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절강행(06)
“백 명은 태울 수 있는 왜선이 열한 척이군. 거기다가 나룻배도 제법 많고.”
진혜예가 인상을 썼다.
“최소한 천백 명이군요.”
“거점을 유지할 인원도 있어야 하니 못해도 이삼백은 더 있다 봐야지.”
화인천의 말에 진혜예가 덧붙인다.
“출항하려는 것 같은데?”
경철운이 한쪽을 가리켰다. 왜선 세 척에 왜구들이 올라타고 있었다.
“약탈하러 가는 모양이군.”
“그걸 어떻게 알아?”
내 말에 진혜예가 물었다.
“같은 종류의 왜선인데, 옆의 배 보다 돛대가 높았습니다. 옆의 배보다 가볍다는 증거지요. 그렇게 배를 가볍게 하고 출항하는 이유는 뻔하지요?”
사실은 응4의 시선으로 왜선의 홀수선을 살피고 알았다.
“막아야 해!”
진혜예가 뒤로 물러나 몸을 일으켰다.
“누님, 싸우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솔직히 우리끼리 왜구 놈들이랑 드잡이질 할 게 한두 번입니까? 문제는 우리가 저들을 후려치고 빠져나간 이후입니다.”
경철운의 말이다.
“계속해.”
“우리의 존재로 저들은 이 거점이 드러났다고 여길 겁니다. 근시일 안에 멸왜단이 절강 무인들을 규합해 달려들 게 뻔한데, 그냥 있겠습니까? 여길 버릴 겁니다. 아니 그냥 가기는 아쉽겠지요. 지척이 사포입니다. 대대적인 약탈을 자행할 거란 말입니다. 왜선 세 척이 움직여서, 왜구 삼백 명으로 일어날 피해와 천 명이 넘는 왜구가 움직여서 일어날 피해 어느 쪽이 막대할까요? 사포가 완전 박살날 겁니다. 그뿐일까요?”
“거기다 또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거야?”
“가흥부 흑도 놈들이 떠들어댈 겁니다. 조용히 있던 왜구를 멸왜단이 자극해 이 난리가 일어났다고. 그렇게 되면 사포에서 멸왜단 출입을 막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사포 관부도 겁박하겠지요. 멸왜단은 왜구를 못 막는다. 약탈당하는 것보다는 거래를 하는 것이 낫지 않느냐 이런 식으로 회유도 하겠지요. 그렇게 되면 사포에 왜구들 거점이 생기는 것은 일도 아닐 겁니다.”
“그래서, 눈앞에 약탈을 떠나는 왜구를 그냥 두고 보자고?”
“그냥 두자고는 안했습니다.”
“뭘 그리 어렵게들 생각하고 있을까.”
둘의 이야기에 끼어든다.
“누님 덕분에 지금 내가 가진 팔 냥 철탄이 사백 개거든?”
“그래서?”
경철운이 반문했다.
“그 정도면 지금 눈에 보이는 왜선들이 동시에 출항한다 해도 죄다 박살낼 수 있어. 방향타를 부수고 돛대를 박살내는 정도가 아니라 수장시켜 버리는 게 가능해. 그런데, 지금 출항하려는 배는 기껏 세 척뿐이지. 남은 여덟 척은 준비해 온 것들로 불태울 수 있다고.”
내 말에 경철운이 우리가 준비해온 물건들을 훑어봤다.
“이렇게 우리들에게는 왜선들을 다 처리할 방도가 있어. 약탈한 물건들을 옮길 배도 없는데, 왜구들이 과연 약탈할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철운의 걱정은 헛된 거라 그거군.”
“그렇지요, 누님.”
진혜예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던 거냐?”
경철운이 준비해 온 물건들의 용도를 파악하고는 물었다.
“나도 멸왜단의 일원이야.”
뻔한 것을 왜 물어?
준비된 것들은 다섯 근짜리 술 단지, 3L짜리 항아리 서른 개다. 안에는 송진을 듬뿍 먹인 짚 무더기들이 가득했다.
덮개는 바람구멍이 난 것들이고, 단지를 묶은 새끼줄은 잡고 던지기 좋게 꼬리가 두 자 정도 남는 모양새다.
“아무래도 여기서 왜선들이 있는 곳까지 던지기는 무리 같은데.”
분지가 좀 넓어서 절벽에서 던진다고 왜선이 정박해 있는 해안까지 날아갈 것 같지 않았다.
“불이야 직접 숨어들어 지르면 되지.”
진혜예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지요. 누님과 철운, 인천이 분지로 내려가서 준비하고 있으면 저는 절벽 위에서 출항하는 왜선들을 공격해서 시선을 끌지요. 그리고….”
그렇게 계획이 세워졌다.
= 응5 불러내려.
- 예, 리퍼.
“누님. 총타로 보낼 서신 좀 쓰시죠.”
“총타에서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티자는 거야?”
“여기가 사포 앞바다라 생각하면 총타에서 바다를 가로지르면 삼백 리 정도 밖에 안 될 걸요?”
응5 녀석이 내 어깨로 내려왔다.
“이 녀석이면 한 시진이면 영파부 총타에 도착할 거고 무인들로 노꾼들을 이루면 아침나절이면 도착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계획대로 된다면 그때까지 버틸 수도 있을 것 같고.”
진혜예가 써 준 서신을 응5의 발목에 달았다.
= 정천성 부당주에게 전하고, 총타 전력을 최대한 빨리 이곳으로 유도해 오는 임무다.
- 예, 리퍼.
농꾼의 대답과 동시에 응5가 날아올랐다.
“그럼, 시작합시다.”
나는 철탄을 짊어지고, 세 사람은 서른 개의 불 단지를 나누어 짊어지고 헤어졌다.
세 사람이 조심스레 절벽을 내려갈 때 나는 절벽 위를 내달렸다.
- 왜선들 출항합니다.
농꾼의 말에 절벽 아래를 보니 왜선 세 척이 해안선 정면의 절벽으로 향하고 있었다.
절벽 아래로 배 한 척은 넉넉히 지나갈 정도의 동굴이 뚫려 있다.
뻔하다. 조수간만의 차이로 해 떠 있을 때는 물이 차올라 왜선이 드나들기에는 동굴이 작아 보이고, 해 떨어질 때 물이 빠져 드나들 동굴이 형성되는 그런 곳이다.
“길 막기 좋은 위치 잡아 봐.”
- 동굴 입구에 최대한 가깝게 붙이겠습니다.
내 명령에 농꾼이 답했다. 그리고 잠시 뒤 답을 내놓았다.
- 다른 배들이 오가지 못하도록 침몰시키려면 최초 왜선에 30발, 두 번째에는 25발, 세 번째에는 22발 필요합니다. 세 척을 침몰시키기에 최적의 위치는….
농꾼이 지정해 주는 위치로 내달렸다.
늦지 않게 수상 동굴이 뚫려 있는 절벽 위로 도착할 수 있었다.
팔 냥 철탄 77개의 배치도가 절벽 위에 펼쳐진다. 재빨리 철탄을 깔고 준비한다.
눈앞으로 77개의 인영들이 각자의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그 인영들 머리 위로 깜빡이는 숫자들, 큰 숫자가 순서, 그 뒤의 작은 숫자가 시간이다.
“하아, 후!”
심호흡을 하며 첫 탄을 주워 든다. 그리고 바로 인영과 자세를 겹치고 시위를 당겼다.
공력을 한껏 머금은 철탄이 허공을 갈랐다.
피잉!
그리고 발이 움직이고 발걸음에 튕겨 나는 철탄을 낚아채고 시위를 당기며 자세를 겹친다.
카운트가 0이 되는 순간 시위를 놓고 다음 인영을 향해 달린다. 춤추듯 발을 옮기며 77개의 인영 사이를 누빈다.
피피피피핑!
강렬한 파공성과 함께 힘껏 때려 박은 공력에 퍼렇게 빛나는 철탄들이 다양한 궤도로 허공을 수놓는다.
콰콰쾅, 콰쾅! 콰콰콰쾅!
동시에 휘몰아치는 철탄에 세 척의 왜선이 파괴의 비명을 내질렀다.
절벽 아래가 소란스러워지는 것은 당연지사. 세 척의 배 위에서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왜구들이 뭐라 소리 지르며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철탄의 폭우에 박살난 것은 돛대와 방향타만이 아니다. 배 여기저기에 구멍이 난 탓에 배가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배 위의 왜구들이 욕설을 내뱉으며 수면으로 뛰어들었다.
- 성공입니다. 최초의 왜선이 완전히 가라앉고, 두 번째 세 번째가 그 위로 걸치듯 침몰할 겁니다.
농꾼이 침몰한 왜선들이 어떻게 동굴 입구를 막는지 화면으로 시뮬레이션 해준다.
나룻배나 쾌속선 같은 소형이나 중형 선박은 지나다닐 수 있어도 안에 남은 여덟 척 왜선은 확실히 무리다.
입구는 막았다. 그럼 왜구 놈들의 시선을 제대로 끌어 볼까?
“뒈져라! 왜구 새끼들아!!”
목청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며 바다 위를 헤엄치고 있는 왜구들을 향해 철탄을 쏘아댄다.
핑! 핑!
절벽 위에서 내리꽂히는 철탄들이 왜구들을 잔혹하게 패 죽인다.
시선을 끌기 위해 철탄에 공력을 잔뜩 집어넣은 지라 철탄이 물에 닿으면 펑펑 하는 굉음을 내며 그 존재감을 퍼트린다.
절벽 위에 우뚝 서서 대놓고 시위를 당기는 내 모습을 절벽 아래에서 못 볼 리 만무하다.
절벽 아래를 주시하고 있는 응 시리즈의 시야에 내 쪽을 향해 삿대질을 하고 있는 왜구 놈들의 모습이 잔뜩 잡혔다.
아래에서 나를 향한 고함과 노성이 터져 나왔다.
십여 척의 나룻배가 이쪽으로 출발했다. 활을 든 왜구들을 잔뜩 태운 배들이다.
어느 정도 가까워진다 싶으니 왜구들이 활을 쏘기 시작했다. 수십 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탄궁을 휘둘러 화살들을 쳐내며 뒤로 물러났다. 내가 절벽 뒤로 물러나 직사를 피하자 이번에는 곡사로 날아든다.
하늘 위로 떠오른 화살들이 절벽 위로 떨어졌다.
피할 거는 피하고 쳐낼 거는 쳐내고 있자 농꾼이 눈앞에 화면을 띄웠다.
- 리퍼, 스물의 왜구들이 절벽을 오르고 있습니다. 전원 두 자루의 칼을 소지한 것이 왜구 무사들로 보입니다.
아무래도 수상 동굴이 뚫린 이쪽 절벽이 올라오기 쉬운 모양이다. 100m쯤 떨어졌을까? 그들이 절벽 위로 올라서는 것이 보였다.
그들 중 몇 명이 아래를 향해 뭐라 외치자 곡사로 날아드는 화살이 멈췄다.
나를 향해 뭐라 외치며 칼을 빼든 스물이 달려든다.
얼핏 느껴지는 기세는 이류.
“카핫!”
“캇!”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기합성을 터트리며 먼저 당도한 둘이 칼을 휘두르는 순간, 그들의 왜도에서 도기가 어른거렸다.
탄궁을 뒤로 던지고 뒤로 크게 물러났다. 칼질한 두 왜구에게 하나의 왜구가 더 가담해 셋이 됐다. 셋이 된 왜구가 나란히 늘어서더니 동시에 덮쳐든다.
“카핫!”
“캇!”
“카앗!”
요상한 기합과 함께 하나는 정면에서 내려 긋고, 둘은 좌우로 갈라지며 횡으로 베어 들어온다.
멍청히 서서 삼면 공격을 받을 이유는 없다.
나에게는 가깝고 적에게는 멀게. 보법의 기본 원칙에 충실하게 좌측 뒤로 비스듬히 물러서며 정면과 우측, 두 개의 칼날과 멀어지며 좌측의 칼날을 정면의 칼날로 만들어 받는다.
캉! 퍽!
칼도 뽑을 필요 없다. 양손을 금속 코팅하고 오른손을 내밀어 정면으로 베어 오는 칼날을 잡고 왼손을 안에서 밖으로 휘둘러 손등으로 머리를 박살낸다.
허공에 칼질한 다른 둘이 내 쪽으로 방향을 틀 때 내 발은 이미 그들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
오른손에 잡힌 왜도를 한 놈에게 던져준다.
캉!
날아든 왜도를 막느라 한 놈이 주춤거릴 때 다른 놈에게 낭파조를 선사한다.
캉!
한 손으로 막고 다른 손으로는 목을 잡았다.
콰드득!
뼈를 바수는 소리와 함께 목이 꺾여진 왜구가 저승으로 갔다.
신기한 놈들이다. 칼을 휘두를 때는 분명 도기를 사용하는 일류인데, 목을 꺾는 순간 손이 느낀 근육의 반응이나 내기의 저항력은 분명한 이류다.
시체를 던지니 놈들이 뒤로 훌쩍 물러난다.
셋이 달려들어 순식간에 둘이 나자빠지자, 남은 열여덟은 함부로 달려들지 않고 있다.
넷으로 세 무리가 되고 셋으로 두 무리가 되어 슬금슬금 서로 간의 거리를 벌리는 것이 아무래도 포위해 보려는 속셈이다.
느긋하게 탄궁을 던져 둔 곳으로 가서 탄궁을 주워 든다.
안 덤비면 빨리 덤비게 해줘야지.
왼손으로 탄궁을 들고 오른손을 움직인다. 몸에 숨겨 둔 철탄이 오른손에 쥐어지고 시위에 걸리는 것은 순식간이다.
핑! 팍!
파공성과 동시에 셋으로 뭉친 왜구 중 하나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핑! 팍!
이번에는 넷으로 뭉친 패 중 하나를 노렸다. 활질로 순식간에 둘이 죽어 나가자 왜구들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