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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퍼 - 무공수확자-41화 (41/175)

41화

절강행(22)

“네놈들이 누구며, 어디서 왜 왔는지 털어놓아라.”

평현이 셋을 쏘아보며 외쳤다.

“묻는 말은 듣지도 않는 분에게 우리가 대답해야 하는 이유라도 있소?”

품(品) 자 형태로 서 있는 세 낭인 중 선두의 낭인이 평현의 말을 받았다.

“답을 하지 않겠다면 답을 하게 만들어 주지.”

평현의 손이 허리춤의 칼자루로 향했다. 객잔을 포위하고 있던 항주 흑도의 초극 고수들도 모습을 드러내어 세 낭인을 압박했다.

“항주 흑도의 실력을 한번 봅시다.”

선두의 낭인이 이죽거리며 기세를 끌어올린다.

“경 형님, 우리가 항주 흑도와 싸우려고 여기 왔습니까?”

좌측의 낭인이 일행을 말렸다.

“그럼, 청 아우는 어쩌자는 건가?”

“말로 풀 수 있을 때 말로 풀어야지요.”

“흠, 그럼 아우가 이야기하게.”

선두의 낭인, ‘경’이라 불린 자의 말에 ‘청’이라는 낭인이 앞으로 나섰다.

“우리 형제들은 육가장에서 온 사람들이오!”

젠장,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가.

“육가장의 사람?”

평현의 얼굴이 구겨졌다. 항주 흑도가 연합체가 되어 한몸처럼 움직이게 된 시초가 육가장이었다.

소주에 만족하지 못하고 항주마저 수중에 넣으려는 수작질을 펼치니 이에 대응하기 위해 뭉쳤던 것이 이제 항주 흑도의 전통이 된 것이다.

“태호에서 빌어먹을 놈들이 항주에서 뭘 뜯어먹겠다고 내려온 것이냐?”

“항주 흑도와 마찰을 일으킬 생각은 없소. 우린 단지 육가장의 솔하(率下)인 금선방 핵심 인사들을 살해한 흉적, 살마제일도를 쫓고 있을 뿐이오.”

망할 새끼들 핑계도 좋다. 가흥부 흑도를, 금선방을 휘저었던 살마제일도의 정체를 아는 나다.

볼 것도 없다. 항주에서 살마제일도의 이름으로 벌어진 살인은 육가장 놈들의 수작질이 분명했다.

“빠져나가기 위해 수작질 부리는 건가?”

뇌운루 최상층에서 육가장 놈들의 수작질을 지켜보던 공청완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육가장과 사이가 좋지 않은 우리 아닙니까? 육가장을 입에 올린다면 우리가 쉬이 믿지 못할 것을 알 텐데, 저러는 것이 이상하군요.”

조구흥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빠져나갈 길이 없으니 육가장의 이름으로 겁을 주겠다는 것 아닌가. 평가 저 친구라도 주춤할 수밖에 없지. 명확한 증거 없이 지금 저놈들을 때려잡으면 육가장과 전쟁하자는 소리 밖에 안 되니. 보는 눈들이 없으면 때려죽이고 모른 척 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보는 눈이 너무 많아.”

포구의 오가는 사람들을 통제하거나 물리지 않은 상황이다. 주변 상황이 급변하면 포위를 미리 눈치 채고 도주할 수도 있으니 한 조처였는데….

“전쟁 못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해도 지금은 아니지. 오 년쯤 뒤에 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지.”

그러면서 나를 슬쩍 보는 공청완이다. 멸왜단에 매가 보급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일어날 변화를, 멸왜단의 무림 방파화를 염두에 두고 있는 모양새였다.

“네놈들이 살마제일도의 이름으로 살겁을 저지른 것이 아니냐?”

평현의 외침이다.

“우리를 이렇게 찾아냈으니 그동안 우리의 행적을 아실 것 아니오.”

청이란 놈이 반박한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놈들을 찾아냈다면,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항주 흑도에서는 나를 통해 놈들을 찾아냈으니 놈들의 지난 행적을 알 리 없다. 그렇다고 그걸 티낼 필요도 없다.

“항주의 흑도나 우리 육가장이나 쫓는 건 살마제일도 그놈 아니오. 서로 협조는 못할망정 방해는 하지 맙시다.”

“네놈들이 살겁의 원흉이 아님을 어찌 믿느냐!”

평현의 외침.

“하아!”

“아, 평 형님!”

“아이고 평가야!”

뇌운루 칠 층에서 탄식이 흐른다. 놈들의 수작질에 말려 들어가는 소리 아닌가.

“이러면 믿으시겠소?”

‘청’이라는 놈이 자신의 칼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청 아우, 이게 무슨 짓인가?”

‘경’이라는 놈이 그 모습에 기겁을 한다.

“여기서 우리가 항주 흑도와 칼부림을 하면 살마제일도, 그 찢어 죽일 놈만 웃게 됩니다.”

그놈의 단호한 말에 ‘경’이라는 놈이 인상을 구기더니 ‘청’이 내려놓은 칼 옆에 자신의 칼을 놓았다.

그러자 남은 한 명도 따라 칼을 놓았다.

“항주 흑도에 우리 신원을 맡기겠소. 우리가 살마제일도인지 아닌지 마음껏 조사해 보시오.”

‘청’이라는 놈이 자신의 양손을 내밀며 말하자, 다른 두 낭인도 어서 잡아가 보라는 듯 두 손을 내밀었다.

평현은 그들의 혈도를 제압한 뒤 양손을 묶었다.

“두 분이 보기에도 육가장 놈들이 노린 것이겠지요?”

누각 아래의 광경에 내가 인상을 구기며 물었다. 놈들을 풀어놓고 움직였을 때 덮치거나 접촉자들을 추적하면 그뿐일 일이 골치 아프게 변했다.

“아마 저 셋 말고 더 있을 것이 분명하네.”

“살마제일도의 행보를 재현하려면 최소한 초극 하나는 더 있겠지.”

조구흥의 말에 공청완이 말을 보탰다.

고래로부터 범인이 아님을 증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있다.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다. 그 뒤로 다시 범행이 일어나면 스스로를 가둔 자는 자신의 결백을 내세울 수 있는 것이다.

공범과 모방 범죄라는 개념이 널리 퍼지지 않았을 때나 통용되는 이야기다. 그러니 내가 서 있는 중원 무림에서는 아직 통용되는 이야기다.

어쨌든 당장 저 셋을 죽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되었다.

= 유전자 분석 가능해?

- 혈액이나 체액 머리카락 등의 유기물이 있으면 가능합니다.

“살마제일도에게 당한 셋의 시신을 볼 수 있을까요?”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은 해놓는 것이 좋다.

***

셋의 시신은 항주 관부에서 관리하는 빙고(氷庫)에 보관되어 있었다.

머리카락을 하나씩 뽑았다. 그리고 차례대로 입에 문다. 죽은 사람 머리카락을 입에 무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할 일은 해야 하는 거다.

= 유전자 분석해서 등록해. 순서대로 유적향, 백민, 구홍일.

손가락을 움직여 머리카락의 주인들 이름을 기록한다.

- 예, 리퍼.

대답과 동시에 농꾼 녀석이 일하는 표를 요란하게 냈다.

“머리카락으로 뭘 하려는 것인가?”

조구흥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일 돌아가는 모양새가 육가장 놈들의 수작이 분명하지만 혹시나 모를 일 아닙니까? 그래서 확신을 얻기 위해 조사를 하는 겁니다.”

내 대답에 노인네 둘의 눈이 묘하게 변했다. 딱 봐도 ‘또 무슨 신기한 짓을 하는구나!’ 하는 눈초리다.

“평 노선배님은 어디 계십니까?”

“평 형님은 놈들을 데리고 화선방(華船幇)으로 가셨네.”

조구흥이 답했다. 화선방은 평현의 본거지였다.

“놈들도 그쪽에 있습니까?”

“그렇겠지.”

“화선방으로 가지요.”

조구흥이 앞장서고 나와 공청완이 뒤따랐다.

화선방은 서호가 내려다보이는 구릉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름 그대로 서호에 띄우는 모든 꽃배를 총괄하는 곳이다.

“바로 올 줄 알았는데 늦었군.”

평현이 우리를 맞이했다.

“놈들은 어디 있습니까?”

“지하 석실에 가둬 뒀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놈들이 한 짓이 아니라 생각하는가?”

내 말에 대답한 뒤 평현이 물었다.

“육가장 놈들이 한 짓이 맞는지 확인을 해야지요. 놈들이 내놓은 무기를 볼 수 있겠습니까?”

“놈들이 아니라 무기를?”

평현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제가 괜히 놈들과 얼굴 맞댈 필요 없지 않습니까?”

나에 대해 알게 되면 손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 육가장의 입장이다. 그러니 나는 육가장에 노출되지 않는 것이 좋다.

평현이 수하를 부려 놈들의 칼을 가져오도록 했다.

나는 일단 칼자루를 잡고 칼을 뽑았다. 별 장식이 없는 일반적인 칼로 보였지만, 초극 고수가 쓰는 칼답게 질이 상당히 좋았다.

관리를 잘 했는지 피가 묻은 흔적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이럴 때는 별 수 없다.

= 농꾼, 검사 확실히 해라.

그렇게 당부를 하며 칼날에 혀를 대고 스윽 핥았다.

눈앞으로 그래프가 요동친다. 잠시 눈을 감고 있자 결과가 나왔다.

- 백민과 구홍일의 유전자가 검출되었습니다.

이놈들이 살마제일도의 흉내를 냈다는 것이 확실해지는 순간이다.

“이 칼에 백민과 구홍일의 피가 남아 있군요.”

“뭐?”

내 말에 평현의 눈이 커졌다.

나는 두 번째 칼을 핥고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농꾼의 분석이 나왔다.

“이 칼에는 유적향의 피가 가장 짙습니다. 백민의 피도 있고요.”

내가 눈을 뜨고 말하자 노친네들이 기괴한 것을 봤다는 눈이 되었다.

하는 김에 세 번째 칼도 핥는다.

“이 놈은 견제만 했나? 셋의 피 맛이 안 나는군요.”

“도대체 그것을 어떻게 아는 건가?”

평현이 물었다.

“의술을 공부하다 보니 피라고 다 같은 피가 아님을 알 수 있었지요. 크게 몇 개로 나눌 수 있고…. 간단히 말해서 사람마다 특정한 피 맛이 있습니다.”

유전자니 DNA니 해봐야 이 시대 사람들이 알아들을 것도 아니고, 나도 잘 모르는 것들인지라 그렇게 대충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할 수밖에 없다.

“확실한 건가?”

평현이 눈을 이글거리며 물었다.

“시험을 해보셔도 좋습니다. 일단 머리카락 하나씩만 뽑아 주시겠습니까?”

공청완과 조구흥은 질색한 표정이었지만, 평현은 바로 하나를 뽑아 줬다.

“피는 몇 방울이면 됩니다. 평 노선배의 피와 다른 사람들 것을 섞어서 가져오시면 평 노선배의 피를 찾아내지요.”

그렇게 말하며 평현의 머리카락 모근 쪽을 입에 물었다.

- 리퍼, 평현이 백민의 친부일 확률이 99.8%입니다.

젠장, 그냥 제자가 아니었다는 소리잖아.

“그리고, 이 방법으로 자식과 손자까지 구분할 수 있습니다.”

빠드득!

내 말에 평현이 이를 부서져라 갈았다.

“더 볼 것도 없군. 저 세 놈들이 확실하다는 것이지?”

내가 이 말을 꺼낸 의미를 눈치 챈 것이다.

“죽일 놈들! 당장 놈들의 목을 따세.”

“놈들이 했다는 물증까지 있는 마당에 미적거릴 이유가 없지요.”

공청완과 조구흥, 두 노인의 말에 살기가 가득 담겼다.

“그만!”

당장 놈들의 목을 따러 가겠다는 둘을 평현이 말렸다.

“지금 놈들의 목을 따면 육가장 놈들이 명분을 쥘 수밖에 없어.”

평현이 둘을 보며 하는 말이다.

“우리에겐 놈들이 일을 벌였다는 물증이 있지 않습니까?”

조구흥이 세 자루 칼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방법을 쓸 수 있는 의원이 몇 명 더 있다면 저 칼들은 물증이 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중원 천지에 이 방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저와 제 스승, 둘 뿐입니다.”

아니 수확 대상자들은 다 쓸 수 있다. 그들에게 유전자에 대한 개념을 박아 넣고 나노 머신의 통제권만 쥐어 준다면 말이다. 하지만 나노 머신의 통제권을 내어 주는 그런 위험한 짓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

“자네 신분이 문제로군.”

공청완이 인상을 썼다.

유전자 검사 자체가 이 시대에 통용되는 방법이 아닌데다가 나는 멸왜단의 뇌응대주다. 항주 흑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세력의 인물인 것이다.

친 항주 흑도의 인사인 나만이 사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시대에 통용되지 않는 방법으로 물증을 들이밀어 봐야 세상이 받아들일 리 없다.

방법이 확실하다는 것은 검증할 수 있다. 이 자리에서처럼 시연해보이면 되니깐.

하지만 육가장은 내 신분을 문제 삼아 나란 인물 자체의 의견을 믿을 수 없다 해버리면 그뿐이다.

거기다가 육가장은 명분을 쥐고 있다.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항주 흑도에게 신원을 맡겼다는….

- 리퍼, 응1의 감시망에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농꾼의 보고가 생각을 끊었다.

- 문제의 삼 인이 머물던 객잔 방에 초극 고수가 포착되었습니다.

초극 고수가 머물 수준이 아닌 방에 초극 고수들이 머물고, 바로 그 다음 손님으로 다른 초극 고수가 들어올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저건 놈들과 약속된 움직임으로 밖에 볼 수 없다. 뭔가 지령을 남겼을 것이고, 그걸 보고 상황 판단을 하고 남은 자가 움직일 것이다.

아마 놈들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한 수작질을 시작하지 않을까?

“일이 쉬워지겠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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