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준비행(10)
삼강수 강변 인근 산속. 우거진 수풀에 몸을 숨겼다.
- 혈검의 행동 패턴 분석 결과 상호 정지 시 30.7m, 상호 기동 시 15.4m, 리퍼 정지 혈검 기동 시 53.5m 이하는 위험 거리로 판단됩니다.
“나루터에서는 좀 더 가까웠던 거 같은데?”
- 혈검이 최적의 상태에서 적시에 검풍과 벽공장, 암기 투척 같은 원거리 공격을 가해 진로 방해에 성공했을 경우를 가정한 수치입니다.
“거리 1.5배 적용시키고 경고 알람 설정.”
- 설정합니다.
“다른 두 명도 비슷한 수준이면, 나 혼자 쳐들어가도 파룡당 박살낼 수 있는 거 아니야?”
- 혈검을 비롯한 파룡당의 수뇌부 3명, 그 초극 고수들을 상대로 승리할 역량이 리퍼에겐 없습니다.
맞는 말이다. 파룡당의 핵심은 그 셋이다. 그 셋을 어떻게 하지 못하면 파룡당을 없애는 것은 무리.
아니, 어중간하게 쫓아내면 재앙의 시작이다.
지금 파룡당이 지키는 입장이고, 내가 숨어 쏘는 활의 입장이라 이런 수작이 가능한 것이다. 파룡당의 초극 고수 셋이 숨은 활이 되어 게릴라전을 펼친다면?
으, 생각도 하기 싫다.
“사부님 쪽 진도는?”
- 회창에 당도했습니다. 오늘 밤 회창 분타를 정리하지 않을까 합니다.
“인근 지역 흑도 끌어들이는 것까지 생각하면 빨라도 6일은 되어야 합류할 수 있겠어.”
입으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으로는 탄궁 시위에 철탄을 걸었다.
혈검의 머리 위에서 그를 스토킹하는 응1 덕분에 혈검 일행이 이제 곧 근처를 지나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착탄 지점과 직선거리 100m입니다. 발사각도, 위치 화면으로 표시합니다.
눈앞에 네 개의 활 모양이 각기 다른 각도로 그려진다.
첫 번째 활 그림과 들고 있는 활을 겹친다. 왼손으로 탄궁을 쥐고 버틴다. 오른손으로 시위를 당기며 철탄에 공력을 주입한다.
시위가 만작(彎酌)에 이르는 순간 왼손을 통해 활대에 공력을 주입, 시위를 놓는다.
왼손을 통한 공력에 의해 활대의 복원력이 강화되고 그것은 온전히 시위에 걸려 철탄을 더욱 세게 밀어냈다.
피잉!
발을 옮기고 손을 움직여 눈앞에 그려진 그림과 활을 겹치고, 정해진 순서대로 팔을 움직이고 공력을 움직인다.
핑, 핑, 핑!
네 발의 철탄이 허공으로 쏘아지기 무섭게 나는 발을 옮겼다.
“으악!”
이히히힝!
“적습이다!”
“놈이다!”
비명과 말울음과 경고성이 다양하게 어우러지며 내달리던 기마의 발걸음이 멈춰졌다. 당연하다. 선두의 기마 넷이 꼬꾸라지며 앞을 막으니 일단 멈출 수밖에 없다.
무기를 빼들고 적을 찾기 위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혈검은 흑도에서 오래 묵은 생강다웠다. 바로 쓰러진 넷을 통해 철탄이 날아온 방향을 가늠해 달려간다.
“흥!”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나는 이미 그 자리에 없으니깐 말이다. 남은 파룡당 정예들을 향해 숲 속에서 시위를 당겼다.
내 눈앞의 일이 아닌 응1이 보내주는 화면이다.
응1과 응4의 정보를 조합해 적의 위치를 알 수 있는데다가 농꾼이 적절한 저격 포인트와 저격 각도를 알려 준다.
나는 그저 농꾼이 지정한 위치로 달려가 농꾼이 그려 놓은 활 모양에 활을 겹쳐 시위를 당기면 그만인 것이다.
결과도 화면으로 확인하면 그만. 시위를 놓기 무섭게 떠난 나를 철탄이 도착한 다음 방향을 가늠하고 달려오는 혈검이 찾을 수 있을 리 없다.
“이이 빌어먹을 개종자야! 비겁한 새끼야! 당장 기어 나오지 못할까!”
경험에 의지해 저격 포인트를 찾았지만 번번이 허탕만 친 혈검의 노호성이 사방을 울린다.
“혈검 저 새끼 한 방 못 먹이나?”
- 초극 고수입니다. 철탄 낭비입니다.
하나에 팔 냥짜리 묵직한 철탄인지라 남은 개수도 몇 개 되지 않았다.
“마저 쏘고 가자.”
파룡당 정예들이 어떻게든 몸을 숨기려고 하지만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응1의 시야에 사각이란 없다.
그렇게 나는 혈검이 나를 찾기 위해 산을 해매는 틈을 타 철탄 15개로 파룡당 정예 열둘을 더 사살한 뒤 몸을 뺐다.
***
출발했을 때보다 절반 이하로 줄어든 혈검 일행은 신풍 분타로 들어간 뒤 나올 생각을 안 하고 있다.
“저 안에 박혀서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모르니 답답하네.”
인근 산속에서 대기하다가 대기 시간이 길어질 듯 해 신풍 현도의 성 안으로 들어왔다.
당연히 적당한 변장으로 신분을 감췄다. 뭐 변장이랄 것도 없다. 허름한 복장에 봉두난발, 농꾼의 도움을 받아 안면 근육을 살짝 움직여 인상을 바꾸고, 그 위에 스리슬쩍 검댕을 묻혀서 궁핍한 낭인인척 한 것이다.
그 뒤 객잔을 잡고 드러누웠다. 쉴 수 있을 때는 쉬어 주는 게 흑도의 칼잡이로 장수할 수 있다.
“농꾼.”
- 예, 리퍼.
“응4에게 쥐 몇 마리 잡아오라 그래.”
- 쥐를요?
“그래, 산 채로 잡아 와.”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했다. 실내 소식은 새로 알아내기 힘드니 별 수 있나. 쥐를 써야지.
- 생체 드론으로 쓰실 생각이군요. 서생원 시리즈를 공방 생산 리스트에 추가하시겠습니까?
“본체에서 직접 생산은 안 되는 거야?”
농꾼이 꾸민 공방은 내가 산중 수련을 하던 금정산에 있다.
- 리퍼의 체내 생성보다 공방의 생산 환경이 더 좋습니다. 체내 생성 시간이나 공방에서 생산해서 배달되는 시간이나 큰 차이 없을 듯합니다만?
“하는 김에 개, 고양이도 추가시켜.”
고양이도 개도 많은 시대다.
- 알겠습니다. 그럼, 응4의 사냥 임무는 취소시킵니다.
아예 저쪽에서 잡아다 감염시킨 다음 옮기겠다는 말이다.
“하긴, 쥐잡기도 공방 쪽이 더 쉽겠지. 신풍 분타 뿐 아니라 파룡당 본거지 쪽에도 배치시켜. 개, 고양이용은 캡슐 형으로 가져오고.”
그렇게 명령을 내리고 눈을 감았다. 30분쯤 잤을까?
- 신풍 분타에서 전령으로 보이는 자가 나왔습니다.
농꾼의 보고가 나를 깨웠다.
“나에 대한 소식을 전하려는 모양이네. 놔둬.”
무기도 탄궁을 썼고 복면도 뒤집어썼으니 정체를 들킬 위험은 없다. 탄궁도 어디서 산 것이 아니고 석성 분타 무기고에 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철탄을 구해야 하네.”
아무 생각 없이 대장간에서 샀다가 덜미를 잡힐 수도 있다.
“그냥 짱돌이나 깎아 써야겠군.”
짱돌을 쓴다면 기습이 아닌 한 절정 무인은 잡기 힘들게 된다. 아무래도 돌 보다는 철이 공력을 실기도 좋았고, 공력을 실었을 때 위력도 올라가니 말이다.
“정예 놈들 때려잡을 때 그냥 짱돌을 쓸 걸….”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
자던 잠이나 자야겠다. 눈을 감았다.
***
잘 자고 있는데 느껴지는 이상스런 위화감.
- 리퍼, 비상 상황입니다.
그리고 농꾼의 경고. 엄지로 중지의 두 번째 마디를 눌러 자판을 소환했다.
= 깼다. 몇이냐?
- 총 45명, 30명이 객방 창문 아래 진을 치고 있고, 15명은 방문 밖에 있습니다.
객방은 이 층이고, 놈들의 숫자는 내 기감에 걸려든 것과 일치한다.
신풍 분타 놈들은 아닐 테고.
응1이 혈검을 스토킹 하는 와중에 신풍 분타도 감시하고 있었다. 신풍 분타에서 저 정도 인원이 나왔는데 아무 연락이 없을 수 없다.
신풍현의 흑도 세력일 가능성이 컸다. 혈검이 지역 흑도에 수상한 자를 찾으라는 명을 내린 게 분명했다.
방심했군.
현의 중심지인 현도라 해봐야 그 크기는 뻔하다. 게다가 성벽이 있어 출입 시 신분 검사를 한다.
동전 몇 푼 찔러 주면 호패(號牌)와 로인(路引)이 없어도 통과시켜 주는 허술한 검사지만 지역민과 외부인, 양민과 무인 정도는 구분할 수 있다.
오늘 신풍현 현도로 들어온 자들 중에 무인으로 국한하고 정체가 확실치 않은 자를 찾는다면 내 흔적을 금방 찾을 수 있다는 말.
= 신풍 분타의 움직임은?
혹시나 해서 묻는다.
- 혈검과 신풍 분타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습니다.
역시나다.
타초경사(打草驚蛇), 풀을 두드려 뱀이 튀어 나오게 만드는 수법이다.
그럼 조용하게 처리하고 빠져나가는 것이 상책.
옷이야 벗지도 않았으니 무기만 챙기면 끝이다.
쾅!
방문이 박살났다.
파팍!
객방 창문도 마찬가지. 동시에 뭔가가 방문과 창문을 통해 무더기로 날아든다.
퍼퍼퍽!
그 뭔가가 터지면서 내놓는 가루들이 방안을 온통 뒤덮는다!
독일 가능성이 크다. 바로 호흡을 멈추고 벽을 후려친다.
쾅!
벽이 박살나기 무섭게 몸을 움직였다.
“고수다!”
“싸우지 마!”
“우리 일 끝이다!”
“물러나!”
벽을 뚫고 아래로 내려서자마자 창문 아래 있던 놈들이 그렇게 외치며 사방으로 흩어진다.
“독은 아닌데?”
일단 몸부터 챙긴다. 가루를 전신에 뒤집어썼지만 몸에 이상은 없다.
그렇게 의아해 하고 있는데.
파팡!
밤하늘을 뒤흔들며 2개의 불꽃이 붉게 허공에서 타올랐다.
- 혈검 움직입니다. 이쪽으로 직진하고 있습니다.
농꾼 녀석의 경고.
- 15초 뒤 도착! 14, 13!
이어지는 카운트다운에 기겁할 수밖에 없다.
“씨바!”
일단 튀어야 한다.
타탁!
바닥을 박차고.
파라락!
피풍의를 편다.
타타타타탁!
바닥에 깔아지듯 몸을 숙이며 전력을 다해 뛴다.
보보가 더해질 때마다 몸이 가벼워지고 속력이 더해진다.
- 11초 거리 유지됩니다.
하지만 혈검도 작정하고 쫓아오는지 떼어놓는 게 쉽지 않다.
- 피풍의 각도 조절! 성벽! 3초 뒤!
농꾼의 지시에 따라 피풍의의 각도를 맞추고 바로 성벽에 달라붙는다.
타타탁!
세 걸음 만에 삼 장 높이 절벽을 뛰어 넘으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활공으로 날아가면 힘을 아낄 수 있지만 속도가 떨어진다. 그렇게 되면 뒤를 쫓는 혈검과의 거리가 좁혀지게 된다.
턱! 타타탁!
발이 땅에 닿기 무섭게 다시 내달린다.
“어디 끝까지 도망쳐 봐라!”
호기어린 외침과 함께 성벽을 뛰어넘는 혈검의 모습이 응1과 응4의 시선으로 중계된다.
- 9초 거리.
젠장. 성벽 때문에 2초 손해 봤다.
- 경고, 혈검 탄궁 소지!
씨발!
핑, 핑, 핑!
파공성에 전신에 소름이 달린다.
- 좌측 45도로 전환!
농꾼의 말을 듣고 바로 방향을 튼다.
타타탁!
퍽, 퍽, 퍽!
등 뒤로 철탄이 바닥을 후려 패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 8초 거리.
농꾼의 경고.
“씨발, 초극 고수란 작자가 자존심도 없이 적을 따라해!”
이런 식이라면 따라잡힐 가능성이 크다. 무슨 수를 써야 한다. 관도를 따라 흐르는 강이 들어온다.
물속으로 도망가? 아니다. 파룡당은 반쯤 수적이나 다름없는 것들. 혈검은 그 파룡당의 정점 중 하나. 수공에 조예가 없을 수 없다. 물 위를 달리는 것은 몰라도 물속으로 도주는 내 무덤 내가 파는 꼴이다.
핑, 핑, 핑, 핑, 핑, 핑!
아 또 쏴! 그것도 여섯 발이나!
- 우측으로 15도!
퍽, 퍼퍽, 퍼퍼퍽!
- 6초 거리.
“씨발, 왜 2초나 줄어드는데!”
- 혈검이 탄궁과 철탄을 버렸습니다. 그 탓에 중량이 줄고 소지한 철탄의 흔들림으로 미묘하게 틀어지던 균형 탓에 발생하던 손실이 줄었습니다.
“그럼, 이제 체력 싸움이냐?”
- 예, 체력 싸움으로 가면 리퍼에게 유리합니다. 상대가 아무리 초극이라 해도….
농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시야가, 눈앞을 채우는 증강현실의 화면이 새빨갛게 물든다.
뭐야? 무슨 일이….
- 좌측 90도 전환!
재빨리 시키는 대로 했다.
핑, 핑, 핑!
소름 돋는 파공성이 뒤가 아닌 앞에서 터졌다.
퍽, 퍽, 퍽!
그리고 방향을 틀지 않았으면 당도했을 곳의 바닥을 두드리는 철탄들!
“도대체 뭔 일이야!”
난데없는 상황. 발로 죽어라 달리며 입으로 농꾼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 초극 고수 출현! 탄궁 소지자와는 11초 거리, 혈검과는 4초 거리입니다.
“뭐, 임마?”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는 그게 끝이 아니다.
- 분풍(墳豊) 천도만! 파룡당 이당주로 추정.
“무슨 개소리야?”
내딛는 발에 힘이 팍팍 들어간다. 날 쫓는 초극 고수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고?
“그 인간이 여기서 왜 나와! 응2랑 응3은 도대체 뭘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