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준비행(11)
파룡당 당주들을 너무 얕봤다. 흑도에서 평생을 굴러먹다 초극 지경에 오를 때까지 살아남은 인간들이다. 대가리가 안돌아 갈 리 없다. 혼자 잡기 힘드니 전령을 보내 나란 존재를 알리고 지원을 요청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생체 드론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자신들을 감시하는 존재를 눈치 챈 것이다. 그러니 응2와 응3의 눈을 피할 수도 있는 거다.
그만한 흑도방파의 본거지다. 만약을 대비한 비밀통로 하나 없겠는가. 한 번 피를 보면 묘지를 풍성하게 만든다는 분풍은 파룡당에 존재하는 비밀통로로 기어 나온 것이 분명했다.
“젠장!”
한 놈이 탄궁으로 내 발걸음을 방해하고, 한 놈이 거리를 좁힌다.
지금 이대로라면 얼마 못 가 따라 잡힐 게 뻔하다. 그러면 끝이다. 절정인 내가 초극 고수 둘을 상대로 싸우게 된다면 그냥 끝이다.
핑, 핑, 핑!
내 목숨을 갉아먹는 소리가 귀를 울린다. 분풍, 이 상조 회사와 붙어먹을 새끼가!
- 좌측….
농꾼의 지시는 무시한다.
“철탄에 집중, 착탄 타이밍!”
- 2, 1!
농꾼이 바로 알아듣고 화면과 음성으로 보조한다.
철탄이 지근거리에 이르는 순간 바로 몸을 뒤집는다. 엎드리듯 달리는 자세에서 바로 누운 자세가 된다. 그리고 번뜩이는 도광!
카카캉!
금속성과 함께 격한 충격이 내 몸을 밀어붙인다.
파파팍!
다시 몸을 돌리며 발로도 모자라 빈손으로 땅을 후려치며 내달린다.
- 13초! 6초! 거리 벌어졌습니다. 멋진 수법입니다. 리퍼!
날 후려치는 철탄의 힘을 이용하여 더욱더 속력을 높인 것이다.
“씨발, 초극 고수! 농꾼! 손 저린 거 좀 어떻게 해봐!”
하지만 몇 번이나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칼을 쥔 손이 철탄을 받아낸 충격에 욱신거리고 있다.
- 급속 처치 들어갑니다.
욱신거리는 손이 싸해진다. 그리고 고통이 사라진다. 농꾼의 치료가 시작된 것이다.
죽어라 내달리는 와중에 머리를 굴린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냥 달리면 내가 빠르다. 문제는 내게 방향을 틀도록 강요하는 철탄. 저걸 막아야 한다.
칼질로 막는 건 무리. 두 발이 땅에 붙은 상태라면 그 충격을 흘려 버리기라도 하겠지만, 내달리는 와중에 실속을 최소화하려면 그 충격을 감당해야 했다.
그러던 중 내 어깨에 걸려 덜컹거리고 있는 탄궁이 눈에 들어왔다.
“하아!”
한숨이 나온다. 혈검에게 철탄으로 공격당하고 갑작스레 파룡당 이당주가 튀어나와 시야가 극도로 좁아졌다. 그래서 당연한 생각을 못했다. 탄궁이 쏘아내는 철탄은 투사무기라는 사실을! 공기 저항 같은 작은 차이에도 탄도가 비틀리는 것이 투사무기의 약점이라는 기본을 말이다.
핑, 핑, 핑!
다시 들리는 소리.
“탄도 예측. 투척으로 저격한다!”
순식간에 내 손이 바닥을 훑어 적당한 돌들을 챙긴다.
농꾼이 내가 챙긴 돌의 모양을 파악하고 내가 취해야 할 자세와 각도를 상세히 그려 증강현실로 내 눈앞에 띄운다.
순식간에 다가오는 그 화면들을 보고 몸을 움직인다. 화면과 내 몸이 겹쳐지는 순간, 손을 움직인다.
탄궁을 쓸 필요도 없다.
핑!
강화된 절정 무인의 근력으로 뒤로 돌을 던지고 채 몇 발 가기도 전에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돌을 던졌다.
팍, 파팍, 팟!
허공에서 돌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철탄들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는 것이 화면에 잡혔다.
- 13초, 6초. 거리 유지되고 있습니다.
농꾼 녀석이 실속을 최소화 할 수 있는 지점과 자세를 선정해 준 덕이다.
“그럼 나도 발을 잡아 볼까?”
발을 잡는 철탄에 대한 대응이 되자 따라잡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사라진다. 그러니 마음과 행동에 여유가 생긴다.
달리는 와중에 묵직한 돌을 잡고, 잡는 즉시 탄궁의 시위를 당긴다.
피풍의가 만들어내는 양력에 기대어 땅에 붙다시피 엎드리듯 달리는 도중이다. 몸을 돌리지 않고 탄궁을 쏘려면 배 아래에서 활대를 잡고 어깨까지 시위를 당겨 다리 사이로 쏘아내는 수밖에 없다.
내 등판을 노리고 날아드는 철탄을 저격할 각도는 안 나오지만, 뒤쫓아 오는 혈검을 향해 쏠 정도는 된다.
“목표 혈검!”
내 말에 농꾼이 지금 자세에서 적합한 각도를 그렸다. 그리고 나는 그 그림과 몸을 겹쳤다.
핑, 핑, 핑!
왕성히 움직이는 다리 사이로 짱돌들이 발사됐다.
그리고 그 결과.
- 6.5초, 7초, 혈검과 거리 벌어집니다.
“계속 간다.”
돌이 보이는 족족 잡아 시위에 건다.
핑, 핑, 핑.
내달리는 혈검을 향해 돌들이 날아갔다.
혈검이 검으로 돌들을 쳐내며 내달렸다. 처음 돌을 날렸을 때처럼 확연한 효과는 없었지만 아예 없는 게 아니다.
열 번 정도 연달아 돌을 날리면 1초 정도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 철탄 옵니다.
분풍이 내 발길을 잡기 위해 철탄을 쏘지만, 잠시 탄궁의 시위를 놓고 그 손으로 돌을 던지면 그뿐이다.
내가 쏘면 혈검과 거리가 벌어지고, 분풍이 쏘면 내가 투척으로 궤도를 비튼다.
게다가 나는 농꾼의 도움으로 돌이 보이는 족족 주워 탄궁을 쏠 수 있지만, 분풍은 온전히 자신의 기량으로 나를 맞춰야 했다.
전력을 다해 달리는 와중에 재빠르게 달리는 목표를 탄궁으로 정확히 겨냥하고 쏘는 것은 초극 고수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공격 속도에서, 횟수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당연히 거리는 쭉쭉 벌어질 수밖에.
“네놈! 다음에는 반드시 오체분시를 내주마!”
혈검의 노성이 밤하늘을 흔들었다.
- 혈검, 발을 멈췄습니다. 분풍 혈검에 동조해 추적을 멈췄습니다.
“일단 저치들 시야 밖으로는 나가자고.”
이십 리를 더 달린 뒤 관도를 벗어나 산속에 몸을 숨겼다.
“후우.”
충분한 거리를 확보한 다음 숨을 고른다.
“여기 위치는?”
정신없이 내달린 탓에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 신풍현도의 동남쪽입니다. 무산(武山) 자락으로 추측됩니다.
“물길 따라 계속 가면 사부님 보겠네? 사부님 쪽 상황은?”
- 맹방의 정예들로 회창 분타를 포위, 반각 전에 정문을 박살내고 전투에 돌입했습니다.
“파룡당의 둘은 신풍 분타로 돌아갔나?”
- 관도를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만, 신풍 분타 방향이 아닙니다.
“나는 저치들 시야에서 벗어났으니 날 쫓는다 보기는 힘들고, 설마 회창 분타로 갈 생각인가?”
그럼 내가 이때껏 한 고생이 죄다 무의미해진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재수가 없어서 사부 일행이 저들과 마주친다면….
- 리퍼의 뒤를 추적하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
농꾼의 말이 내 생각을 끊었다.
“뭐?”
- 리퍼가 관도를 벗어난 지점에서 멈춰 섰습니다. 그리고 이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리퍼에 대한 추적 수단을 확보하고 있다 추측됩니다.
“아직 안 끝났다 그건가?”
발을 멈춘 것도 고래고래 고함을 내지른 것도 나를 방심시키기 위한 수작이었단 말이다.
그나저나 어떻게 쫓고 있단 거지? 저치들에게 생체 드론이 있을 리 만무하고?
“하아!”
입에서 한숨이 나온다.
“반성해야겠네.”
농꾼 녀석을 비롯한 과학의 이기에 젖어 흑도 칼잡이의 감이 무뎌진 거다.
반년 전의 나라면, 농꾼이 활성화 되기 전의 나라면 객방에서 터진 가루들을 뒤집어썼을 때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지금 내 몸 곳곳에 묻은 이것들, 독이 아니다. 그러니 그 정체는 추종향(追從香)인 게 당연하지 않은가.
“성분 분석.”
옷에 묻은 가루들을 슬쩍 손가락으로 훑어서 혀를 댄다.
내가 봐야 알 수 없는 그래프들이 요동을 치고, 잠시 후 결과가 나왔다.
- 일종의 향수로 분석됩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탈취가 쉽지 않고 향이 오래가는….
농꾼의 설명을 대강 넘긴다. 짐작대로 추종향이다.
“중화시킬 수 있나?”
- 화학적 방법으로는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신속 처리 방법으로 흐르는 물에 전신 입수를 권합니다.
“물에 들어간다고 쉽게 없어지지 않을 텐데?”
물로 금방 지워질 물건을 추종향으로 쓸 리 없다.
- 방법이 있습니다.
“파룡당의 둘과 마주치지 않는 쪽으로 제일 가까운 물길로 안내해줘.”
- 삼수강으로 길을 잡겠습니다.
눈앞에 화살표가 떴다. 화살표를 따라 바로 몸을 움직인다.
“화면 한쪽에 혈검과 분풍의 위치와 거리를 표기해.”
혹시나 저들이 나를 놓치면 회창으로 발길을 돌릴 수도 있다. 그런 일은 막아야 했다.
“추종향은 흐르는 물에만 들어가면 다 씻어낼 수 있는 거야?”
- 몇 가지 조치를 따로 취해야 합니다만, 리퍼가 그 이상의 행동을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물에만 들어가면 나머지는 농꾼이 알아서 하겠다는 소리다.
“그럼 씻어내는 건 좀 미루자고.”
추종향을 완전히 털어낸다면 내가 추적을 눈치 챘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어차피 내 목적은 파룡당의 시선을 잡아 두는 것. 파룡당 당주 둘을 내게 묶어 둘 수 있다면 그건 큰 이득이다.
“공주 부도 파룡당 쪽으로 방향 잡아줘.”
- 나루터 쪽으로 방향을 잡습니까?
“적당히 내 경공으로 힘들지 않는 경로로.”
- 알겠습니다.
그렇게 공주 부도 쪽으로 방향을 잡고 슬슬 달린다.
일각 정도 지나자 농꾼이 맡긴 일에 대한 보고를 한다.
- 서생원 2개체 완성. 투입 대기 중입니다.
“둘? 너무 적은 거 아냐?”
- 서생원 시리즈에 삽입한 나노 머신은 개체의 생체 변이가 끝나면 다른 개체로 이동하는 방식입니다. 200개체를 변이시키면 수명이 다합니다. 변이 개체의 기능은 시각과 청각 데이터 송수신에 이쪽의 의도에 따라 이동 대기 정도의 기본 성능으로 이뤄졌습니다.
적 내부에 최종적으로 200개의 눈과 귀가 생기는 격이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초극 고수 탐지 기능은 없는 거야?”
- 나노 머신을 보유한 개체라면 나노 머신의 기능으로 가능합니다. 모든 개체에 동일 기능을 부과하려면 개체 변이 시간이 3배로 늘어납니다.
“그렇다면 그 정도로 만족해야지. 그런데 변이 시간이 얼마야?”
- 개체마다 차이가 있습니다만, 평균 작업 시작 후 1시간 정도 입니다.
“나노 머신 삽입했다 해도 바로 작업 시작할 수 있는 거 아니잖아. 삽입 기점으로 말해.”
- 사람과 달리 사이즈가 작아서 보통 5분 전후로 작업 시작이 가능합니다.
“그래? 그런데 쥐의 수명이 어느 정도지?”
- 1년에서 3년입니다. 반복 투입이 필요한 경우입니까?
“파룡당에 그럴 필요는 없지.”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한 달 안에 망할 곳이 파룡당이다.
- 투입 목표지의 변동 사항이 없다면 그대로 투입 시키겠습니다.
“하나는 파룡당 본거지로 보내고, 하나는 신풍 분타 말고 길안부 복로방에 투입 시켜. 복로방은 개체들 수명 살피면서 필요하다면 반복 투입 시키고.”
- 이동 시작합니다. 각 목표에 서생원 투입 예상 시간은 2시간 뒤 입니다.
“초극 고수 탐색을 최우선 사항으로 실행시키고, 그 이후에는 개체 확보에 전력투구. 파룡당 투입 개체는 초극 고수 탐색 이후 개체 확보. 3마리 이상 되면 파룡당 세 당주 전담 개체 하나씩 붙이고, 나머지 개체는 생성되는 족족 비밀통로 수색에 돌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산을 내려오게 되었다.
- 혈검과 분풍이 이쪽을 발견한 듯 합니다. 산자락에서 발을 멈추고 몸을 숨겼습니다.
그들이 숨어 있는 곳이 화면에 붉은 원으로 표시되었다.
“당장 잡아 족칠 생각이 아니라 뒤따라와 배후를 캐겠다는 거군.”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떠오르는 그럴듯한 생각하나.
“내 빅 엿을 먹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