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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퍼 - 무공수확자-34화 (34/175)

34화

절강행(15)

멸왜단주에게 사지와 목숨만 붙여 놓으면 된다는 확답을 받고 이틀이 지나자 열둘의 애송이들이 몰려왔다.

검객이 일곱, 칼잡이가 다섯이다. 보타문 속가는 없었다.

“뇌응대에 온 것을 환영한다. 대주를 맡고 있는 이도연이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서로 안면을 터 나가려는 작업을 시작하려는데….

“초면에 말이 좀 짧네.”

바로 튀어나오는 불만의 목소리.

“그러게 말이오.”

거기에 동조하는 목소리.

“낭인이라 그런 거 아니오?”

하나 둘이 아니다.

“같잖은 대주 자리 하나 차지했다고 의기양양한 건가?”

비웃는 놈까지 있다.

“쯧, 이래 경우를 몰라서야.”

내 위아래를 훑으며 혀를 차는 놈.

“이거 도와주려고 와서 이런 대접을 받다니….”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흔드는 놈.

“그러게 말이오. 힘이 모자라 도움을 요청했으면 힘을 보태러 온 협객들을 대우는 못할망정….”

딱하다는 듯 쳐다보는 놈까지 있다. 이건 내 예상보다 더 하다.

내가 이상한 건가? 순간적으로 그렇게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전직 현무대의 반응을 보면 그건 아니다.

화인천은 이런 미친놈들 처음 본다는 눈초리다. 진혜예와 경철운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고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전신에서 슬금슬금 피어오르는 것은 살기.

하지만 세 사람 중 누구도 나서지 않는다. 대주인 나의 명이 없으니 가만히 있는 것이다.

“여기에 놀러 왔나?”

내가 애송이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왜구를 상대로 힘이 부친다기에 도와주러 왔소이다. 그리고 초면에 말이 좀 짧다 생각하오만?”

마지막으로 눈이 마주친 놈이 대꾸한다.

“존성대명이 어찌되시나?”

내가 이죽거리며 물었다.

“수창 구화장의 소장주인 ‘구천악’이라 하오.”

“엄주부 수창의 구화장?”

내가 신상명세서의 기록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렇소. 구화장의 소장주가 바로 이 몸이오.”

이제 자신을 잘 모시라는 듯 답한다. 내가 자신과 그 가문을 알아보고 기가 죽었다 생각하는 그런 얼굴이다.

눈치 더럽게 없다. 저 눈치로 강호로 나갔다가는 며칠 가지도 못해 죽을 듯하다.

“구화장에는 무인이, 무력 조직이 없나?”

“무슨 망언을….”

“궁금해서 그러지. 구화장에는 무력 조직이 없어?”

“구화장은 당당한 무림의 가문으로….”

“있다는 소리군. 그럼, 구화장의 무력 조직은 거기 수장이 조직의 일원들에게 공대를 하나? 반말을 하나?”

“경우가 다르오! 그들은 구화장에 인생을 맡긴 무인들이고, 본인을 비롯한 우리들은 어디까지나 멸왜단을 도와주러 온….”

“멸왜단 뇌응대 소속이 아니시라면 긴말 할 것 없지 않소? 구 공자. 지금 여기는 멸왜단 뇌응대의 신입들을 위한 자리요. 어디 가시는지 모르지만 여기 계실 분이 아닌 듯한데, 남의 일에 그만 끼어드시고 갈길 가시기를.”

원하는 대로 예의를 갖춰 준다.

“…….”

구천악은 내 말에 당장 할 말을 못 찾고 있었다. 그냥 갈 수 있을 리 없다. 집안에서 뇌응대에 꼭 붙어 있으라는 소리 정도는 듣고 왔을 테니 말이다.

“대주, 우리는 뇌응대의 일원인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오. 이 대주도 아시겠지만, 우리들은 모두 절정 무인이지 않소. 전장에서 스스로를 책임질 줄 아는 실력자들끼리 서로 간섭할 게….”

빠악!

둔탁한 소리와 함께 구천악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도대체, 무슨 짓이오!”

구천악이 내게 기습적으로 쥐어 박힌 머리통을 부여잡고 노성을 내질렀다.

“전장에서 스스로를 책임져? 이런 뻔한 기습 하나 못 막으면서?”

내가 이죽거렸다.

“뭐 이런….”

구천악의 눈에 노기가 서리는 순간 내가 움직였다.

빠악!

“또 맞네? 실력자라며?”

빠악!

손을 멈추지 않는다. 타격 순간 공력을 빼기에 얼마간의 고통은 있지만, 다만 그뿐인 공격이다.

“감히, 이 몸을! 구화장의 소장주인 본인을!”

구천악이 발작적으로 권각을 내뻗었지만 내 손을 막을 수 없다.

빡, 빠빡!

주먹이 날아오면 손목을, 발이 날아오면 발목을 후려쳐서 공격의 맥을 끊고 중심을 잃게 만든 다음 머리통을 후려친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구천악이 이를 갈며 검을 뽑았다.

펑!

폭음과 함께 구천악의 신형이 뒤로 튕겨 나갔다. 손으로 머리통을 후려친 게 아니라 발로 배를 후려 찬 것이다.

“너는 더 이상 볼 게 없네.”

이번에는 공력을 거두지 않은 탓에 구천악은 바닥에 널브러져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협객이라는 분들이 같이 온 일행이 저 꼴이 됐는데 구경만 하다니. 참, 대단한 가르침을 받았나보군.”

광역 도발에 녀석들의 얼굴이 죄다 일그러진다.

“지금 본인들의 사문을 싸잡아 모욕하는 건가?”

한 녀석이 분을 삼키며 물었다. 신상명세서에 의하면 강산방 소방주인 ‘고장명’이라는 녀석이다.

“시작은 너희 애송이들이 먼저 했지. 낭인 운운하면서 말이야. 웃기더군. 같이 절정이라 불린다고 다 같은 절정이 아님은 절정의 존장들을 둔 너희들이 더 잘 알 텐데?”

“너 따위가 감히 사부님을 평가해!”

고장명이 칼을 빼들고 덤벼들었다. 도기가 충실히 그 존재감을 발하고 있지만 그래봐야 애송이다.

캉!

일도양단의 기세로 내려 긋는 도격을 칼을 올려쳐 맞받으며 걷어내는 동시에.

쾅!

어깨로 녀석의 몸통을 들이박아 구천악의 곁으로 날려 버린다.

“낭인을 우습게 보는 협객들의 실력 한번 보자!”

그리고 열 명의 애송이들을 향해 내달렸다.

퍽!

첫 번째 애송이는 미쳐 무기도 뽑기 전에 나에게 걷어차여 구천악을 향해 날아갔다.

카캉!

두 번째 애송이는 어떻게 무기를 뽑아 들었지만 그뿐이다. 힘주어 후려친 두 번의 도격을 견디지 못하고 무기를 놓쳤다.

퍽!

그리고 첫 번째 애송이 뒤를 따랐다.

“미친!”

“무슨 짓이오!”

애송이들이 각기 무기를 뽑아 들고 물러난다.

경험 없는 표가 확 난다. 각자 자신의 무공을 발휘하기 위한 공간을 확보하고 있었다. 강자를 상대로 뭉쳐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멀찍이 떨어진 모양새.

‘각개격파 해주세요.’ 하고 청원을 하는데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

제일 가까운 놈을 향해 발을 놀렸다.

“타아압!”

제법 매서운 도기로 대응을 하지만 그뿐이다. 리퍼로 각성하기 전의 나라도 어렵지 않게 이길 수준이다.

캉!

들어오는 도격을 큰 칼놀림으로 튕겨 내며 빈손으로 가슴을 후려친다.

퍽!

가슴을 후린 손을 바로 위로 뻗어 목을 잡는다. 그리고 뻗어 있는 넷을 향해 집어던졌다.

“타합!”

“핫!”

가까이 있던 두 녀석이 치고 들어왔다.

왼쪽은 검기가, 오른쪽은 도기가 들이닥친다. 뒤로 크게 한 발 물러나자 서로를 마주보게 된 녀석들이 바로 무기를 거두며 어깨를 맞댄다.

“하!”

그런 두 녀석을 향해 돌진.

카카캉, 카캉!

검기와 도기가 난립하며 금속성이 연달아 터진다.

녀석들은 절정의 무인. 하지만 이렇다 할 실전을 겪어 보지 못한데다가 협공의 경험도 없다.

긍정단련으로 개인의 무력만 들입다 높인 애송이. 틈을 보이면 서로 달려들려다 서로의 동선이 겹친다. 서로 지켜주기는커녕 서로 방해하기 일쑤고, 주위를 안 보고 칼과 검을 휘두르다가 저희들끼리 얽히기도 한다.

그렇게 드러나는 빈틈은 진짜 그냥 지나가기 민망할 지경이다.

퍽, 퍼퍽, 퍽!

타격음이 연달아 터지며 순식간에 둘의 신형이 구천악과 고장명의 곁으로 날아간다.

“포위해!”

“너무 붙지 말고 간격을 벌려!”

다섯 명으로 인원이 팍 줄어들어서야 어설프게나마 협공을 흉내 내려 한다.

하지만 내가 어설픈 협공에 당해줄 리 없다.

캉!

속도와 힘으로 치고 나와 전면을 막아서는 놈을 젖히고 포위망을 벗어난다.

카캉! 퍽!

그리고 그렇게 벗어나는 김에 젖힌 놈을 걷어차서 날려 준다.

다섯 명이 네 명이 된다. 그렇게 발을 움직이면서 포위망을 농락하며 칼질과 발질을 하니, 숨 몇 번 쉴 시간이 지나자 나에게 한 번씩 걷어차인 열두 애송이들이 한데 뭉쳐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화 부대주, 준비한 거 가져오게.”

“대주, 그거 진짜로 하실 생각입니까?”

내 말에 화인천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래. 가져와.”

내가 재촉하자 화인천은 한숨을 쉬며 준비된 것들을 내 앞에 펼쳤다. 열두 개의 두루마리다.

잘 갈린 먹을 듬뿍 먹인 붓을 들고 일필휘지(一筆揮之)로 두루마리들을 채운다.

그렇게 열두 개의 두루마리를 다 쓴 후 애송이들에게 다가갔다.

“구천악, 너부터 하자.”

구천악의 뒷덜미를 잡고 끌고 간다.

“무슨….”

간신히 상체를 일으킨 구천악이다. 팔다리에 힘이 들어오지 않는 상태니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내가 끄는 대로 끌려왔다.

“구천악이 어디 있더라?”

펼쳐진 열두 개의 두루마리 중 구천악의 것을 찾았다.

“자, 내용 확인하시고.”

구천악의 눈앞에 두루마리를 펼쳐들어 거기에 적힌 내용을 보여줬다.

“이, 이건….”

구천악이 눈을 부릅떴다. 당연했다. 오늘 구천악이 행한 행실에 대해 모두 적혀 있었고, 그 행실에 상응하는 죄목 또한 적혀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사실임을 인정하는 자백서다. 아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이런 내용은 항상 마지막 줄이 중요하다.

<나 구천악은 본가인 구화장에서 배운 바로 행했기에 위 행위에 대해 한 점 부끄러움 없음을 천명한다.>

자백서에 줄줄이 적힌 행동이 잘못이라면 모든 것은 잘못 가르친 가문 탓이지 내 잘못은 눈곱만큼도 없다는 소리다.

“자, 다 읽었으면 수결해야지.”

구천악의 완맥을 제압하고 오른손에 인주를 바른다.

“이런 엉터리 문서에 수결할 수 없다!”

구천악이 악을 쓴다. 당연하다. 저건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짓이다. 아니 모든 책임을 가문에 떠넘기는 짓이다.

이딴 문서에 수결을 하게 된다면, 이 문서가 공개된다면 가문의 모든 사람들이 이 수결의 주인을 어떻게 볼 것인지 뻔하다.

“뭐가 엉터리라는 거야? 오늘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행동했잖아. 잘못 없다며? 그렇게 배워서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집안사람들이 봐도 문제없잖아.”

“나는 못한다! 못해!”

완맥이 제압당한 구천악의 저항은 미미할 수밖에 없다. 구천악의 오른손 손톱 끝에 내 오른손을 겹치고 손가락 끝마디를 손톱 끝에 걸쳐 당긴다.

“안 돼! 그만! 제발!”

구천악의 오른손이 쫘악 펴지고 준비된 두루마리에 그 수결이 선명하게 찍혔다.

“자, 다음은 고장명.”

구천악을 옆으로 던져 버리고 다음 희생자를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나, 나는 이런 소리 한적 없소. 대부분이 구 소협이 한 소리 아니오!”

고장명이 사색이 된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수결 당사자 이름만 다르지 두루마리의 내용은 구천악과 똑같은 것이다.

“구천악이 열심히 말할 때 뒤에서 고개 끄덕이며 쳐다보고 있었잖아? 그 말에 동의한다는 거 아니었어?”

“아니오!”

“내 눈에는 그랬어.”

그렇게 열두 명의 애송이들은 열두 개의 두루마리에 자신의 수결을 남겨야 했다.

“대주인 내가 보관하고 있겠다. 내가 이걸 당사자의 가문이나 문파에 보낼 일이 없었으면 한다.”

그렇게 애송이들에게 으름장을 놓고는 해산시켰다.

“야, 괜찮겠어? 분명 야밤에 찾아올 녀석들이 있을 텐데?”

경철운이 조용히 물었다.

“훈련 열심히 받겠네.”

히죽 하고 웃어 준다. 나를 상대하는데 혼자서는 안 된다는 정도는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면 서로 힘을 합쳐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 당장 협공에 대한 기본을 배우려면 뇌응대의 훈련을 열심히 받는 수밖에 없다.

물론 아무 대책이 없지는 않다.

= 열둘 다 감시 대상으로 등록했지?

- 예, 리퍼. 감시 대상의 오른손에 주입된 위치 추적 장치 모두 정상 가동 중입니다.

내가 괜히 사내새끼들 손을 잡았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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