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염가동과 계면술법(01)
눈을 뜨니 햇빛이 따사롭게 내려쬐고 있었다.
“여기는?”
몸을 일으켜 주위를 돌아보았다. 앞으로는 망망대해가, 뒤로는 모래사장과 숲이 이어져 있다. 어딘가의 해변이다.
“일어났군.”
목소리가 울린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스물 중반으로 보이는 애송이, 내가 관리하던 절애도의 밀수 거점을 난장판으로 만든 그놈이었다.
“놈!”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지만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
“이걸 찾아?”
녀석이 내 칼을 들어보였다.
“어째서 정신을 잃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모양이군.”
녀석이 피식 실소를 흘리며 내 칼을 던졌다.
퍽!
칼이 내 발치에 거꾸로 꽂혔다.
“하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네?”
녀석이 허리춤 뒤에서 석 자 길이의 철곤 두 개를 꺼내 연결했다. 그리고 다시 단검을 꺼내 끼우니 일곱 자 길이의 철창이 되었다.
“도객이 아니었나?”
모래 바닥에 거꾸로 꽂힌 칼을 잡으며 물었다. 나는 녀석과 칼로 싸웠다.
“그야 보는 눈이 많으니 그랬지. 하지만 여기는 무인도거든.”
녀석이 창을 겨누며 말을 이었다.
“멸왜단의 이도연이다. 아직 너에 대해서는 보고하지 않았다. 그러니 나를 죽여 봐. 성공하면 산동의 염 씨 집안이 왜구의 앞잡이임이 드러나는 것은 피할 수 있을 거다.”
“무슨 개소리를!”
“몰락한 산동 태산파의 희망이라는 태산구성(泰山救星) 염진성의 숙부 아닌가? 몰락한 태산파의 속가제자인 염가동이 아니라 가흥부 흑도방파인 금선방의 ‘진자동’이라 우길 셈인가?”
어쩌다가 내 얼굴을 알아본 게 아니다. 내 거짓 신분은 물론이고 진성이가 내 혈족임을 알고 있다. 몰락한 태산파와 그 속가가 재기를 위해서 하고 있는 일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반드시 죽여야 할 놈이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승부한다.
“끼요옷!”
왜인 무사에게 배운 호거술(呼炬術)로 강기를 강화하며 그대로 달려든다.
봉선도의 절초가 상대의 전신을 난도한다.
쾅, 콰콰캉!
굉음과 함께 몸이 사정없이 뒤로 밀려났다.
“믿을 수 없다!”
발걸음이 멈춘 것은 오 장이나 밀려난 뒤다.
호거술로 강화된 도강은 어지간한 강기는 밀어낼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런데 젊은 놈이 가볍게 내지르는 창격에 이토록 밀리다니, 도대체 공력이 얼마나 대단하다는 거야!
“솔직히 이 짓도 지겨워.”
녀석이 투덜거리며 창끝으로 나를 겨눈다.
우우웅!
창두가 울음을 토하며 강기가 물방울처럼 맺혀 든다.
맑디맑은 빛을 뿌리는 영롱한 힘의 결정.
“환…강!”
조카 녀석과 또래처럼 보이는 놈이 환강을 다루는 천문위라니!
“본인이 네 녀석의 목을 들고 태산을 오르기를 바라는 건가?”
몰락한 본산에 천문위의 고수를 막을 만한 존장은 없다.
“아니면 네 행적과 함께 네 목을 황보세가에 넘겨주기를 원하는 거냐?”
그건 최악의 상황이다. 태산파가 몰락한 뒤 산동의 패권을 쥔 황보세가다. 태산파의 재기를 황보세가가 좋아할 리 없다.
같은 정파이기에 대놓고 밀어 버리지 못하고 뒷구멍으로 방해를 놓고 있는 게 황보세가다. 그런 황보세가에게 대놓고 태산파를 밀어 버릴 명분을 제공하겠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명분의 제공자가 여타의 이권 단체가 아닌 항왜의 기치를 내건 멸왜단이 되어 버리면 태산파는 황보세가의 수작으로 여론 몰이를 하기도 힘들어진다.
“머리가 나빠 보이지는 않는데? 계속 하겠다는 거냐?”
상대가 다시 투덜거렸다.
천문위의 고수라면 나를 격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니 애초에 창을 뽑기도 전에 죽일 수 있었다. 저 작자가 칼을 가져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을 잃고 있었으니 말이다.
즉시, 칼을 놓았다.
“내게 원하는 것이 있나?”
상대, 이도연에게 물었다.
“일단 질문부터 하지. 태산파가 몰락을 견디다 못해 단체로 정신 줄을 놓은 것이냐?”
엉뚱한 소리를…. 아, 왜구에 연관된 태산파의 다른 제자가 있는지 묻는 것인가?
“그럴 리가. 나 홀로다. 나도 금선방에 투신했을 뿐. 왜구와 관련될 줄은 몰랐다.”
왜구와 연관된 것은 자의가 아니었다고 항변해 보지만….
“그런 놈이 왜구의 무공을 배워서 써?”
“…….”
할 말이 없다.
“왜구와 밀수를 주도한 놈들, 가흥부의 흑도인 금선방이렸다?”
“금선방이 절애도의 거점을 만들고 왜구들을 들였지.”
순순히 답해 준다.
“십 년.”
이도연이 창두의 환강을 해제하며 말했다.
“딱 십 년만 내 말을 따르면 된다. 물론, 태산파와 그 속가에 피해가 될 짓은 시키지 않을 것을 약속하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그럼, 일단 금선방 놈들이 다시 왜구와 손을 잡지 못하도록 만들어.”
“금선방을 상대로 분탕질을 치라는 것인가? 왜구가 한 짓처럼 꾸며서?”
“그래, 이번 일로 원한을 품은 왜구의 칼잡이가 금선방을 상대로 화풀이를 한 것처럼!”
신기한 놈이다. 왜구 일로 나를 옭아 놓고, 나에게 증거를 없앨 기회를 준다.
내 눈초리를 보더니 씨익 미소를 짓는다.
“할 수 있으면 염가동, 아니 진자동의 얼굴을 아는 작자들을 없애 버리는 것도 좋지.”
내 생각을 읽은 듯한 소리다.
“십 년 동안 부려먹을 건데, 신뢰는 좀 쌓아야 되지 않겠어? 그리고…. @$%^&[email protected]!”
갑자기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일어났다. 격통에 숨이 멈추고 전신이 부들거린다.
“@&D!”
“하아, 하!”
격통이 끝나기 무섭게 숨을 몰아쉰다.
“일종의 금제가 걸려 있으니 알고 있으라고.”
빌어먹을.
“금제만 있는 건 아냐. 도움이 될 만한 것들도 있지.”
녀석이 밉살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
해 떨어지고 사방이 어둠에 물들자 시커먼 피풍의를 뒤집어쓰고 얼굴을 가린 다음 무인도를 나섰다.
망망대해에 떠 있지만 지금 내가 어디 있는지, 사포가 어느 방향인지 알 수 있다.
신기한 놈, 이도연이 나에게 가한 수작 때문이다.
‘계면술법(界面術法)’이란 기괴한 사술로 나와 매 한 마리를 연결 시켜 놓은 탓이다.
내 눈으로 보는 것 말고도 내 시야 한쪽으로 나와 계면술법으로 연결된 매의 시야가 보인다. 매는 내 머리 위 하늘을 높이 날고 있기에 그 시야가 막대하다. 그러니 내가 어디 있는지 주위가 어떤지 한눈에 들어오고 있다.
물론 매의 눈으로 보는 것들이 고스란히 전해지지는 않는다. 단순화 되어 대강의 지형과 움직이는 점으로 표시된다.
원하면 목표와 대강의 거리까지 표시된다. 뭍까지의 거리는 오 리 정도. 신기한 놈이 알려 준 대로 목혜를 만들어 신으니 등평도수를 펼치기가 훨씬 수월하다.
뭍에 올라서기 무섭게 사포 해변에 덩그러니 자리 잡은 금원산을 오른다. 사포를 바라보는 산자락에 자리 잡은 작은 사당 지붕에 등을 밝히고 접촉을 기다린다.
첫 번째 목표는 금선방의 사포 분타주다. 절애도 거점에 필요한 물자를 사들이는 곳이 사포 분타였으니, 분타주가 내 얼굴을 알 수밖에 없다.
지금 이곳, 금원산 자락의 사당도 평소 사포 분타와 접선하던 장소.
등을 올린 지 반 시진이 지나자 사포 분타가 위치한 지형에서 십여 개의 점들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의도적으로 내공을 조절하여 자연스레 일어나는 호신강기를 억제한다.
그러자 매의 시야로 보이는 것들이 명확해졌다. 십여 개의 점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변한다. 총 열셋. 그 중에 사포 분타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인터페이스!”
신기한 놈에게 들은 계면술법의 주문을 외우자 눈앞으로 매 대가리의 문양이 떠올랐다.
매 대가리의 문양을 두드리자 글자들이 주르륵 떠오른다. 그 중 위치 추적을 골라서 매의 시야 속에서 움직이는 사포 분타주와 그 일행들에게 하나씩 안겨준다.
이도연, 이가 놈에게 듣기로 이렇게 하면 놈들이 도망을 가도 매의 눈으로 찾기 쉽다나?
그렇게 대비를 한 다음 다시 주문을 외운다.
“오프.”
매 대가리의 문양이 사라진다. 억제시킨 내공을 자연스레 돌리자 다시 매의 시야가 단순해졌다.
일각쯤 흐르자 그들이 사당에 도착했다.
“안에 도주 계시오?”
“있소.”
내 대답에 사포 분타주와 그 일행들이 사당 안으로 들어왔다.
“도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멸왜단 놈들이 절애도에서 잡은 왜구라면서 백 개가 넘는 수급을 가흥부 부도 관아에 효수 했답니다. 가흥부에 그 정도 보낼 정도면 천 명이 넘게 죽었다는 말 아닙니까!”
사포 분타주가 내 얼굴을 보기 무섭게 물었다.
“내가 묻고 싶은 일이오. 도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했기에 멸왜단 놈들이 절애도로 몰려올 수 있단 말이오. 멸왜단주까지 직접 움직였는데, 그걸 몰랐다는 게 말이 되오?”
“총타에서도 그것 때문에 야단입니다. 피해 규모는 어느 정도 됩니까?”
이가 놈에게 듣기로 토벌이 끝난 지 칠 일은 지났다 들었다. 그런데 금선방 총타에서 피해 규모를 모른다?
대대적으로 소문이 난 탓에 절애도로 사람을 보내 조사하기 껄끄러운 것일 수도 있겠다.
“거래를 하는 세 가문, 열한 척의 왜선들이 들어와 있던 상태였소. 왜선들이 박살나고 한 명도 빠져나가지 못했소. 문제는 그렇게 죽은 자들 중에 며칠 뒤면 온다는 살마제일도(薩摩第一刀)의 아들이 있었다는 것이오. 가흥부에 피바람이 불 수 있소.”
“도주, 살마제일도가 누군데 그러오?”
“왜인들 땅에서 손꼽히는 칼잡이라 하오. 그 아들이라는 자의 실력이 나와 비슷했으니….”
내 말에 사포 분타주의 눈이 커졌다. 내가 초극 고수임을 아니 당연했다.
“이는 총타에 보고를 해야 할 상황이구려.”
“최대한 빨리 해야 하오. 고수를 맞이할 대비를 해야 하니.”
“도주, 일단 분타로 갑시다.”
사포 분타주와 함께 분타로 갔다.
거처로 안내되어 혼자가 되기 무섭게 내공을 억제한다.
대충 그려진 지도가 명확한 지형으로 바뀐다. 매가 내려다보는 것은 사포 분타의 전역. 여기저기 들어선 전각들 어디어디에 불이 들어왔고, 사람이 움직이는지 확실히 보였다.
“인터페이스.”
계면술법의 주문. 매 대가리의 문양을 건드려 전서구 포획을 누른다. 아니 누르기 전에 확실히 사냥이 아닌 포획임을 확인하고 눌렀다.
그리고 포획 대상의 출발 구역을 분타 전체로 설정해 준다.
“오프.”
술법을 끝내고 다시 내공을 회복 시켰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다.
톡톡.
창을 두드리는 소리. 침대에서 일어나 창을 여니 나와 계면술법으로 연결된 매가 전서구를 움켜쥔 채 들어왔다.
즉시 전서구의 발목에서 전서를 빼내 살폈다.
나에 대한 언급과 내가 꾸며낸 살마제일도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그 중 나에 대한 언급을 삭제한 내용으로 전서를 다시 작성했다.
전서구의 발목에 다시 전서를 집어넣자 매가 전서구를 잡은 발을 놓았다. 죽은 듯 있던 전서구가 날개를 잠시 퍼덕이더니 곧장 날아올랐다.
“인터페이스.”
매 대가리를 불러내서 시야 보정 활성화를 눌렀다.
그리고 창밖을 바라보니 전각과 몇몇 건물에 붉은 점들이 찍혔다.
피풍의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내 칼이 아닌 숨겨온 왜도를 꺼내 들었다.
이제 사포 분타에서 내 얼굴을 아는 자들을, 염가동 아니 절애도주 진자동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을 정리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