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절강행(30)
놈들이 사자후가 만들어낸 무념무상에서 벗어나기 전에 몸을 움직였다.
목표는 강기 사용자. 코러스 넷을 배후에 둔 놈을 향해 내달렸다.
텅, 터텅!
발의 움직임에 맞춰 장력으로 바닥을 밀어 속도를 높였다. 그렇게 거리를 줄이기 무섭게.
빠각, 팍!
철 이온 코팅 된 양손을 휘둘러 사지를 부순다.
“크아악!”
놈의 비명에 다른 녀석들의 정신이 돌아왔다. 하지만 스물다섯 남은 왜구 중 내게 위협이 되는 것은 이제 한 놈이다.
코러스를 비롯해 근처의 왜구들을 휩쓸려는 찰나.
- 리퍼, 초극 왜구가 이쪽으로 옵니다.
농꾼의 경고가 울렸다.
“뭐?”
고개가 자연스레 돌아갔다.
나를 향해 내달리고 있는 초극 왜구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붙고 있는 화지철과 화인천도. 진혜예는 두 숙질보다 한참 뒤에서 따라붙는 중이다.
두 화씨 숙질은 앞서 내달리는 초극 왜구들의 뒤통수를 향해 검강을 뿌렸지만 초극 왜구들은 자신을 노리는 강기의 반발력마저 이용하여 내 쪽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젠장!
언제든지 때려잡을 수 있는 스물다섯을 상대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호장우랑 비무 할 때 그거!”
진혜예와 화인천을 향해 외쳤다. 알아들었기를 바라며 발로 바닥을 박찼다.
몸을 뒤로 날려 나에게 달려드는 두 초극 왜구와의 거리를 조금이나마 더 벌린다.
하지만 그런 나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초극 왜구들이 내 코앞으로 들이닥쳤다.
“캬아!”
장군검을 든 놈이 먼저 호거술로 검강을 강화하며 나를 내려쳤다.
캉!
강기와 강기가 부딪치며 내 몸이 뒤로 하염없이 밀렸다.
“끼악!”
그런 나를 향해 대감도를 든 놈이 횡격을 날렸다.
캉!
이번에는 대감도의 횡격을 따라 좌측으로 몸이 밀렸다.
여기서 사자후를 펼칠 수는 없었다. 사자후를 펼쳐 호거술을 깰 수는 있지만 그뿐이다. 나는 아직 다른 무공을 펼치며 사자후를 쓸 만큼 능숙하지 못했다.
검기도 도기도 아닌 검강과 도강 앞에서 호신강기를 믿고 무방비하게 설 수는 없는 것이다.
장군검을 든 왜구가 대감도를 든 왜구를 스쳐 지나 허공으로 뛰어오른다. 동시에 장군검을 힘껏 쳐들었다.
나를 그대로 땅에 처박아 버리겠다는 속셈. 하지만 나도 당해 줄 생각 따위는 없다.
호장우랑 비무할 때의 그것을 터트린다.
“섬광격!”
내 우렁찬 외침에.
오올!
스피커가 울부짖고.
번쩍!
내 칼날에서 피어난 백광이 세상을 뒤덮었다.
쾅!
격한 충격이 내 몸을 땅 위로 내동댕이쳤다.
“크흑!”
괜히 공력도 돌릴 수 없는 발로 버텼다가는 양발을 분질러 먹을 수 있기에 자연스레 바닥을 굴렀다.
장군검에 이은 대감도의 공격 따위는 없었다.
왜냐고?
나를 덮치는 것보다 자기 두 눈을 가리고 비명 지르기 바쁘거든.
“크아악!”
“커억!”
두 눈을 찌르는 통증과 순간적인 시력 상실에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은 초극 왜구 둘만이 아니었다.
무념무상에서 벗어난 스물다섯 왜구 역시 마찬가지다.
칼밥 먹는 인생들인지라 이 생소한 고통 속에도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반사적으로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나를 상대하기 위해 끼리끼리 뭉쳐 있던 스물다섯이다. 그놈들이 눈이 멀어 제각기 칼을 휘두르니 가까이 있던 동료들과 부딪치지 않을 수 없다.
카카캉, 카캉!
여기저기서 왜도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들도 옆에 누가 있는지 안다. 그러니 칼부림은 곧 멈출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놓치면 흑도 인생의 기본이 안 된 놈이라고 사부님에게 뒤통수를 까이겠지.
바닥을 뒹구는 왜도 몇 개를 주워서 몇 놈을 노리고 제대로 던졌다.
휘익, 휙!
“크아악!”
“컥!”
눈먼 상태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비명. 멈출 것 같은 칼부림을 지속시킨다. 아니 더 가속시켰다.
카카캉, 카캉, 캉!
“크아악!”
“카악!”
그리고 격해지는 칼부림에 서로의 칼에 맞는 경우가 생기고, 그 소리는 칼부림을 더욱더 격하게 만들었다.
초극 왜구 둘은 초극 고수답게 기감으로 주위를 파악하고 주위의 인기척과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언제든 칼을 휘두를 수 있는 모양새로 눈이 회복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리가 정상이었으면 달려들어 끝장냈을 터였지만, 지금 나로서는 그냥 두고 볼 수밖에 없다.
진혜예와 화씨 숙질이 달려오고 있었다.
멀쩡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 내 말을 알아듣고 휩쓸리지 않도록 대비를 한 모양이다.
왜구 무사들을 뛰어넘어 초극 왜구들을 덮치려 했다.
“멈춰! 그놈들 이미 냉정을 찾은 상태라고. 지금 셋이 덤벼 봐야 쉽게 안 된다고.”
나도 같이 덤비면 되지만 아쉽게도 아직 배터리가 충전되지 않았다.
“내가 견제하고 있을 테니, 일단 저놈들부터!”
내가 왜구 무사들을 가리키자 세 사람이 바로 몸을 돌렸다.
초극 왜구와 싸울 때 이놈들이 작정하고 뒤를 치기라도 한다면 골치 아프다.
“크아악!”
“아악!”
비명과 함께 왜구들이 쓰러졌다. 온전한 초극 둘에 절정 한 명이다. 눈이 멀어 엄한 곳에 칼질 하고 있는 왜구 무사들 뒤통수를 후려치는 것은, 어려운 일도 오래 걸릴 일도 아니었다.
남은 것은 초극 왜구 둘.
아직 시야가 돌아오지 않았는지 둘 다 눈을 질끈 감고 있는 상태다.
화지철과 화인천이 발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진혜예가 그 둘의 등 뒤에서 언제든지 사자후를 내지를 수 있게 준비하고 있다.
3, 2, 1, 0.
마침 나도 배터리가 충전되었다는 표시가 떴다.
왜구 하나가 배시시 눈을 떴다. 눈을 깜박이는 것이 시야가 어느 정도 돌아온 모양.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꺼내 든 것은 기다란 금속 통. 왜구가 통 꽁무니의 줄을 당기자,
쉬이익!
하고 퍼런 불빛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증원을 부르는….
“조심!”
“도연 형!”
경고성에 하늘로 치솟는 불빛을 바라보는 시선을 얼른 돌리는데 두 놈이 내 양옆으로 들이닥치고 있었다.
“끼악!”
“캬아!”
호거술까지 발휘된 강기의 궤적.
“끼요올!”
나 역시 호거술을 발휘하며 맞이할 수밖에 없다.
콰앙!
굉음과 함께 둘의 신형이 내 양옆으로 찢어졌다.
“이것들이!”
내 칼은 허공을 쳤다. 날 공격하는 척하다가 저희끼리 충돌, 그 반발력을 활용해 튄 것이다.
“쫓아!”
“화 선배와 둘은 저 녀석을!”
대감도를 든 놈은 일행에게 맡기고, 나는 장군검을 든 놈의 뒤를 쫓았다.
피풍의를 펼치고 바닥을 기듯 내달린다. 내공을 쓸 수 없다지만 단련된 건각이 있다. 거기다가 공력을 듬뿍 먹인 양손을 번개같이 움직이면.
터텅, 터터텅!
몸이 쭉쭉 앞으로 뻗어 나간다. 발로 경공을 펼쳐 달릴 때보다 힘을 배로 들여야 비슷한 속도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양손이 추진에 사용되는 탓에 도망갈 때는 불리하다. 추적자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려면 손을 써야 하니 속력이 늦어지고, 결국 따라 잡힐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추적할 때는 힘이 배로 든다는 점만 제외하면 그다지 불리하지 않았다.
거기다가 배로 드는 힘을 줄일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잖은가.
오올!
내뻗는 장력에 호거술을 건다.
쾅, 콰쾅!
격한 반발이 몸을 확실히 가속 시켰다. 스피커가 한 번 울리고 땅이 한 번 터질 때마다 놈과의 거리가 좁혀졌다.
나와 거리가 줄어들자 놈이 냅다 몸을 돌렸다.
“캬아!”
호거술과 함께 펼쳐지는 공격.
등판에 피풍의를 활짝 펼쳐 붙인 채로 몸을 세운다.
후우욱!
극심한 공기 저항과 함께 속도가 극감, 그 탓에 놈의 공격이 헛되이 공간을 갈랐다.
“이거나 먹어!”
준비된 한 수, 검게 물든 손에서 출발한 벽력이 놈을 덮쳤다.
번쩍, 파지직!
녀석의 전신이 뻣뻣하게 굳으며 그대로 넘어갔다. 재빨리 혈도를 제압하고 낭파조로 사지를 박살냈다.
“다른 녀석은?”
사지가 박살난 놈을 어깨에 짊어지며 물었다.
- 따라 잡혀서 격전 중입니다.
농꾼이 화면을 띄우고 녀석이 어떻게 따라잡혔는지 간단하게 보여줬다.
화지철과 화인천이 내달리고 그 뒤를 진혜예가 머리 위로 뭔가를 빙빙 돌리며 달리고 있었다.
서로 연결된 여러 가닥의 줄에 조그마한 추를 달아 놓은 물건으로, 팔맷돌 혹은 사냥추로 불리는 포획 도구였다.
진혜예가 그것을 던지자 화인천이 냅다 검을 던졌다.
녀석이 화인천이 던진 검을 냅다 쳐내는 순간, 사냥추가 기다렸다는 듯 녀석의 발목에 감겨들었다.
한 발목이 감겨들기 무섭게 다른 발목을 감겨드는 사냥추에 녀석의 발걸음이 몇 발 지체되었다.
초극 고수의 추적전에서 그 몇 발이면 따라붙기 충분한 시간.
화지철이 녀석의 앞길을 막았고, 검을 주워 든 화인천이 합류했다.
녀석은 어떻게든 둘을 떨쳐내려 했지만 초극 고수가 둘이다.
거기에 진혜예가 합류하자 호거술도 사용하는 족족 사자후에 깨진다.
찔러 들어오는 검강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지만 오래가지 못할 싸움이었다.
내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결국 대감도의 왜구는 화씨 집안 숙질에게 제압당했다.
“하아, 하아.”
싸움이 끝나기 무섭게 화인천은 바닥에 주저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인천이 녀석 어디 다친 겁니까?”
화지철에게 슬쩍 물어봤다.
얼굴이 허옇게 질린 채로 운기에 몰두하는 것이 심각한 내상을 입은 듯했다.
“조카에게 듣지 못했나?”
“예?”
“듣지 못한 모양이군. 나중에 직접 물어보게.”
화지철의 말이 묘하다. 인천이 녀석 저러는 것이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니라는 투다.
뭐, 숙부인 화지철도 그냥 두는 것이 당장 위험한 상황은 아닌 듯했다. 화지철의 말대로 나중에 화인천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면 될 일.
한쪽에서 호흡을 고르고 있는 진혜예에게 다가갔다.
“누님, 왜구 놈들의 수법을 그렇게 깰 수 있었으면 진작 좀 말을 해주시….”
진혜예가 고개를 드는 순간 나는 입보다 발을 움직여야 했다.
뒤로 물러나 안전거리를 확보하지 않았으면 바로 손이 튀어 나갈 정도의 살기. 진혜예의 두 눈이 그런 살기로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이 누나는 또 왜 이래?
‘누님이 추왜검랑이 된 것이 저 둘 탓이지요.’
인천이 녀석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무슨 원한인지 모르겠지만 보통 원한이 아닌 모양이다.
“왜 저러는지 모르나 보군.”
그런 나를 보며 화지철이 물었다.
“초극 왜구 둘에게 원한이 있다는 정도만 들었습니다만?”
“초극 왜구? 설마, 자네 오늘 때려잡은 이 둘이 누군지도 모르는 건 아니겠지?”
“모르는데요?”
“자넨 절강 사람은 확실히 아니야. 오늘 잡은 초극 두 놈, 거열쌍왜(車裂雙倭)네.”
“거열쌍왜요?”
“거열형에 처해도 모자란 놈들이라고 붙은 별명이지.”
거열형이라면 사지를 각기 묶은 수레를 당겨 몸을 찢어 죽인다는 잔혹한 형벌이다. 별호가 찢어 죽일 왜놈 둘일 정도로 여기저기 원한을 많이 샀다는 소리다.
“뭐 하는 놈들이기에 그 정도로 원한을 산 겁니까?”
“저놈들 왜구 땅에서 식전도(食錢刀) 노릇 하는 작자들이야.”
식전도, 돈 먹는 칼은 청부를 받고 움직이는 낭인들을 이르는 말이다.
“왜구들, 제 놈들이 처리하기 어려운 일에 동원하는 놈들이지.”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움직였다는 말이다.
대강 일어난 일들의 흐름을 보면, 놈들이 노린 것은 나와 뇌응대 같았다.
“심문을 해봐야겠군요.”
“잡아 놓은 왜구들 있지 않나?”
화지철이 물었다.
“몇 명 있지요.”
죽이지 않고 낭파조로 사지만 박살 낸 놈들이 몇 명 있었다.
“딴 놈들 있다는군. 진 소저.”
화지철의 말에 진혜예가 검을 뽑아 들고 잡아다 놓은 거열쌍왜에게 다가갔다.
“우리는 저쪽으로 가서 알아볼 것 좀 알아보세.”
화지철이 내 손을 잡고 왜구 무사들이 쓰러진 쪽으로 끌었다.
“놈들을 심문하자는 것입니까?”
“그렇지.”
“왜어는 하실 줄 아세요?”
“…….”
답이 없다. 그냥 진혜예와 거열쌍왜가 오붓한(?) 시간을 보내도록 자리를 피해 주자는 것이다.
- 리퍼, 자철검대 대원들이 도착했습니다.
농꾼의 보고에 고개를 돌리니 철검화가의 정예라는 자철검대가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같이 오던 것을 떼어 놓고 먼저 온 주제에 할 말은 아니지만, 일 끝난 다음에 오는 것이 어째 액션 영화판의 경찰 같은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