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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퍼 - 무공수확자-52화 (52/175)

52화

절강행(33)

“화 대협, 평양 분타에 왜구 놈들이 들이쳤습니다.”

“이것들이 감히 철검화가를 뭐로 보고!”

내 말에 화지철이 노성을 내질렀다.

“화 대협께서는 자철검대와 함께 이곳을 책임져주시지요.”

“그건 왜구 놈들이 원하는 바 아닌가! 놈들의 수작질에 놀아나자는 건가?”

“왜구와 손을 잡은 개잡놈이 누군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통로를 붕괴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마을 자체를 지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말은 이 마을에 뭔가 단서가 있다는 소리다.

뒤늦게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놈들이 단서를 지우려 할 수 있으니 대비를 해놔야 했다.

“이번 일을 꾸민 자들을 찾아내지 못하면 또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자네가 서두르는 것을 보니 평양 분타의 상황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닌 모양이군.”

평양 분타를 들이친 왜구들의 전력은 대단했다.

초극이 분명한 왜구 둘에 코러스를 등에 업은 강기 사용자가 여섯, 호거술의 합창으로 절정의 도기를 휘두르는 놈들이 예순에다가 단독으로 사용하는 호거술로 일류의 도기를 사용하는 자들이 백삼십이었다.

머릿수로만 따지면 평양 분타 인원이 두 배를 훌쩍 넘지만 그 중 삼백이 이류였고, 일류는 백오십 남짓에 절정은 뇌응대와 태주에서 도착한 지원을 합해도 쉰이 안 되었다. 초극은 분타주와 태주의 지원군을 이끌고 온 호장우 정도?

절정 이상의 전력이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예, 최대한 빨리 가야 할 듯합니다. 그리고 진 부대주를 부탁합니다.”

곯아떨어진 진혜예는 아직 깨어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빌빌대는 초극보다 멀쩡한 초극이 낫지 않겠나?”

“예?”

“저 녀석, 집을 나갔을 때와 별로 바뀐 게 없다면 지금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당장 힘을 쓰는 것은 무리일 터. 솔직히 안 그런가? 조카.”

화지철이 화인천을 보며 물었다.

“숙부의 말씀대로입니다. 대주께서 초극의 고수를 원한다면 지금의 저는 힘듭니다.”

화인천이 그 말에 긍정을 표했다.

“평양 분타를 지원할 초극 고수가 시급한 상황이니 이렇게 하지. 자철검대의 지휘권을 잠시 조카가 맡게. 내가 돌아올 동안 검원장을 조사하고 말이야.”

화지철이 화인철에게 자철검대 대주 영패를 넘겼다. 화인천 대신 화지철이 가겠다는 말.

“그럼 서두르지요.”

내가 거부할 이유가 없다.

“화급을 다투는 일이니 최대한 빨리 가야 합니다.”

“당연한 소리.”

내 말에 화지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제가 화 대협에게 업히도록 하지요.”

“자네 다리가 아직 완치되지 않은 것인가?”

내 말을 화지철이 오해를 했다.

“저와 화 대협이 그냥 내달리는 것보다 제가 화 대협에게 업히는 것이 더 빠르고 힘의 소모도 적습니다.”

피풍의를 사용하지 않고 순수 경공 실력만 따지자면, 이름난 초극 고수인 화지철이 나보다 더 뛰어났다.

“무슨…. 아, 그러고 보니 놈들을 피하려고 할 때도 나에게 업히려 했지. 그때 들은 대로 하면 되나?”

“예.”

“어서 업히게.”

화지철이 등을 내주며 말했다. 내가 냉큼 업히자 화지철이 입을 열었다.

“그럼 가네.”

화지철이 발을 움직이고 나는 그의 등에서 피풍의에 공력을 주입했다.

원래 입고 있던 피풍의 대신 검원장에서 얻은 피풍의가 날개처럼 펼쳐졌다.

“호오, 대단하군!”

화지철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양력을, 자신의 몸을 위로 밀어 올리는 힘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속력을 더할수록 등에 업힌 내 몸은 물론, 자신의 몸도 가벼워짐을 아는 것이다.

- 목적지까지 88km입니다.

화지철이 엔진 역할을 한다면, 농꾼은 내비게이션이 되었다.

지형을 고려하여 우리가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길을, 최적의 경로를 찾아서 보여주는 것이다.

산을 넘는 것이 빠르면 산을 넘고, 길을 따라가는 것이 빠르면 길을 따라갔다.

***

“하아.”

평양 분타에 도착한 내 입에서 나오는 것은 한숨이다. 안도의 한숨이기도 하고 맥 빠지는 한숨이기도 했다.

“허, 그냥 검원장에 있었어도 될 일이었군.”

화지철도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왜구 놈들을 잡기 위해서 이백 리가 넘는 길을 죽어라 달려 격전장에 도착했는데, 싸움이 끝나 버린 것이다.

“그나저나 철산맹의 전력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지 참으로 궁금하군.”

왜구 놈들은 전멸을 당했다. 처주부의 패자 철산맹의 전력이 갑작스레 나타나 평양 분타를 공격하는 왜구들의 뒤통수를 후려친 탓이다.

서른다섯밖에 안 되는 소수였지만, 초극 둘에 죄다 절정으로 이루어진 전력이었다.

“화 대협, 저는 일단 뇌응대의 피해를 살펴야 할 것 같습니다.”

화지철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에 자리를 피하려 뇌응대를 팔았다.

“그러시게.”

화지철이 쿨하게 나를 보내주고 평양 분타주를 향해 발을 옮겼다.

왜구가 온주부를 후려친 일이다. 그런데 그 일을 해결한 주역이 멸왜단도 아니고 철검화가도 아닌 타지의 세력인 철산맹이다.

온주부의 패자를 자처하는 철검화가 입장에서는 기분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된 일인지 확실히 따져보려는 게 분명했다. 우연히 끼어든 일인지, 아니면 평양 분타가 불러들인 것인지 말이다.

어쨌든 이건 온주의 분타들과 철검화가의 일이다. 총타 소속인 내가 끼어들 일이 아니다. 그러니 나는 내 할 일부터 한다.

= 뇌응대의 피해는?

- 응5의 영상 정보 처리를 위해 고용량 데이터 통신이 필요합니다.

공력을 억제해 통신 방해를 일으키는 호신강기를 풀어 달라는 요청이다.

달려오는 동안은 피풍의를 펼치기 위해 공력을 활성화한 상태라 통신 장애가 일어나 응5가 제공하는 실시간 영상을 받을 수 없었다. 간략화 된 평양 분타의 상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응5가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진 복합 생체 드론이지만 대단한 인공지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정보 판단 주체는 어디까지나 농꾼인 것이다.

- 중상 하나에 부상자 여덟입니다.

평양 분타에 남겨 둔 인원은 열셋이다. 그중 아홉이 다쳤다면 거의 박살이 났다는 소리다. 그래도 사망자가 없다는 것은 다행이라 할 수 있다.

= 중상? 지금 어디 있어?

나중을 위해서 명의 흉내도 낼 필요가 있다. 그러니 이런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한다.

농꾼이 그리는 화살표를 따라 발을 옮겼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환자들이 가득한 전각이었다.

“대주!”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구천악이다. 내게 개기다가 제일 먼저 밟힌 녀석 말이다.

“너도 다친 거냐?”

왼팔에 피가 배어 나오는 천을 감고 있기에 물었다.

“경 부대주에 비하면 다친 것도 아닙니다.”

하나 있다는 중상자가 경철운인 것이다.

“경 부대주가 크게 다쳤다고?”

“등판을 베였습니다. 의원들도 손을 쓰지 못하는 상처라 들었습니다.”

“어디 있지?”

“따라오시지요.”

구천악이 나를 안내한 곳은 전각 이 층에 자리 잡은 방이다.

방안에는 경철운이 침상 위에 엎드려 있었다.

상처를 덮어 놓긴 했지만 딱히 치료를 받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중상이네.”

등판의 상처가 한둘이 아니다. 거기다가 제대로 당했다. 살과 근육은 물론 손상된 척추 뼈가 눈으로 보일 정도다. 이 시대의 의원들이라면 가망 없다며 치료를 포기할 만했다.

= 치료할 수 있지?

- 마*카*투 감마 투입하면 됩니다.

항주 흑도에서 해독 작용에 한 번 사용하고 회수한 것이 마*카*투 감마다.

= 먹이는 것보다 환부에 그냥 뿌리는 게 낫겠지?

- 빠른 치료를 위해서라면 그렇습니다.

“깨끗한 물 한 동이와 가는 바늘을 가져오게.”

“치료하실 수 있는 겁니까?”

구천악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급하다.”

“예, 대주.”

내 말에 구천악이 급히 방을 나갔다. 그렇게 보는 눈을 없앤 다음 품에서 마*카*투 감마가 들어 있는 단약을 꺼내 잘게 부셨다. 그런 다음 가루를 쩍 벌어진 상처에 골고루 뿌렸다.

- 리퍼, 빠른 치료를 위해 고용량 데이터 통신이 필요합니다.

마*카*투 감마가 자리를 잡고 숙주의 상태를 파악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니 농꾼이 상태를 진단하고 실시간으로 지령을 내려 치료하려는 것이다.

= 알았다.

호신강기를 억제해서 농꾼과 마*카*투 감마의 데이터 통신을 도왔다.

“흠.”

근데 어째 상처가 이상했다. 왜도를 많이 맞은 것 같기는 한데, 가장 깊은 상처의 단면이 매끄럽지 못한 것이 왜도로 인한 상처 같지 않았다. 경철운 자신이 휘두르는 도끼에라도 맞은 것 같은 상처 아닌가.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서자였지?

= 농꾼, 경철운의 부상 당시 화면이 있으면 좀 보고 싶은데.

- 예, 리퍼.

구천악이 물과 바늘을 가지고 왔는데도 농꾼이 화면을 내놓지 않고 있었다.

“집중해야 하니 나가 있게.”

구천악을 내보낸 뒤 물동이에 손을 넣었다.

부글부글.

공력을 일으켜 물을 끓였다. 경철운의 머리카락을 몇 개 뽑아 끓인 물에 소독하고 준비된 바늘에 꿰었다.

- 리퍼, 부상 당시의 정확한 화면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넓은 전장에서 일어난 일 전부를 응5 하나로 기록하는 것은 무리였다.

- 대신 부상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화면을 찾았는데 보시겠습니까?

= 틀어.

하늘 위에서 싸움판을 내려다보는 화면이다. 뇌응대의 위치가 원으로 표시되고 경철운이 점으로 표시되었다. 그리고 ‘왜구’라 표시되는 점들 사이를 활발히 오갔다.

그리고 불쑥 튀어나온 점들이 왜구들의 뒤를 치기 시작했다. 철산맹이다. 그들은 먼저 뇌응대와 합류했다. 그리고 왜구들을 휩쓸기 시작했다.

- 여기서부터 싸움이 끝날 때까지 경철운의 활동이 관측되지 않습니다.

뇌응대의 표시와 경철운의 표시 사이에 거리가 생겼다. 그들 사이에 철산맹의 점들이 여럿 존재했다. 뇌응대는 철산맹의 다른 점들과 함께 왜구들과 접전을 벌이는 중이다. 뒤에서 일어난 일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것이다.

“흠.”

저 상태에서 경철운은 왜구와의 접점이 없었다. 이 기록대로라면 철산맹에서 경철운을 저렇게 만들었다 볼 수도 있었다.

“철산맹 사람들의 무기를 조사하면 확실한 결과가 나올 일이지.”

일단 녀석의 상처부터 봉합하자.

척추와 근육의 상처는 마*카*투 감마가 알아서 치료할 테니 나는 녀석의 피부만 봉합하고 명의 흉내나 내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경철운의 피부에 바느질을 하고 있자니 화지철이 찾아왔다.

“왜구를 끌어들인 게 누군지 밝혀졌네.”

“벌써요?”

“철산맹의 반도들이 저지른 일이라더군.”

“철산맹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습니까?”

“철산맹의 소맹주인 경철하가 직접 밝히고 이번 일에 대해 확실한 배상을 약속했네.”

“철산맹의 반도들은 왜구랑 손잡아서 좋을 게 뭐 있다고 그랬답니까?”

“용천의 자기를 왜구에게 몰래 팔아먹고 있었다더군. 그런데 자네와 매 때문에 그 판로가 끊기게 생겼으니 일을 벌였다는 거야.”

그럴듯한 이야기다. 경철운의 일만 없었다면 확실히 믿었을 이야기. 하지만 경철운이 저 모양이 되어 있는 모양을 보니 믿음이 안 갔다.

“그 반도들은 어떻게 되었답니까?”

“모조리 정리했다더군. 이번 일에 관한 건 심문 중에 알아낸 것이라고 말이야.”

“그래서 급히 달려왔다고요? 그 전에 연락할 생각은 못 했답니까? 멸왜단이나 철검화가에?”

“연락을 못 받았냐고 묻더군. 왜구가 전서구를 중간에 끊었을 수도 있어.”

“그래서 화 대협은 그 말을 믿으십니까?”

“믿을 놈을 믿어야지! 용천 자기를 만드는 용천현을 장악하고 있는 백토검문(白土劍門)은 지금 소맹주인 경철하보다 경철운을 더 지지했네. 백토검문이 박살나고 경철운이 저 꼴이 되었어. 무슨 수작질인지 뻔하지 않은가!”

반도고 뭐고 죄다 거짓말이고, 모든 게 경철하의 수작질이라는 말이다.

“그럼 그냥 가만히 계실 겁니까?”

“증거가 없으니 수가 있나! 이미 저놈들이 다 조작해 놨을 게 뻔한데 말이야! 그리고 증거를 찾았다 해도 본가나 멸왜단이 내밀어도 큰 효과가 없는 것이 작금의 상황이네.”

왜구를 잡으라고 만든 멸왜단이 왜구에게 큰 위기를 겪었고, 온주부의 패자인 철검화가는 온주부에 들어온 왜구를 몰아내지 못했다. 멸왜단을 구하고 왜구를 몰아낸 것은 처주부의 철산맹. 멸왜단이나 철검화가는 체면을 크게 깎이고 철산맹에 은혜를 입은 상황이다.

철산맹의 반도들이 이 일의 원흉이니 철산맹이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다!

그런 주장이 힘을 얻으려면 철산맹의 반도들이 일으킨 일임을 철산맹이 숨기고 그것을 멸왜단이나 철검화가에서 밝혔어야 했다.

하지만 이 일이 철산맹의 반도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밝힌 것은 철산맹이다. 누가 묻지도 않았다. 세력의 보신을 위해 숨길 수도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걸 절강의 대의를 위해 먼저 솔직히 밝히고 배상을 약속했다. 이 일로 철검화가와 멸왜단이 가타부타 떠드는 것은 보기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 이 모든 것이 철산맹의 흉계라는 사실을 밝힌다? 철검화가와 멸왜단이 이번 일로 잃은 체면을 찾기 위해 행하는 수작이라고 매도당할 가능성이 큰 것이다.

“골치 아프네요.”

명문 정파의 방식으로 철산맹을 손 볼 수 없다는 말이다.

***

“멸왜단 뇌응대를 맡고 있는 이도연이라 합니다.”

“철산맹의 경철하네.”

덩치도 그렇고 확실히 경철운과 닮아서 형제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작자다.

“이번에 보인 철산맹의 행보에 정말 탄복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네.”

“단구초자(斷寇樵子) 경구전 맹주님의 후계다운 호탕함이시군요.”

“내가 아버님을 좀 많이 닮았다네.”

내가 살살 비위를 맞춰 주자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싫어하는 이복동생의 상관이라는 놈이 아랫사람을 자처하며 자신의 비위를 맞추고 있으니 말이다.

“설마, 단구초자께서 물려 주신 단철부(斷鐵斧)입니까?”

내가 그 작자의 허리춤에 매달린 도끼를 보고 물었다.

“그렇네. 이것이 아버님이 쓰시던 그것이지.”

“한번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송구하다는 표정으로 묻자 그가 바로 허리춤에서 단철부를 뽑았다.

“당연히!”

나는 두 손으로 도끼를 받았다. 그리고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도끼날에 입을 맞추었다.

“허허, 사람하고는!”

그 광경에 경철하가 아주 만족했다. 물론 나도 만족했다.

- 경철운의 혈액이 감지되었습니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경철운을 때려잡으려고 이놈이 모든 것을 꾸민 것이다.

경철운을 처리하기 위해 내 목숨을 미끼로 썼다 그거지.

흑도의 호한으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

멸왜단 뇌응대주로 철산맹을 공격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라고?

내 손을 쓰지 못한다면 다른 손을 쓰면 그뿐이다.

= 농꾼, 염가동에게 연락해.

살마제일도가 다시 혈겁을 일으킬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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