리고 너 역시 그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이고. 가상현실 같은 거 아니니 걱정 마.
삐익. 삑!
웬 경고음?
- 시간이 없네. 자세한 건 파머(Farmer)에게 들어.
농부?
엄마의 얼굴이 사라졌다. 동시에 딱딱한 음성이 귀를 울렸다.
- 파머 활성화 됩니다. 박경표&이도연에게 리퍼(Reaper)의 권한이 부여됩니다.
동시에 수많은 문자열들이 내 눈앞에 흘렀다.
“이게 도대체 뭔 일이야!”
1화
준비행(01)
“폐관 수련을 하겠다고?”
사부가 눈을 부릅떴다. 기대가 무너진 얼굴로 인상을 팍 쓰는 것이….
“예, 몇 달 산중에 틀어박혀 좀 다듬어야 할 듯합니다.”
청도방의 섬패 이도연이 아니라 박경표로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십중팔구 강기(罡氣)를 이룬 초극 고수들과 부딪쳐야 하는 일. 도기(刀氣) 좀 길게 뻗는 절정 초입에 얼쩡거리는 지금의 내 실력으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는 게 농부(Farmer), 내가 ‘농꾼’이라 이름붙인 녀석의 분석이다.
“이제 뒷방으로 물러나 좀 쉬고 싶은데?”
내 대답에 사부가 허락하기 싫은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럭저럭 쓸 만해졌으니 빨리 나에게 자리를 떠넘기려는 속셈이다.
“본방은 흥국현의 흑도 패권을 모두 장악했습니다. 파룡당(婆龍黨)이 신경 쓸 규모가 된 거지요.”
파룡당은 강서 땅 삼분지 일을 차지하는 공주부(贛州府)의 패권을 쥔 흑도 세력이다.
장강의 지류인 감강(贛江)을 오가는 모든 물류에 관여하는 대방파.
“파룡당을 상대로 시간을 끌겠다는 게냐?”
“그게 본방을 위해서 좋지 않겠습니까? 솔직히 우리 청도방이 흥국현의 패권을 잡았다 해도, 그네들이 볼 때는 산골의 중소 방파지요.”
자잘하게 흩어진 상태라 일일이 주워 먹기 귀찮아 놔둔 곳이 흥국현이다. 그게 하나로 통일되었으니, 한 번의 수고로 삼켜 볼 만한 곳이 된 격.
“그나마 사부님이 버티고 계시면 흑도에서 평생을 구른 노익장의 한 수를 조심해서 천천히 움직이겠지만, 저 같은 어린놈이 방주가 된다면 씹지도 않고 삼키려 들겠지요.”
“시간이 지난다고 뭐 달라질 게 있느냐? 어차피 숙여야 한다면 빨리 숙여서, 사자 뱃속의 벌레가 되어 파룡당 안에서 일을 도모하는 게 더 낫지 싶은데?”
파룡당의 일부가 되어 살살 파먹자는 사부의 말도 일리가 있다.
내가 섬패 이도연이기만 했으면 당연히 따랐을 말이다.
하지만 박경표가 해야 할 일이 있다. 게다가 그 일은 이도연에게도 득이 되는 일.
사부를 설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밑밥을 깔아 볼까.
“농꾼, 격삼연칠로 자세 보조 시작한다.”
- 보조 제어 시스템 가동합니다.
농꾼의 대답에 나는 뒤로 두 발 물러나며 칼을 뽑았다.
그리고 사부에게 배운 벽운섬전도(碧雲閃電刀)를 펼쳤다.
퐈롸뢋!
푸른 도기가 벼락 같이 몰아치며 가상의 적을 운무와 같이 뒤덮는다.
찌릿, 찌릿, 탁틱!
전신 여기저기에서 가해지는 충격이 내 행동을 슬그머니 제한하니, 그 결과가 칼끝에 맴돈다.
크르르릉!
중첩되는 도기에 공기가 몸을 떨었다. 그렇게 칼춤이 절정에 치닫는 순간.
- 해제!
보조 제어 시스템을 꺼 버렸다.
평소보다 과도한 힘이 평소보다 부드러운 동작에 원활히 펼쳐지던 상태다. 그런데 그 상태에서 평소와 같은 다소 뻣뻣한 상태가 된다면? 평소보다 과도한 힘에 휘둘리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
“그만!”
호통을 내지르며 달려든 사부의 칼이 휘둘러지는 내 칼의 옆면을 찍어 눌렀다.
쾅!
도격이 대청 바닥을 격하게 찍으며 내 칼춤이 멈췄다.
“하아.”
사부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부 눈에는 내가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거로 보일 것이다.
“지금 제 상태가 이렇습니다. 힘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힘에 휘둘리는 꼴이지요. 만약, 제가 지금 방주가 된다면 파룡당에서는 필시 저의 힘을 재보려 할 겁니다. 그때 제가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나름 절정 초입으로 소문난 나다. 그러니 파룡당에서 간을 보려면 비슷한 수준으로 보낼 게 뻔하다.
서로 어깨를 재보고 협상을 하기 위한 자리다. 거기서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피를 본다?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뻔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볼 것도 없는 청도방의 멸망.
“폐관을 하겠다는 이유가 분명하군.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
사부의 말에 내 입가에 배시시 미소가 걸렸다.
“못해도 반년은….”
***
그럴듯한 명문이나 거대 방파라면 방파 내부에 외부 소음을 완전 차단하는 연공실이 한두 개쯤 있겠지만, 청도방은 산골 흥국현의 패권을 간신히 틀어 쥔 작은 흑도방파. 그런 연공실이 있을 리 없고, 그러니 조용한 산을 찾을 수밖에 없다.
흥국 동쪽의 금정산(金精山)이 비교적 사람 발길이 뜸하다는 말을 듣고 그쪽으로 향했다.
“뭘 이리 바리바리 싸들고 가야 해?”
농꾼 녀석이 필요하다고 내놓는 목록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녀석이 원하는 것을 다 챙기니 등짐으로 감당이 안 되어 달구지가 필요할 정도다.
- 21세기라면 영양제를 먹거나 아예 링거를 통해 필요 성분을 주입하면 되지만, 여기는 그런 것이 없으니까요.
“보통 ‘나노 머신’이라면 그런 영양분은 알아서 조달하지 않냐? 몸속의 불필요한 영양분을 분해해서 합성을 한다든지 말이야.”
농꾼 녀석이 활성화 되면서 가물거리던 박경표의 기억이 뚜렷해졌다. 기억 속의 나노 머신은 만능의 이미지인데, 어째 농꾼 녀석은 좀….
- 일반인이라면, 21세기 현대인의 건강을 유지하는 정도라면 잉여 영양분을 활용해 처리하는 것이 가능합니다만, 리퍼의 육체는 단련된 무인입니다. 나름 균형이 잡혀 있는 상태고, 솔직히 21세기 현대인과 비교하면 잉여분의 영양이 거의 없습니다. 설사 잉여의 영양분이 있다 해도 무인의 육체를 강화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입니다. 그러니 외부 공급은 필수입니다.
“영양을 위해서 음식물을 잔뜩 싸들고 가는 건 알겠는데, 저 약재들은 뭐냐?”
- 근육을 키우기 위한 겁니다.
“한약 먹는다고 근육이 커져?”
- 근육 키우는 데는 스테로이드 계열 약물이 최고입니다. 약재의 식물성 스테로이드를 뽑아내서 체내의 동물성 스테로이드와 합성하면 근육을 쉽고 빠르게 키울 수 있습니다.
“그거 도핑 아냐?”
- 무림은 도핑에 관대롭다 못해 적극 권장 한다 들었습니다만? 성능 좋은 도핑 약 하나 나타나면 수천 리도 달려가고, 서로 먹기 위해 칼부림이 일어날 정도라던데 아니었습니까?
“큼.”
뭐 영약 섭취도 어떻게 보면 도핑이니깐 틀린 말은 아니다.
금정산 중턱에서 그럴듯한 동굴을 찾아냈다.
비바람 피하기 좋고, 입구도 높아 볕도 잘 들어왔다. 게다가 적당히 깊어 바리바리 싸들고 온 물건들 넣어 놓기도 좋았다.
- 근육 강화와 골격 강화는 기본적으로 수면 상태에서 이루어집니다. 골격 강화는 인위적 미세 골절을 일으키고 회복을 반복, 근육 강화는 스테로이드 약물을 통해 이루어지니 저녁은 필히 지정한 재료를 지정한 양만큼 드셔야 합니다.
“대충 정리 되었으니 물이나 떠올까?”
올라오면서 봐 둔 시내가 있었다. 물동이 하나 들고 시내로 달려갔다.
- 이곳을 식수원으로 쓸 생각이십니까?
물을 뜨려는데 농꾼 녀석이 물었다.
“문제 있냐?”
- 분석을 위해 소량을 입에 머금어 주시지요.
녀석이 시킨 대로 했다.
잠시 뒤 분석이 끝났는지 녀석이 입을 열었다.
- 정수기 사용을 권합니다.
“이 정도면 그냥저냥 먹을 만하잖아?”
뭐, 1급수는 아니라도 못 먹을 물은 아니다. 나름 절정의 초입에 들어선 무인인 나다. 질이 안 좋은 물을 먹은 정도로 잘못 되지 않는다.
- 물속에 포함된 성분들이 근육과 골격 강화를 위한 조정에 오차 범위를 키우게 됩니다. 그냥 드실 경우, 강화 예정 시간에 3%의 기간이 더해질 것으로 예상 됩니다.
“야, 농꾼. 여기서 정수기를 어떻게 구해?”
이 시대에 정수기가 있을 리 만무하다. 중원에서 괜히 차를 마시는 게 아니다.
- 만들면 됩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물동이 아래에 구멍 하나 내시고, 가지고 계신 은자를 잘게 조각내 먼저 깔은 뒤, 그 위로 숯과 모래, 자갈층을….
줄줄이 설명하면서 도면까지 영상으로 띄우는 모양새가 나더러 만들라는 거다.
“젠장.”
그렇게 산중 생활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