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절강행(25)
멸왜단이 보낸 매들은 따로 훈련시킬 필요 없었다. 공방에서 미리 제작해 놓은 나노 머신들을 먹였으니 말이다.
응 시리즈처럼 다양한 능력이 부여되지는 않았다.
그저 멸왜단이 왜구를 막아내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기능만이 부여된 정도.
어쨌든 그렇게 열 마리의 새로운 매들이 투입되자 응 시리즈는 죄다 불러들일 수 있었다. 뭐 공식적으로 응 시리즈는 여전히 절강 바다 위를 날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열 마리의 매를 받아들인 탓에 개인 시간이 많아졌다. 매들을 훈련시킨다는 명목으로 주어지는 시간들이다.
거기에 선수금으로 받은 소환단도 좋은 핑계가 됐다. 영약을 얻었으니 그걸 섭취하고 소화시킬 시간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농꾼, 다른 방법은 없냐?”
- 지금 가진 영약으로 초극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농꾼 녀석의 대답이다. 지금 내가 가진 영약은 소환단 일곱 개, 소청단과 자령단 세 개씩이다.
소환단 열 개를 받기 무섭게 각 종류 별로 한 알씩 따로 섭취했다. 농꾼이 세 가지 영약의 약효를 파악했고, 닷새 후 다시 종류별로 한 알씩 한꺼번에 먹었다.
그렇게 얻은 데이터로 지금 가진 영약으로 초극에 도전할 수 있는 방법이 나온 것이다.
“그냥 나노 머신으로 감싸서 위를 통과하면 되는 일 아냐?”
- 마*카*원 알파의 숙주가 초극으로 들어서던 상태를 재현하기 위해서는 체내의 모든 나노 머신들을 동원해야 합니다. 열셋이나 되는 영단의 표면을 위액으로부터 보호할 수량의 나노 머신들이 제외된다면 안정적인 작업이 불가합니다.
젠장!
“야, 그냥 수액으로는 안 되는 거야? 처음 계획은 그거였잖아. 수액으로 만들어 혈관 투여!”
- 혈관 투여를 위해 가공된 소환단 수액으로 공력을 얻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만?
소환단 하나를 수액으로 제작해 혈관 투여를 하긴 했다. 수액으로 변형되는 과정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지만 약빨을, 공력의 변화를 느낄 수가 없었다. 영약이 가진 기운을 잃은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좌약은….”
- 직장 투여는 위장을 거치는 것보다 약효가 강할 뿐만 아니라 신체의 부담도 적습니다. 현재 가진 영약으로 초극에 이르는 방법은 직장 투여뿐입니다.
농꾼의 계산상 위장 투여로는 쉰 개 이상의 소환단이 필요했다. 그것도 중복 섭취로 떨어지는 약빨을 고려하지 않은 계산.
“씨발!”
소환단을 다 받아낸다 해도 경구 섭취로는 초극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없는 것이다.
대환단이나 태청단 같은 최상의 영약을 구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 눈 딱 감고 좌약을, 직장 투여를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초극이 못 되면 수확이고 지랄이고 때려치운다.”
엉덩이를 까고 소환단 일곱, 자령단과 소청단 셋씩, 총 열셋의 영약들을 뒤로 밀어 넣었다.
익숙하지 않은 통증도 통증이지만, 전립선 자극으로 괜한 것이 고개를 쳐드는 탓에 기분이 뭣 같아진다.
그렇게 영약을 밀어 넣고 바지를 입었다. 가부좌를 트니 뒤로 넣은 것들이 직장 안에서 꿈틀거리며 삐져나오려는 느낌에 뒷구멍에 잔뜩 힘을 줘야 했다.
“흐으, 흐.”
호흡을 조절하고 공력을 일으켜 일주천을 시작하자!
끄으윽!
뭔가 강렬한 기운이 척추를 움켜잡고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세 종류의 영약, 열셋의 수량이 만들어 내는 약발은 강력하기 그지없다.
- 상태 재현에 들어갑니다.
농꾼 녀석의 보고.
모든 정신을 약발 받아 묵직하기 그지없는 공력을 움직이는 데 집중한다.
***
“어떻게 된 거지?”
눈을 뜨기 무섭게 물었다.
운기를 하다 일순간 기억이 끊어졌고, 지금 간신히 정신을 차린 것이다.
- 리퍼, 외부와의 모든 연결이 끊어졌습니다. 연결을 위해 통신 모드를 음파 통신으로 전환하시겠습니까?
농꾼 녀석의 말이다.
“그래.”
- 지금부터 모든 연결은 응 시리즈를 경유하게 됩니다. 음파 통신의 한계로 실시간 정보의 화질과 음질이 제한됩니다.
통신 제한이 생겼다는 것은 내 몸에 호신강기가 생성되었다는 소리다. 그 말인 즉, 내가 초극에 이르는데 성공했다는 소리다.
“얼마나 지났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 직장 투여 후 6,734분 29초 경과 했습니다.
대강 112시간, 4일 지나서 5일째라는 거군.
“연구소와의 연결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내 체내에 있는 농꾼과 직통으로 연결된 곳이 21세기의 연구소다. 호신강기 때문에 그 연결이 끊어졌을 수도 있기에 묻는다.
21세기 현대와 이쪽을 잇는 게이트가 양방향이 아닌 탓에 일어나는 일이다. 무림에서 보낸 신호는 21세기에서 언제든 수신할 수 있지만, 21세기에서 보낸 신호를 이쪽에서 수신할 수 있는 것은 게이트가 불안정해져 방향성이 바뀌는 단 몇 분뿐이라나?
그러니 몇 개월에 한 번 정해진 시간 말고는 연락을 받지 못 하는 것이 현실. 그러니 데이터가 제대로 발신되는지는 내가 확인해야 하는 일이다.
- 상태 재현에 들어서기 전에 초극에 도전한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공방에서 연구소와의 통신 모듈 제작에 들어간 상태입니다. 연구소와의 접속은 5일 뒤에 재개됩니다.
이미 관련 소식을 전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는 말이다.
“그래.”
걱정은 젖혀 두고 지금 내 상태를 확인한다.
왼손을 철 이온으로 코팅하면서 낭파조의 한 수를 펼쳐 본다.
검게 코팅 된 손에 묵직한 힘이 실리는가 싶더니 자연스레 퍼런빛을 발하고 있다.
강기다! 전압을 건 것도 아니요, 스피커를 만들어 호거술을 펼친 것도 아닌데, 자연스레 강기가 형성되고 있다.
“양손 장심에 스피커.”
오른손마저 검게 물든다. 성대와 연결된 염천혈에서 양손의 스피커까지 철 이온으로 만들어지는 임시 기맥이 만들어진다.
“호거술은 염가동 데이터를 활용.”
내 말에 농꾼이 움직인다. 염가동의 데이터에 따라 농꾼이 신체를 조작하고, 나는 그 인도에 따라 운기를 한다.
호거술의 운기 경로를 돌아 변형된 공력이 염천혈에서 성대가 아닌 임시 기맥을 타고 스피커까지 내달렸다.
오올!
성대의 울림이 아닌 스피커의 진동을 타고 내뻗는 기운이 양손에 맺힌 낭파조의 공력과 버물어진다.
우우웅!
양손을 물들인 푸르른 빛이 스피커가 토해내는 음파를 타고 넘실거린다.
“내게 맞는 음역대를 찾자고.”
몸에 힘이 넘쳐흐르고 있다. 그 힘이 펌프가 되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슴 한켠에 불어넣고 있었다.
***
뭐든지 할 수 있기는 개뿔! 약 빨로 충만해진 자신감이 바람 빠진 타이어처럼 쪼그라드는 데는 반나절이면 충분했다.
“크윽!”
욱신거리다 못해 후들거리는 전신을 의지로 부여잡는다. 그대로 쓰러지려는 몸을 간신히 자리에 앉힌다.
“아무리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는 하지만 대단하군. 도저히 갓 초극이 된 사람의 실력으로는 볼 수 없을 정도야.”
진우탁이 널브러지듯 주저앉은 나를 바라보며 감탄을 하고 있었다.
저 망할 인간의 주둥이를 한 대 쥐어박고 싶다.
대단은 개뿔! 창도 아닌 목봉으로 상대했으면서!
그것도 강기를 일으키지도 않고!
“지금 자네라면 멸왜단 전체를 통틀어 한 손 안에 충분히 들겠어. 자네 나이 대에 자네에게 비벼 볼 만한 실력은 절강 전체를 털어도 몇 안 될 걸세. 신하 분타의 호장우를 비롯해서…. 그러고 보니 자네는 다 알고 있겠군. 죄다 자네가 넘긴 명단 안에 있는 애들이니.”
진우탁이 히죽 웃으며 내 무위를 평가했다.
약 기운에 정신이 나간 거지. 수확 대상자의 무위는 최소 초극. 나는 이제 간신히 그들 앞에 설 자격을 얻었을 뿐이다.
그런데 주제도 모르고 천문위에게 엉겼으니….
“천문위를 상대로 경험을 쌓는 것은 상당히 얻기 힘든 기회이지.”
그 말대로다. 거기에 또 하나의 속셈도 있다. 천문위의 전투 감각을 얻기 위한 수작이다.
초극이 된 몸으로도 천문위의 데이터를 재생시키면 몸이 견디지 못한다. 죄다 천문위의 평시 공력 운용이 지랄 같기 때문이다. 그러니 천문위가 공력을 억제한 상태의 데이터를 얻으면 될 일 아닌가 하고 대련을 부탁한 것이다.
어쨌든 진우탁과의 대련은 내가 얻을 것이 상당하기에 공짜가 아니다. 대련 세 번에 소환단 하나를 주기로 했다. 물론, 후불이다.
진우탁에게 별 필요 없는 것이 소환단이지만, 그에게는 챙겨야 할 수하들이 많다.
“하지만 자네와 나 사이 아닌가. 그러니, 소환단보다는….”
진우탁은 소환단보다 응 시리즈의 대여를 원하지만 말이다.
“그냥 멸왜단과 계약 파기하고 딴 데 갈까요?”
멸왜단에서 명성 쌓기를 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진우탁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서 하는 소리일 뿐이다.
“끄응!”
하지만 진우탁 입장에서는 무시하기 힘든 소리다.
항주 흑도에 응7을, 매를 대여해준 대가로 받은 거금이 내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니 돈이 모자라면 항주 흑도에서 대여료를 당겨 받는 수도 있다. 거기다가 이미 초극 고수가 된 상황이니 남은 소환단에 딱히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 그가 아는 내 입장이다.
“그나저나 뇌응대의 이전은 어떻게 된 겁니까?”
절강 전역으로 움직이기에는 영파 부도에 위치한 총타는 좋은 위치가 아니었다.
“뇌응대가 절강 전역을 도맡는 것은 한시적인 일 아닌가? 훈련이 끝나면 지역별로 매들이 분배될 테니 말일세.”
“그건 그렇지요.”
“창국 분타에서는 단주 직속의 뇌응대가 들어오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지리적으로 볼 때 창국 분타에 매를 배치 안 할 수 없다. 그런데 단주 직속의 뇌응대가 들어앉아 버리면 창국 분타에 와야 할 매의 운영권이 뇌응대에 넘어갈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아니 다른 분타들은 매를 활용할 타격대를 만들 수 있는데 뇌응대가 있으면 그걸 만들 수 없는 것이다.
“매의 훈련은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매가 분배되고 성과를 낸 이후를 생각하고 있군요.”
“어쩔 수 없지. 솔직히 자네 매들이 너무 사기 아닌가. 새로 훈련된 매들이 제 역할을 해준다면 몇 해 안에 절강 땅에서 더 이상 왜구를 보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지. 그러니 그 뒤를 생각할 수밖에 없어.”
왜구가 오지 않는다 해도 당장 멸왜단이 해체될 일은 없지 않은가.
“멸왜단의 규모가 줄어드는 것을 걱정하는 겁니까? 항주 흑도는 왜구가 사라져도 멸왜단을 계속 후원할 생각이 엿보이던데요?”
“항주 흑도의 생각은 우리도 알고 있네. 육가장과의 싸움에 우리를 써먹고 싶어 하지. 솔직히 육가장 놈들 그동안의 행태를 생각하면 기꺼이 칼을 들 마음도 있고. 또 멸왜단이 자생하기 위해서는 육가장이 가진 태호 인근의 수로 운영권을 빼앗는 게 가장 좋지. 항주 흑도와 같이 움직이면 싸울 명분도 충분하고 말이야. 그런데 창국 분타는 거기에 끼기 싫다는 거지. 본산인 보타문이 지척인 까닭에 본산의 영향이 커서 반쯤은 속세를 벗어난 사람들이거든. 아니 본산 영향이라기 보다는 섬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걸지도 몰라. 섬사람들이 괜히 육지의 이권 다툼에 낄 필요가 있냐는 거지. 피를 보는 건 왜구와의 싸움으로 충분하다는 거야.”
창국 분타에서 뇌응대를 꺼리는 이유가 매의 운영권이나 타격대의 신설 유무가 아니라는 말이다.
“창국 분타의 신진들이, 아니 창국의 젊은이들이 뇌응대와 어울리다가 육지로 빠져나가는 일이나, 육가장의 싸움에 휘말리는 일을 우려하는 거군요.”
“대충 그런 것이지.”
이쯤 되면 창국 분타로 뇌응대를 이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소리다.
뭐 상관없으려나?
매들의 탐색 범위와 뇌응대의 쾌속선 운영을 생각하면 총타에서 출발하나 창국에서 출발하나 왜선이 절강 해안에 닿기 전에 따라잡을 수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백 리 뱃길의 차이가 만들어 내는 수고로움? 어차피 노질 하고 쾌속선 미는 것은 내가 아니다.
“그럼, 창국 분타 이전 건은 단주님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알리지요.”
“뭐?”
“뇌응대 구성원들의 면면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들에게 창국 분타의 일을 구구절절 설명해 봐야 좋을 일 있겠습니까?”
아직 애새끼들이니 이해하기 보다는 창국 분타에 대한 불만만 생길 것이다.
뇌응대가 단주 직속임을 생각하면 애새끼들의 불만은 단주의 뜻으로 곡해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괜히 창국 분타와 멸왜단 총타 사이의 틈만 벌어질 일이다.
“단주이시지 않습니까? 그냥 대표로 욕 좀 먹으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