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절강행(08)
“갑자기 왜 그래?”
진혜예가 놀란 눈이 되어 물었다.
나룻배 위에 조용히 앉아 있다가 갑자기 욕을 하며 일어서니 놀라는 게 당연하다.
“적이야?”
경철운이 주위를 살피며 물었다.
“일단 여기서 벗어난 뒤에….”
그렇게 말하며 노를 잡았다. 도망칠 방향이 제한된 수상 동굴에서 초극 고수와 마주치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다.
재빨리 섬 밖으로 노를 저어 수상 동굴을 나왔다.
- 좌측으로, 북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권합니다.
눈앞에 지도가 떠오르며 내 위치와 쾌속선의 위치가 표시되며 농꾼의 조언이 뒤따른다.
왜구들의 근거지로 들어가는 절벽의 수상 동굴은 사포를 등진 동쪽으로 나 있다. 서쪽에서 다가오는 쾌속선은 절벽의 남쪽을 따라 돌 것으로 예측되니, 반대로 움직여 상대의 관측을 피하라는 말이다.
= 절벽 위의 왜구들은?
- 불 끄는데 합류했습니다.
어떻게든 왜선을 살리는 것이 왜구들의 우선 사항이다. 왜선이 없으면 돌아갈 길이 막막하니 말이다.
섬을 둘러싼 절벽의 북쪽 지역으로 배가 들어서자 노질을 멈췄다.
“통로를 막아 총타의 지원이 올 때까지 왜구들을 고립시키는 거 아니었어?”
진혜예가 물었다.
“사포 방면에서 배 한 척이 접근 중이에요. 초극 고수가 타고 있는.”
“어떻게 아는 거야?”
경철운이 물었다.
“사람과 동물은 낼 수 있는 소리의 영역이 다르고, 들을 수 있는 소리의 영역도 달라. 비상시에는 사람이 들을 수 없는 영역의 소리를 내서 알려 주는 거지. 나는 익힌 무공 때문에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고.”
내가 하늘 위를 가리키며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그 말은 매들이 무인의 무위를, 그 경지를 판별할 수 있단 소리잖아!”
경철운의 눈이 커졌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건 무리. 그냥 초극 고수만 판별할 수 있어.”
“그것만 해도 어디야. 알면 알수록 대단한 녀석들이네.”
내 말에 경철운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응 시리즈를 칭찬했다.
“초극 고수가 오고 있다면 확실히 물러나는 것이 옳은 일이지. 그 초극 고수가 가흥부 흑도의 인물이라 섬의 상태를 안다 해도 당장 손 쓸 방법은 없을 테고.”
진혜예의 말에 동감한다는 듯 경철운과 화인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거점을 살리는 방법은 멸왜단 총타를 후려치거나, 지금 달려오는 멸왜단의 전력을 궤멸시키는 정도밖에 없다.
하지만 거점의 왜구를 빼돌리는 방법은 존재한다. 초극 고수가 그 방법을 알아챈다면 막아야 했다.
“가흥부 흑도와 연락이 되어 조직적으로 나서면 일이 귀찮아지니 누님과 인천이는 여기서 대기하다 연락하러 나오는 배를 막아 주고, 철운은 나와 함께 움직이자.”
암기 대용으로 쓰라고 철탄 꾸러미 하나를 배에 남겨 두고 경철운과 함께 다시 절벽을 올랐다.
쾌속선 한 척이 수상 동굴을 반쯤 빠져나오다가 멈춰 선 것이 보였다. 입구 앞에 침몰한 왜선의 잔해에 배가 걸린 것이다.
“왜선 침몰시켰듯 저 쾌속선도 잡는 건 어때?”
“너는 지금 상황에서 초극 고수와 드잡이질 하고 싶어?”
경철운의 말에 내가 뚱하니 물었다.
“물 위라면 도망가는 것은 무리 없을 듯한데?”
경철운이 자기 발에 잘 신겨져 있는 목혜를 보며 웃었다.
“초극 고수의 눈썰미를 얕보지 마. 이 방법을 눈치 채면 우리에게 재앙이야.”
따라하는 게 어려운 방법이….
팡, 파파팡!
굉음과 함께 수상 동굴 입구 근처에서 물기둥이 크게 치솟았다.
“씨발!”
입에서 욕이 나왔다.
파파파팡!
굉음이 연속으로 울려 퍼지며 물기둥이 계속해서 치솟는다. 쾌속선에 탄 초극 고수가 강기로 침몰한 왜선을 박살내는 것이다.
“야, 저렇게 되면….”
“따라와!”
냅다 섬 바깥쪽 절벽 아래로 몸을 날린다.
“야!”
경철운이 투덜거리며 내 뒤를 따랐다. 절벽 아래로 미끄러지듯 내려섰다.
“누님, 계획 변경이오.”
“뭐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데, 이것 때문이야?”
진혜예가 물었다.
“초극 고수가 강기로 입구를 막은 왜선들을 박살내고 있소.”
“입구가 열린다 해도 저 안에는 쓸 만한 배가 없잖아.”
내 대답에 진혜예가 의아한 듯 물었다.
“놈이 강기를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물기둥이 몇 장은 치솟았소.”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뒤따라온 경철운이 했다.
“그런 물기둥이라면 몇 번만 날려도 왜선에 붙은 불 끄는 건 일도 아닐 거요.”
“젠장!”
경철운의 말에 화인천이 얼굴을 힘껏 구겼다.
바닷물을 잔뜩 먹은 선체들이라 불이 잘 붙지도 않았다. 지금 타오르고 있는 것은 왜선의 선체라기보다는 왜선 안의 잡동사니들이다.
“지금 불을 끄면 못해도 왜선들 반은 움직인다는 소리잖아.”
화인천은 얼굴을 구기다 못해 이를 악물었다.
돛은 죄다 불탔지만 노가 있다. 왜선들이 움직이는데 큰 문제가 없다는 소리.
“하아, 초극 고수를 잡아 둬야 된다는 소리네.”
진혜예가 한숨을 내쉬었다.
왜선 한 척에 왜구들이 100여 명씩 붙어 있다지만 제대로 된 도구도 없는 그들이 불을 끌 수 있을 리 없다. 초극 고수만 붙들어 놓으면 된다.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네 도끼질이면 왜선들 밑창에 구멍 뚫는 건 어렵지 않겠지?”
“무슨 소리야?”
내 물음에 경철운이 나를 보았다.
“넌 왜선들을 확실히 박살내라는 소리지. 딱 물 들어올 높이에 큼지막한 구멍 하나씩만 뚫어.”
경철운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진혜예를 바라봤다.
“누님, 인천이랑 같이 철운이의 뒤를 봐줘야겠습니다.”
“혼자서 초극 고수를 상대하겠다는 거야?”
“무모한 짓 하지 맙시다.”
진혜예와 화인천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이대로라면 왜구들 죄다 도망가게 됩니다.”
“하아.”
내 말에 진혜예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자신 있어?”
“누님, 나는 원하는 게 있어 멸왜단에 들어온 놈이요.”
남의 싸움에 목숨 걸 생각 없다는 소리다.
“왜선들 처리가 끝나면 폭죽으로 신호할게.”
“빠질 때는 타고 온 배 놔둔 쪽으로….”
대강의 이야기를 끝내고는 바로 움직인다.
셋은 절벽 위로 올라가고, 나는 나룻배를 열심히 몰았다.
수상 동굴을 통과하니 불붙은 왜선 옆에 바짝 붙은 쾌속선이 보였다.
쾌속선의 선수에서 문제의 초극 고수가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강기가 서린 칼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수면이 터지며 물기둥이 치솟았다.
펑, 퍼퍼펑!
그렇게 치솟은 물기둥이 불타는 왜선을 덮치자 불길이 퍽퍽 소리를 내며 줄어들고 있었다.
- 리퍼, 상대의 무공은 태산파(泰山派)의 봉선도(縫旋刀)일 가능성이 팔 할입니다.
농꾼이 녀석의 칼질을 분석했다. 태산파면 과거 산동의 패권을 다퉜던 명문이었다. 지금은 몰락해 버렸지만 말이다.
= 설마, 목표 중 하나?
농꾼이 자세한 데이터를 가지고 있는 무공은 내 목표들이 익힌 무공이라는 말이다.
- 아닙니다. 산동의 수확 대상자 중 하나인 염진성의 숙부 염가동입니다.
젠장, 이렇게 되면 그 작자랑은 좋게 해결하기는 글렀다. 숙부가 하는 사업을 내가 망친 꼴 아닌가.
“하아.”
한숨으로 미래의 걱정 따위는 날려 버리고 눈앞의 일에 집중한다.
적절한 거리에서 나룻배를 멈추고 세 개의 철탄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탄궁의 시위를 당겼다.
피피핑!
작정하고 공력을 밀어 넣은 철탄들이 쾌속선의 후미를 향해 날아들었다.
펑, 퍼퍼펑!
왜선을 덮치는 물기둥이 만들어내는 소음이 철탄의 행적을 뒤덮었다.
쾌속선 후미가 박살났다. 그쪽으로 물이 차기 시작하니 쾌속선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선수에 서 있던 초극 고수가 그걸 모를 리 없다. 염가동을 향해 철탄을 선물한다.
탕!
철탄이 허공으로 튕겨 났다. 철탄이 날아온 궤적을 단번에 파악한 염가동의 험한 눈초리가 내게로 날아든다.
피피핑!
그에 대한 보답으로 철탄을 삼 연사 한다.
“어쭙잖은 짓!”
타타탕!
노성과 함께 철탄을 튕겨낸 염가동이 등평도수의 경공으로 수면을 박차고 달려온다.
피피핑!
다시 삼 연사.
타타탕!
도강이 깃든 칼부림에 철탄은 착실하게 튕겨 났다.
- 철탄의 도탄 상태를 분석. 발판 안정화 시와 대비 삼 할 이상의 에너지 손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농꾼의 분석을 들으며 바로 철탄을 쏜다. 목표는 내가 딛고 서 있는 나룻배.
파팍!
바닥이 깨지며 나룻배 안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온다.
나는 나룻배를 미련 없이 박차며 등평도수를 펼쳤다.
= 거리 측정.
- 11초. 11초, 거리 유지됩니다.
피풍의를 펼친 것도 아닌데, 거리가 유지되고 있다. 목혜의 효용이 가져다주는 차이를 생각해도 절정과 초극의 차이를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다. 경공이 평균 이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해수면을 달려 남측 절벽에 도착하기 무섭게 벽면을 박차고 절벽을 뛰어오른다.
절벽 위에 서서 숨을 두어 번 돌리니 상대가 절벽 위로 올라왔다.
“멸왜단에서 온 놈이냐?”
쉰은 안 되어 보이는 얼굴을 가진 염가동이 칼을 겨누며 물었다.
“왜구 상대로 이 짓 하는 거 보면 모르오?”
탄궁을 치우고 칼을 뽑으며 답했다.
“하아, 이 짓도 끝이군.”
염가동이 한숨을 푹 쉬더니 말을 이었다.
“내 얼굴을 봤으니 살려 둘 수 없다.”
살인멸구(殺人滅口)하시겠다? 그 의욕에 좀 더 불을 붙여 볼까?
“얼굴만 알까? 이름도 아오. 몰락한 태산파의 제자인 염가동 대협.”
염가동의 눈이 커지는 순간, 바닥을 박차며 칼을 휘두른다.
카카캉!
전압이 걸린 도기와 도강이 격하게 충돌했다.
- 상대의 신체 조건과 태산파 봉선도의 패턴을 조합하여 행동 예측을 통한 공격 경로를 설정합니다.
눈앞으로 아라비아 숫자를 담은 원들이 요란하게 움직인다. 리듬 게임 하듯이 숫자의 순서대로 움직이는 원을 쫓아 칼질을 한다.
카카캉, 카캉!
봉선도의 현란한 칼질이 도강과 함께 쏟아졌지만 농꾼의 인도를 따른 내 칼질에 죄다 걸려든다.
거의 대등한 승부가 이뤄진다. 혈검이나 사부와 싸울 때와는 천지차이다.
초극 고수라도 다 같은 초극 고수가 아닌 것이다. 염가동의 기본 무위는 흑도에서 구를 만큼 구른 혈검이나 절정에서 익다 못해 썩어 들어가다 초극이 된 사부에 비해 많이 모자란 것.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무공의 초식 자체를 농꾼이 완전 꿰뚫고 있다는 것도 크다.
- 10, 9, 8, 7…
농꾼 녀석의 카운트다운이 좋은 시절이 다 갔음을 알린다.
“하!”
쾅!
힘과 힘이 부딪치는 순간 피풍의를 펴고 뒤로 몸을 날린다.
순식간에 십여 장을 물러선 나는 몸을 돌려서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어딜 도망가느냐!”
염가동이 전력을 다해 뒤쫓아 왔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의 얼굴만이 아니라 이름과 출신을 알고 있는 상태. 나를 놓치면 산동에 살고 있는 친지들까지 위험해지는 것이다.
절벽 아래를 활공으로 내려와서 수면을 박차 다시 양력을 얻는다.
첨벙!
염가동은 물속으로 그냥 뛰어드는가 싶더니.
파팡!
물기둥을 일으키며 그 반발력으로 몸을 날려 온다.
- 110초. 109초.
전력을 다해 도망치지는 않는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전압이 충전될 때까지 시간을 끈다.
섬 안쪽 절벽 아래 수면 위를 등평도수로 내달리며 하는 술래잡기는 금방 끝이 났다.
- 2, 1! 충전 끝났습니다.
“타합!”
재빨리 몸을 뒤집으며 수면을 박찬다. 순식간에 거리를 줄이며 칼을 휘두른다.
쩌쩌쩌쩡!
도격이 공간을 울리는 벽력이 되어 염가동을 덮치는 순간.
“끼요옷!”
괴이한 기합과 함께 터져 나온 빛의 궤적이 벽력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