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준비행(08)
“나부터 하지.”
사부가 우도 분타주가 흘린 피에 손을 적셔 연판장에 수결을 하자, 셋은 앞 다투어 사부를 따라 피의 수결을 했다.
“표정들이 다들 좋지 않구려.”
“청도방주께서 초극 지경의 고수라 하나 파룡당은 초극 고수가 셋입니다.”
“게다가 절정 고수도, 정예도 우리 네 방파의 합보다 많지 않습니까?”
사부의 말에 호검방주와 흑권회주가 한 마디씩 했다.
“이런 상황인데, 청도방주께서는 파룡당과의 싸움에 승산이 있다 생각하시는 겁니까?”
풍운방주가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도연아.”
사부의 부름. 나보고 설명하라는 말이다.
“일단 이것을 보시지요.”
나는 파룡당 내당주가 수결한 자백서를 세 명에게 내밀었다.
거기에는 파룡당의 계획이 자세히 나열되어 있었다.
“자백서와 자석산, 용공산의 광산이면 파룡당의 수작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길안부의 복로방과 연수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복로방과 연수할 수 있다는 것은 파양호 수채의 비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구려.”
죽은 생선 눈알처럼 흐리멍덩한 호검방주의 눈에 반짝하고 생기가 돈다.
“명분은 이쪽에 있고 파룡당의 세를 절반으로 줄이는 일이니 복로방이, 파양호 수채가 거부할 일은 거의 없다 봐도 되겠구려.”
흑권회주도 언제 죽을상을 했냐는 듯 입가에 미소가 맴돈다.
“하아.”
한숨의 주인은 아직 인상이 굳어 있는 풍운방주다. 당연하다. 풍운방의 세력권은 이곳 우도. 네 방파의 근거지 중 파룡당 본부에서 가장 접근하기 쉬운 곳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파룡당 남부의 분타 중 회창, 안원, 서금으로 향하려면 우도를 필히 거쳐야 했다.
파룡당 입장에서는 다른 세 지방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용납하더라도 공주부의 중앙이나 다름없는 우도는 포기하기 힘들다.
“파룡당을 끝장내지 못했을 시, 우리의 안전을 지킬 최후의 수단이지 우리가 가진 최선은 아닙니다.”
그런 풍운방주를 보며 내가 세운 계획을 차분히 풀어 나갔다.
그렇게 입을 털며 손으로는 농꾼에게 문자를 날렸다.
= 전에 나와 접촉하는 사람들의 데이터가 수집된다 했지?
금정산에 반년 처박혀 있을 때 들은 농꾼의 기능 중 하나다.
- 그렇습니다.
= 우도 분타주 음성 데이터 있어?
- 존재합니다.
= 그걸로 음성 변조 가능해?
- 음성 변조에 새로운 패턴을 조합합니다.
눈앞으로 그래프 몇 개가 오르락내리락 요동쳤다.
- 새 패턴 조합이 끝났습니다. 21개의 패턴이 준비되었습니다.
“그럼, 계획대로 움직이지요.”
내 말에 사부를 비롯한 각 세력의 수장들이 집무실을 나섰다.
집무실에 남은 것은 나와 사제, 그리고 우도 분타주의 시체.
우도 분타주의 시체를 집무실 의자에 앉힌 뒤 뒤쪽을 바라보게 의자를 돌려 버렸다.
그리고 바닥의 피 웅덩이는 집무실 벽에 걸려 있는 피풍의를 사용해 당장 눈에 들어오지 않게 덮었다.
일각 정도의 시간이 흐른 다음, 문자로 농꾼에게 명령을 내렸다.
= 새 패턴으로 음성 변조.
“밖에 누구 없느냐!”
내 입에서 우도 분타주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잠시 후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며 대답이 들려 왔다.
“분타주, 하명하십시오.”
“분타의 정예들을 모두 집무실로 불러라.”
“예.”
대답과 함께 인기척이 멀어졌다.
“완전 똑같았소. 사형, 그런 재주는 언제 익힌 거요?”
사제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피 볼 준비나 해라.”
“거 좀 가르쳐 주면 안 되오?”
“있어야 할 곳에 안 있어?”
슬쩍 인상을 쓰자 사제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집무실 입구의 천장으로 몸을 띄웠다.
나도 우도 분타주의 곁에 섰다. 양손 가득 투척용 비수를 쥐고 기다린다.
“분타주, 명을 받고….”
“모두 들어와!”
밖에서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외쳤다.
덜컹.
집무실 문이 열리며 우도 분타의 정예들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마지막 인원이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사제가 천장에서 뛰어내렸다.
“하압!”
노골적인 기합과 함께 휘두른 칼에 한 놈이 등판을 베인다.
“기습!”
“누구냐!”
정예들답게 바로 반응한다. 집무실 입구와 거리를 벌리는 즉시 몸을 돌려 사제에게 무기를 겨눈다.
“커헉!”
물론 그 사이에 사제는 한 놈의 멱을 더 딴다.
“옥안쾌도?”
“청도방이 왜?”
나는 그들의 신경이 온전히 사제에게 쏠려 있는 틈을 탔다.
파파파팟!
그들의 등판을 표적으로 맘 편하게 비수를 날린다.
“크악!”
“컥!”
8개의 비수가 네 놈의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쏠리기 전에 칼을 뽑고 그들을 덮쳐들었다.
사제와 내가 양쪽에서 도기를 뿌리며 살수를 뿌리자, 우도 분타의 정예들은 변변찮은 저항도 하지 못하고 죄다 목숨을 잃었다.
“습격이다!”
나는 우도 분타주의 목소리로 크게 목청을 돋웠다.
그것을 신호로 사방을 점하고 있던 지역 흑도의 정예들이 각자 수장의 명에 따라 몸을 움직였다.
우도 분타의 중앙 곳곳에서 비명들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정예들을 정리했는데 졸자들의 피를 볼 필요가 있소?”
밖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 소리에 인상을 쓰며 사제 녀석이 물었다.
“풍운방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야.”
“풍운방을 위해서…. 아, 확실히 그렇군요.”
“그래, 다른 두 분이 보기에 배반의 위험이 있다 여길 수 있지. 그러니 우도 분타 졸자들의 피로 그 의혹을 씻어낼 수밖에.”
청도방, 호검방, 흑검회의 정예들은 우도 분타의 졸자들을 풍운방 쪽으로 몰아갈 뿐. 직접 손을 쓰고 피를 적시는 건 풍운방이다.
***
다들 흑도의 정예들인지라 야행의와 복면은 기본으로 챙겨 다닌다. 우도 분파의 인원들을 싸그리 정리한 네 세력의 정예들은 야행의와 복면을 뒤집어쓰고 우도 분타를 약탈했다. 그리고 시체들을 건물에 던져 넣고 불을 질렀다.
“내가 남고 네가 회창으로 가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사부가 걱정스레 묻는다.
네 세력의 정예들은 이제 파룡당 남부 분타들의 정예들이 몰려 있는 회창으로 달려갈 계획이다.
나는 정체를 감춘 흉수 짓을 하며 파룡당의 시선을 잡아 두는 역할이다.
“파룡당 녀석들이 단번에 알아볼 수 없는 무공을 익힌 것은 제자뿐입니다.”
다른 세 곳의 수좌들이나 사부의 무공을 파룡당 놈들이 알아보지 못 할 리 없었다.
정체가 드러나면 우도 분타의 일은 물론, 지금까지의 일이 드러나는 것은 당연지사. 그렇게 되면 좋을 게 없었다.
“사부님도 아시다시피 제자 약하지 않습니다. 초극 고수만 피하면 됩니다. 그러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나 하나 잡겠다고 파룡당의 초극 고수 셋이 다 나올 리 없다.
이 일을 파양호 수채의 수작이나 복로방의 수작으로 알고 있는 한 일부가 남아 그들을 견제해야 했다.
“제자가 걱정되시면 여기서 이러시지 마시고 빨리 계획을 실행하시는 게….”
방긋 미소를 지으니 사부가 인상을 쓰며 말을 끊는다.
“이놈이 사부를 부려 먹으려 드는구나.”
“초극도 되셨으니 조용히 은퇴하시겠다는 계획은 접으셔야지요.”
“망할 놈.”
“사부님, 그런데 괜찮으십니까?”
나도 걸리는 게 없는 것은 아니다.
“뭐가?”
“무공 말입니다. 일이 예상 외로 빨리 진행되어….”
초극 지경에 들기는 했지만 아직 힘 조절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사부 아닌가. 여차하면 사부가 초극 고수를 상대해 줘야 하는 것이 자신의 계획이다.
“거 서생 나부랭이들 하는 말 중에 그런 말이 있지.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예?”
칼잡이인 사부가 갑자기 고사성어를 들먹이니 놀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건 책상머리에 앉아 입만 나불거리는 서생 나부랭이에게 맞는 말이고, 우리 같은 칼잡이는 ‘백련불여일전(百練不如一戰)’이 맞는 말이다.”
“예?”
백문불여일견에서 파생된 백견불여일행(百見不如一行)은 들어봤어도 저건 듣도 보도 못한 말이다.
“영도에서 본신 무공이 아닌 기본적인 도법으로 칼을 휘둘러 피 좀 봤더니 공력의 수발에 어려움이 사라지더구나. 역시 칼잡이는 피를 보는 실전에서 성장하는 게야.”
이번에는 사부가 괜한 걱정 하지 말라는 듯 웃었다.
“길어야 이레 정도의 시간이다. 그러니 파룡당의 시선을 끈답시고 너무 무리하지 말거라.”
사부는 그렇게 끝까지 내 걱정을 하고는 정예들을 이끌고 회창으로 출발했다.
***
공주부 부도.
강서의 삼분지 일을 차지하는 넓은 행정 구역의 중심지답게 번화했고, 감강을 통해 흐르는 물류의 중심지답게 큰 포구를 가졌다.
파룡당은 그런 공주부의 흑도 패권을 움켜진 세력답게 그 본거지가 크고 웅장했다.
“장원 규모만 보면 어디 한 성을 아우르는 거대 방파라 해도 믿겠네.”
나는 공주부 부도의 허름한 객잔에 방을 잡고 누운 상태다.
파룡당 본거지를 하늘 위에서 살피고 있는 것은 응2.
나는 농꾼이 중계해 주는 응2의 시선을 눈앞에 띄워 놓았을 뿐이다.
- 장원의 둘레가 대략 800m입니다. 저 정도면 작은 성이라 해도 될 듯합니다. 상주 인원이 2천에 가깝고, 그 중 무장 인원이 육 할이 넘는군요.
“이류의 졸자들을 대충 일천으로 잡으면 정예만 2백이 나온다는 소리잖아. 정면 대결로는 답 안 나오는데….”
계획대로 일이 풀려 지방 흑도들을 끌어 모은다 해도 정예 1백을 채우기 힘들었다.
분타들을 돌며 약탈한 재산으로 낭인들을 고용한다? 그것도 힘들다. 전력 차이가 극심한 싸움판에 약한 자들 쪽에 가담하는 낭인들은 제대로 된 낭인들이 아닐 테니 말이다.
싸움을 끝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복로방을 끌어들여 파양호 수채의 비호를 받는 거다.
“하지만 그건 죽 쒀서 개 주는 꼴이지.”
다른 세력들은 좋아할 수 있었다. 세력권을 야금야금 파먹던 파룡당 분타들이 사라지면, 지역의 이권을 온전히 차지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역 이권을 온전히 차지하고 있던 청도방은 남는 게 없게 된다. 어떻게든 파룡당을 무너뜨리고 공주부 부도의 이권을 삼켜야 했다.
물론, 파룡당을 무너뜨리기 위한 계획은 있다. 계획대로 움직이면 내가 너무 피곤하니 좀 편한 방법을 궁리하는 것이다.
“응1.”
화면이 바뀐다. 적당한 높이에서 파룡당 본거지의 정문을 내려다보고 있는 장면이다.
응1의 시야다.
“정보 수집 상태는?”
- 파룡당 소속 절정 고수 6명에 정예 67명의 음성과 신체 외형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초극 고수들이라는 세 당주는 포착 못했나?”
- 바깥출입을 안 하니 외부에서는 관측이 힘듭니다.
“안으로 들어가는 건?”
- 응3으로 시도를 했으나, 전서구를 키우는 탓인지 바로 화살이 날아왔습니다.
생체 드론이 되었다 해도 그 근본은 어쨌든 매. 화살 맞으면 다칠 수밖에 없고, 날지 못하게 된다. 날지 못하는 상태의 매는 아무나 잡을 수 있는 사냥감일 뿐이다.
“전서구 차단은?”
- 어제부터 날아든 12마리 전부 잡았습니다.
흑도 정예들과 함께 회창으로 간 사부에게 붙인 응5를 제외한 응1부터 응4까지 몽땅 이쪽으로 투입된 상태. 파룡당은 아직 우도 분타가 무슨 꼴이 되었는지 알지도 못하고 있었다.
- 포구 방면 상황 발생.
화면이 갑자기 포구를 내려다보는 장면으로 바뀌었다. 포구를 감시하는 응4의 시야다.
파룡당의 무인인 듯한 작자들이 말을 타고 포구를 가로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상황이야?”
- 신풍에서 전령 도착. 우도 분타의 몰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우도 분타의 변고를 알아낸 신풍 분타에서 파룡당에 전서구를 보냈는데, 답신이 없자 전령을 보낸 모양이다.
“아, 놀고먹기 끝이네.”
객잔 밖으로 나왔다. 부도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증강현실 키보드를 두드린다.
= 응4, 리퍼 지원으로 임무 전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