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절강행(31)
자철검대 주도로 뒷수습에 들어갔다. 검원장의 협조도 구했다. 장주를 비롯해 주력이 왜구와의 싸움에서 박살났지만 혈족이 몰살당한 것은 아니었다.
장원 창고에 살아남은 왜구를 가두고 심문한다. 심문은 자철검대에서 맡았다. 대원 중 왜어를 아는 자가 있는 모양이다.
나는 일단 손상된 신경부터 이어야 했다. 검원장의 방 한 칸을 얻어 들어앉았다.
“뭘 어떻게 하면 되냐?”
- 그냥 편안하게 누워 계시면 됩니다.
농꾼 녀석이 시키는 대로 침상에 드러누웠다. 그러자 하반신의 감각이 사라졌다.
“이건 뭐야?”
- 나노 머신을 통한 신경 신호 대체를 종료했습니다.
“불편한데?”
- 신경 접합을 위해 끊어진 신경을 물리적으로 당겨야 합니다. 신경 신호가 전달되면 상당한 통증이 예상됩니다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처해야 하는 것이 칼잡이다.”
감각을 끊지 말고 계속 유지하기를 원한다. 아파 봐야 얼마나 아프다고. 생으로 칼도 맞아 봤고, 내 장기도 몇 번 본 적 있는 흑도의 사내가 나 아닌가.
- 리퍼의 요구대로 신경 신호 대체를 유지. 시술 시작합니다.
“크흑!”
아파! 아프다! 더럽게 아프다. 진짜 아프다. 아프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프다.
당장 망할 신호를 끊으라고 외치고 싶다. 하지만 십수 년 흑도 호한으로 굴러먹은 자존심이 그걸 막는다.
아오, 시발! 그놈의 자존심이 뭐라고!
그렇게 얼마나 아팠을까?
- 리퍼, 치료가 끝났습니다.
농꾼의 선언과 동시에 미칠 듯 한 아픔이 이를 꽉 물고 견딜 만한 아픔으로 바뀌었다.
“후우, 후.”
호흡을 고르며 공력을 움직여 보니 당장 하체로 들어가는 공력이 느껴졌다. 하지만 여전히 아프다는 것이 문제다.
“후유증은?”
- 며칠간 해당 신경의 통증이 지속될 수 있습니다.
“쌰앙!”
입에서 절로 욕이 나온다.
“다른 주의점은?”
- 별다른 주의점은 없습니다.
“통증 차단 가능하지?”
흑도 호한의 자존심? 치료할 때 잠시 아픈 거는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이 통증을 계속 참아야 하는 것은 일상생활 하지 말라는 말과 다를 바 없다.
- 해당 신호 분석해서 중화시키겠습니다.
그렇게 치료가 끝났다. 몸을 일으켜 화지철을 찾았다.
“벌써 치료가 끝난 건가?”
“예.”
“보통 그렇게 칼을 맞으면 초극 고수라도 보름은 누워 있어야 할 텐데 말이야.”
“제 무공이 의술을 기반으로 한 탓에 회복이 좀 빠릅니다.”
“의술에도 조예가 깊겠군?”
“뭐 돌팔이 소리 들을 정도는 아닙니다.”
농꾼 녀석을 활용하면 시대의 명의 소리도 들을 수 있지 않을라나?
“그나저나, 왜놈들에게 뭐 알아낸 게 있습니까?”
“놈들의 정체와 이것들이 몰려온 목적 정도?”
“정체라 해봐야 왜구 아닙니까?”
“그냥 왜구라 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더군. 자백한 놈 말로는 죄다 동문으로 ‘태사류’라는 유파의 무사라더군.”
“태사류?”
어디선가 들은 적 있는 단어다.
“아는 거 있나?”
전생에 몸 안 좋아 누워 있을 때 봤던 일본 만화에서 얼핏 본 기억이 있었다.
일본에서 실전으로 유명한, 아니 그보다 폼 안 나는 수련법으로 유명한 시현류의 시조에 대한 만화였다. 거기 주인공 때문에 망한 유파 이름이 태사류였지?
“왜의 지역 중 하나인 살마(薩摩)의 대표 문파던가? 그럴 걸요?”
“살마? 살주(薩州)가 아니라?”
“살주요? 아, 그렇게도 부른다고 알고 있습니다.”
“자백이 거짓은 아닌가 보군.”
“교차 검증하면 알 일 아닙니까?”
내가 살려 둔 왜구는 하나가 아니었다.
“독한 놈들이었어. 도통 입을 안 열더군. 간신히 한 놈의 입을 열게 했을 뿐이야.”
심문은 시간이 필요한 일이긴 하다.
“왜구가 아니라 죄다 태사류의 무사들이라면, 중원 땅에는 왜 몰려왔답니까?”
“거기 지배자의 아들이 최근 절강에서 죽었다더군. 그 복수를 위해 유파 전체가 동원되었다던데?”
“제가 목표였다는 겁니까?”
최근 절강에서 잡아 죽인 왜구 대다수는 나와 관련이 없을 수 없다.
“뇌응대주와 부대주 척살이 목적이라더군.”
화지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얼마나 몰려왔답니까?”
“오늘 잡은 놈들이 몰려온 놈들의 절반쯤?”
“나머지 절반은 어디 있답니까?”
“묻지 못했네.”
이제는 뭘 물을 상태가 아니라는 소리다.
“제가 어떻게 해보지요.”
농꾼을 동원하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독한 것들이었어.”
화지철이 놈들에게 안내할 생각은 않고 씁쓸한 표정으로 이딴 소리나 하고 있는 것이….
“사로잡은 왜구 중에 답할 수 있는 놈들이 없는 겁니까?”
‘다 죽은 거냐?’라고 묻는 내 말에 화지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그냥 내가 심문할 걸.
언제나 그렇듯,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것이다.
뒈져 버린 왜구 놈들에게 미련 가져 봐야 남는 것은 없다.
“잔당들이 문제군요.”
거열쌍왜가 쏘아 올린 신호탄이 증원 요청의 신호였으면 남은 놈들이 몰려왔어야 했다.
= 신호탄 올라가고 얼마나 지났지?
- 147분 지났습니다.
그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데 아무런 기척이 없다는 것은 증원 요청의 신호가 아니라는 말이다.
= 분타 쪽은 어때?
농꾼에게 응5의 감시망에 걸려든 것이 있는지 물었다.
- 별다른 움직임은 없습니다.
그냥 도망가기 위한 시선 끌기였을 뿐인가?
어쨌든 남은 놈들을 찾기 위한 단서를 찾아야 했다.
검원장을 나서다 화인천과 만났다.
“형님,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화인천이 나를 보고 물었다.
“너는 좀 어떠냐? 다 죽어가는 얼굴로 운기를 하고 있었잖아.”
“늘 있는 일입니다.”
“누님은?”
“오래된 포한(抱恨)을 처리해 긴장이 풀어진 모양이시던데요.”
방 한 칸 잡고 드러누웠다는 소리다.
“정확히 무슨 원한이었던 거야?”
“누님 정혼자가 그 작자들 손에 가셨다더군요.”
“거열쌍왜는?”
“누님이 소금에 잘 절여 놨지요.”
이미 목을 잘라서 뒤처리까지 끝났다는 말이다.
“뭐 찾은 거 있냐?”
내 물음에 화인천이 고개를 흔들고는 조용히 내 뒤를 따랐다.
내가 왜구 놈들과 싸움을 시작했던 곳은 검원장 정문 인근. 여기서 눈여겨볼 만한 것들이라고는 거열쌍왜가 튀어 나온 지점들이다.
- 녹화 영상을 보시겠습니까?
= 그래.
내 대답에 화면이 떠올랐다.
화면 속의 내가 왜구들 앞으로 내려서자 왜구들이 내게 칼을 겨눴다. 그들의 칼에서 도기가 서린 직후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뒤로 십여 미터 정도 떨어진 지면이 슬쩍 들썩이더니 대감도가 튀어 나왔다. 그리고 화면 속의 나를 정신없이 몰아갔다.
그리고 바닥이 꺼지며 내가 균형을 잃고 장군검이 내 등판을 난자하며 등장했다.
= 어디, 어디야?
내가 화면을 치우며 묻자 눈앞으로 화살표가 떠올랐다. 그 화살표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커다란 구덩이에 붉은 원이 그려졌다.
장군검이 튀어 나온 곳이다. 깊이가 일 장이 훌쩍 넘는 깊은 구덩이다. 하지만 강기에 뭉개져서 뭔가 딱히 건질 것도 없어 보였다.
다른 화살표의 움직임에 고개를 돌리니 멀쩡한 바닥에 붉은 원이 그려졌다.
붉은 원을 향해 다가가 슬쩍 살펴본다. 그냥 보기에는 별다를 것 없는 땅바닥이다.
- 아래 공간이 있습니다.
대감도를 든 왜구가 기어 나온 곳이니 공간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
칼을 꺼내 비스듬히 바닥에 찔러 넣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내 행동에 화인천이 물었다.
“그냥 봐.”
그리고 도기를 내뿜으며 크게 원을 그렸다.
“어차!”
잘라낸 땅을 들어내니 사람 하나 들어가도 충분할 구멍이 생겼다.
“이건 또 어떻게 찾으신 겁니까?”
화인천이 놀란 눈이 되어 물었다.
“이 근방에서 놈에게 뒤통수를 맞았으니깐.”
그렇게 대답하며 철 이온을 코팅한 왼손을 그 구멍 안으로 슬쩍 집어넣었다.
우웅!
- 별다른 위험 요소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음파 탐지 결과를 농꾼이 고했다. 내 기감도 별다른 기척을 잡아내지 못했다.
“횃불이 필요하겠군요.”
“먼저 들어갈 테니 알아서 따라와!”
횃불을 찾으러 가는 화인천의 뒤통수를 향해 소리치고는 구멍 속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 시각 보정 들어갑니다.
단련된 안법으로 구멍 속 사물의 윤곽을 구분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지만, 농꾼의 보정이 더해지자 태양 아래의 시야와 다를 바 없어졌다.
“잘 만들어진 토굴이네.”
대강 일곱 자 높이에 가로 세로 길이가 이 장은 될법한 널찍한 공간이다. 붕괴를 대비해 이곳저곳에 통나무로 만든 버팀목들을 받쳐 놓은 것이 보였다.
토굴 앞뒤로 통로가 나 있었다.
우웅!
왼손을 움직여 음파 탐지로 통로를 살폈다.
- 이쪽 통로는 리퍼가 떨어졌던 곳, 붕괴한 구덩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응 시리즈의 시야로 지상의 모습을 띄워 내 위치와 이 통로의 방향과 그 끝에 자리 잡은 구덩이를 보여줬다.
“그럼, 이쪽은?”
- 직선 통로는 아닙니다.
막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소리에 통로를 따라 움직였다.
- 이 이상 전진하면 응 시리즈와의 통신 범위에서 벗어납니다.
지하인데다 음파 통신의 한계인가? 빨리 안테나를 설치하든가 해야지.
몇 번 방향을 바꿔 백 장쯤 움직이니 횃불을 든 화인천이 따라붙었다.
“왜구들이 만들었을까요?”
화인천이 통로 여기저기에 횃불을 들이대 살피면서 물었다.
“글쎄, 일단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기는 한데….”
= 네가 보기에는 어때?
- 정확한 분석을 위해 벽면의 일부를 채취해 주십시오.
낭파조로 슬쩍 벽면과 버팀목을 긁어 입안에 넣었다.
시야 한쪽에서 알아보지도 못할 그래프가 요동친다. 농꾼이 그렇게 자신이 일하는 표를 열심히 내더니 결과를 내놓았다.
- 대기에 노출된 지 1,000시간이 되지 않은 토양입니다. 그리고 버팀목은, 수분과 수액 함유량으로 봐서 제대로 된 건조 과정을 거친 목재입니다.
“왜구들이 만들었다고 보기는 힘들겠는데?”
“어떤 점에서요?”
“일단 버팀목으로 쓰인 것들이 생나무가 아니야. 제대로 건조된 목재들이야. 저 정도로 말리려면 수액을 빼야 하는데, 최소 반년 이상 걸리는 일이다.”
농꾼이 알아낸 결과와 과거 심심해서 틀어 놓은 교육방송에서 봤던 기억을 합해 내놓는 결과다.
“왜구들이 어디서 건조된 목재들을 구했을까?”
“왜구들에게 동조한 세력이 있다는 말이군요.”
화인천이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거열쌍왜가 땅속에서 튀어 나와 나를 덮쳤던 것을 생각하면, 내가 부리는 매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잘 아는 놈들이야.”
“온주부 내에서 그런 정보를 알만한 곳은 멸왜단 분타를 제외하면….”
화인천이 말을 멈췄다. 그도 그럴 것이 온주부로 한정하면 그럴 역량이 있는 곳은 화인천의 본가인 철검화가 밖에 떠오르지 않으니 말이다.
“형님, 본가는 아닙니다. 그럴 이유가 없어요!”
“무림 세가의 적장자면 후계로 집안에서 자리를 잡고 앉아 있어야 정상 아냐? 밖으로 싸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후계 문제로 분란 생긴 것 때문에 본가에서 저를 치우려는 수작일 지도 모른다. 뭐 그런 추측이세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 네 녀석 무공을 숨긴 것도 그렇고.”
“하아!”
화인천이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차라리 잘됐네요. 형님에게도 털어놓을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쾅!
갑자기 터진 굉음이 화인천의 말을 잘랐다.
쿠르르릉!
통로가 흔들리며 무너지고 있었다.
씨발, 이건 또 뭔 경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