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절강행(37)
“저기 있는 염왕적의, 벽력응주는, 그런 나도 눈치를 보는 사람이다! 왜? 나는 절강 항주의 흑도인이니깐! 매년 항주 흑도가! 절강 무림이! 항왜를 위한 예산을 얼마나 쏟는지 아느냐?”
나도 항주 흑도에서 얼마를 쓰는지 궁금했다.
“항주 흑도에서 매년 나가는 돈이 은자 삼십만 냥이다! 삼십만 냥! 그렇게 돈을 쓰는 이유가 뭐냐! 항주에 왜놈들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되는 줄 아냐? 왜구들이 쳐들어오면 항주는 안전한 곳이 아닌 게 된다. 천당이라 할 만한 중원 최대의 향락지가 마음 놓고 놀 곳이 못 되게 된단 말이다. 그렇게 되어 항주를 찾는 발걸음이 뜸해지면? 항주는 망해! 소비 도시, 향락 도시로서의 항주는 망한다고! 그걸 막기 위해 매해 수십만 냥의 은자를 멸왜단에 쏟아붓고 있다.”
멸왜단에 쏟아붓는 돈이 은자 삼십만 냥인데, 응7 대여료로 쓰는 돈이 은자 십이만 냥. 이렇게 생각하니 진짜 내가 너무 세게 부른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돈 아깝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멸왜단 덕에 왜구들이 절강에서 난리를 쳐도 해안에서 난리를 치지 내륙으로는 들어올 엄두를 못 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것도 작년까지 일이다. 올해 어떻게 됐는 줄 아느냐? 작년과 크게 바뀐 거라고는 벽력응주, 저 사람이 멸왜단에 가담한 것 그것 하나밖에 없는데 말이다. 저 사람이 부리는 매를 멸왜단에서 적극적으로 운용하는 것밖에 없는데 말이다.”
“….”
“절강 땅 딛는 왜구들이 십분지 일로 줄었다. 왜구들이 안 찾아온 게 아니야. 십 중 구가 바다 위에서 벽력응주가 부리는 매들 눈에 띄어서 차단당한 거다. 작년까지 절강 각지에 효수된 왜구 목이 얼마나 되는 줄 아느냐? 매년 오백이 안 됐다. 그런데 올해는 삼천이 넘었다. 삼천이! 잡아 죽이는 왜구가 무려 여섯 배나 늘었다.”
이렇게 들으니 내가 조구흥에게 비싼 값에 매를 빌려 준 게 아니라 멸왜단에 헐값으로 넘겼다는 생각이 팍팍 든다.
“그 차이를 만들어 낸 게 지금 네가 감히 살기를 드러낸 저 사람이다. 네가 실수로라도 저 사람에게 살수를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으냐? 나는 항주칠선의 일원으로 복면 뒤집어쓰고 본가의 담을 넘어야 된다! 내가 실패한다? 항주칠선이 실패한다? 절강 무림 전체가 네놈을 씹어먹기 위해 움직일 거다.”
“…….”
질려서 아무 말도 못하는 조자호다.
와우, 이게 현 절강에서의 내 위치다. 내가 설계했고 내가 만든 위치지만, 내가 봐도 좀 후덜덜하다.
***
조자호가 나에게 사죄를 하고, 조구흥이 나에게 은자 천 냥짜리 전표를 쥐여 주는 것으로 그날의 일은 일단락되었다.
상화장에서 하루 묵은 다음 구주부 강산현을 향해 출발했다.
“고장명 이 녀석 지금 어디쯤 가고 있냐?”
뇌응대 애송이들의 깁스한 듯 빳빳하던 모가지를 말랑하게 해주던 날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대원들 전원에게 위치 추적 장치를 박아 넣었었다. 있는 것 써먹어야지 않겠나.
- GR-02. 위치 추적 들어갑니다.
고장명은 삼 일의 기간에도 징징거린 녀석이다.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절반 갔으면 많이 갔으리라. 고장명보다 먼저 도착해 봐야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러니 재빨리 따라붙어 같이 갈 셈이었다. 물론, 녀석이 나간 거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같이 가며 좀 갈궈 줘야지 하는 마음도 있다.
- GR-02의 현재 위치입니다.
시야 한쪽에 절강 지도가 떠오르며 고장명 녀석의 위치가 점으로 표시된다.
“야, 이거 제대로 찾은 거 맞아?” 안테나 하나 밖에 안 세워서 삼각 측량이 안 돼 좌표 위치 엉뚱하게 찍힌 게 아닐까 해서 물었다.
- 안테나와 넘버링, 노넘버 응 시리즈들을 이용한 다각 측량의 결과입니다. 위치 오차는 3m 이내입니다. 세 개의 고정 안테나가 세워지면 위치 오차는 밀리미터 단위로 줄일 수 있습니다.
영파부 남부에 자리 잡은 사명산에 녀석의 위치가 찍힌 것이 오류가 아니라는 말이다.
“사명산을 넘으면 일단 구주부로 가는 길이 상당히 단축되니 그 때문에 간 것이라 생각은 할 수 있는데….”
아직도 사명산이라는 것이 이상했다. 아무리 부상에서 회복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지만 고장명은 절정의 무인이었다.
일반인도 하루 열심히 걸으면 백 리를 간다. 그런데 절정 무인이 하루가 지났는데 백 수십 리밖에 못 움직였다? 시일이 넉넉하면 그러려니 할 일이지만 길은 멀고 시일도 촉박한데 이렇게 느긋하게 움직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무슨 사달이 났다 보는 게 옳겠지?”
별일 아니면 뒤통수 한 대 후려치고 강산현 가는 내내 괴롭혀 주면 될 일이다.
“최단 거리로 경로를 잡아. 피풍의 펴고 달릴 거야.”
- 예, 리퍼. 최단거리 경로를 잡아 129km입니다. 소산(簫山)현을 가로질러 도산(塗山)으로 들어가 산행을 하시면 됩니다.
눈앞에 펼쳐진 절강 전도에 내가 움직일 경로가 그려진다. 그리고 증강현실로 내가 당장 움직여야 할 방향이 화살표로 떠오른다.
“그리고, 응5로 선행 정찰.”
- 예, 리퍼. 응5 임무 변경합니다.
“간다.”
말과 동시에 전신을 앞으로 기울이며 바닥을 박찬다.
- 윙슈트 전개.
상체가 바닥에 닿기 전에 피풍의가 펼쳐지며 양력이 내 몸무게를 감당한다.
피풍의를 제어하는 것은 이제 농꾼이 담당한다. 내공으로 피풍의를 펼치는 것이 아니라 피풍의에 내재된 전자석이 전기로 가동되며 피풍의의 형태가 고정된다. 나는 오롯이 달리는 것에 집중할 수 있었다.
순식간에 전당강(錢塘江)을 건너서 평지를 내달린다.
소산현 현도를 지나쳐서 도산에 들어서는데 일각이면 충분했다.
숲속을 헤치며 내달릴 생각이 없기에 바로 바닥을 박차고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숲속의 거목을 박차면서 숲 위를 내달렸다. 내가 그렇게 농꾼의 길 안내를 따라 거리를 절반쯤 줄였을까?
- 리퍼, 응5가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잠시 발을 멈춘다. 경공을 사용하는 등 공력이 활성화 된 상태에서 호신강기를 억제하는 것은 아직 나에겐 무리다.
바닥에 내려앉으니 피풍의가 접힌다. 공력을 억제하자 응5가 보내오는 영상이 눈 앞에 펼쳐진다.
확실한 영상이 아닌 뭔가 사물의 윤곽만 그려지는 화면이다.
- 신호의 발신 위치가 동굴 속이라 꿈틀이를 들여보냈습니다.
응5의 새끼 드론 꿈틀이의 초음파 탐지로 주변 공간을 재현한 영상인 것이다.
사람 윤곽이 넷이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하나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하나, 그리고 그런 둘과 일 장 정도 거리를 두고 서 있는 둘.
쓰려져 있는 쪽이 고장명이다. 추적 신호가 그쪽에서 흘러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젠장. 뭔 일이야.”
절정 무인이나 되는 놈이 저 꼴이 되었다는 것은 사달이 나도 크게 났다는 소리다.
무거운 두 개의 안테나는 숲속 바닥에 파묻었다. 파묻은 위치를 지도에 표시했다.
“꿈틀이를 고장명에게 배정, 응5는 동굴 근처를 정밀 수색한다. 동굴 출입자가 이동을 시작하면 추적 우선으로. 꿈틀이의 정보는 현재 사용 가능한 음파 통신 채널로 실시간 수신이 가능하지?”
- 가능합니다.
농꾼의 대답과 동시에 억제하고 있던 공력을 활성화했다.
“달린다.”
- 윙슈트 전개.
피풍의가 펼쳐지고 내 몸이 허공을 갈랐다. 무거운 안테나가 없는 만큼 속도가 더 빠르다.
그렇게 내달리는 와중.
- 이름?
갑자기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다.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 꿈틀이가 전하는 동굴 안의 상황이다.
- 빌어먹을 것들, 도대체 몇 번을 묻는 거야.
힘없이 투덜거리는 것은 고장명의 목소리다.
그 말에 고장명 앞에 앉아 있던 윤곽이 손을 들었다.
쫘악!
- 난 묻고, 넌 답한다. 이름?
- 고장명.
- 소속.
- 멸왜단 뇌응대.
기본적인 심문이 쭉 이어졌다.
- 뇌응대주의 이름은?
- 이도연.
- 놈이 부리는 매의 수는?
그리고 놈들이 원하는 정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이것들이 노리는 것은 나다.
철산맹? 그럴 리 없다. 지금 멸왜단에게 뭔가 빌미를 준다면 그대로 갈려 나갈 게 뻔하다는 것을 그들이 모를 리 없다.
젠장, 어딘지 감이 안 잡힌다. 멸왜단 지척에서 저런 짓을 할 만한 놈들이라니.
고장명은 놈들이 묻는 말에 술술 불고 있었다. 제법 성깔 있는 고장명이 저렇게 협조적인 것을 보아 이미 고문은 끝난 상태다.
- 고장명의 몸 상태는?
내 질문에 동굴 안 중계가 잠시 끊겼다. 몇 분 후 다시 중계가 이어지며 꿈틀이가 초음파 스캔으로 알아낸 고장명의 상태가 시야 한쪽에 떠올랐다.
- 48시간 안에 적절한 치료를 받는다면 큰 문제 없는 상태입니다.
농꾼의 총평이다. 일반인이라면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상처들이지만 어쨌든 극도로 단련된 절정 무인이라 버틸만하다는 소리.
바닥을 박차는 발에 힘을 더했다.
- 일당으로 짐작되는 자들 넷을 더 발견했습니다.
농꾼의 보고와 동시에 동굴 근처의 지형도가 펼쳐졌다. 그리고 그 인근에 점 4개가 더 추가된다.
동굴을 포위하듯 네 개의 점이 사방으로 찍혀 있다. 지형적으로 동굴을 감시하기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저들의 시선을 피해서 동굴로 접근하는 것은 무리.
- 단순 시야로는 감지되지 않을 정도로 은신에 뛰어난 자들입니다. 적외선을 사용하지 않았으면 발견하지 못했을 겁니다.
매의 눈은 좋다. 응 시리즈는 생체 강화를 통해 더욱더 강화된 눈이다. 그런데, 그런 눈으로 찾지 못했다는 것은 보통 놈들이 아니다.
“죄다 스캔해서 추적 번호 부여해.”
- 예, 리퍼.
“응5가 놈들에게 들켰을 가능성은?”
놈들은 응 시리즈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놈들이다. 하늘 위를 날고 있는 매들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 꿈틀이 투입을 위해 동굴 입구 근처를 날았습니다.
관측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소리. 그런데 철수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호, 나를 잡겠다는 건가?”
내 무위는 고장명을 통해 이미 드러났다.
“초극 고수는?”
초극 고수를 잡으려면 같은 초극 고수를 동원할 수밖에 없다.
- 드러난 인원 중에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땅속은?”
온주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물었다.
- 응 시리즈가 지하를 관측하려면 지면과 접촉해야 합니다.
지금 상태에서 응 시리즈를 땅에 내려서게 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다.
“흠.”
그냥 총타에 지원을 요청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고장명은 확실히 죽는다.
별로 마음에 드는 놈은 아니지만 어쨌든 내 부하. 죽도록 놔둘 수는 없다.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나?”
놈들이 어떻게 나오든 여차하면 도망갈 자신은 확실히 있었다.
“동굴 1km 전방에서 멈춘다.”
- 10.3km 남았습니다.
그 정도 거리를 내달리는 것은 금방이다.
산중의 숲속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몸을 숨긴 놈들의 위치가 지도와 내 시야에 표시된다.
나는 그중 한 곳을 향해 조용히 몸을 움직였다. 우거진 수풀에 몸을 숨기고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인다.
대강 삼십 장 정도까지 거리를 좁혔다. 내 목표가 몸을 숨긴 곳은 숲속 바위 아래다.
농꾼이 증강현실로 표시하지 않았으면 거기에 누가 숨어 있는지도 모를 은신술이다.
= 이쪽을 다른 세 곳에서 관측이 되나?
손가락을 까닥여서 묻는다.
- 위치를 따져 보면 쉽지 않아 보입니다.
= 그럼, 이 녀석부터 조용히 제압하지.
놈이 숨은 곳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다른 놈들의 시선을 피하려면 뒤에서 구멍을 파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구멍을 파면 안에 있는 놈이 모를 수 없다. 그러니 구멍을 파기 전에 놈을 제압해야 했다.
이 상태에서 적당한 제압 방법이 있으니.
= 여기서 안의 놈 감전시킬 수 있지?
- 예, 리퍼.
몸에서 흘러나온 금속 이온이 벽력이 흐를 길을 만들었다.
- 준비 완료입니다.
농꾼의 대답과 동시에 검게 물든 손에서 벽력이 내달렸다.
그리고.
- 긴급 회피!
갑자기 피풍의가 내 전신을 뒤덮었다.
“야, 농….”
콰앙!
굉음과 함께 거센 충격이 전신을 두드리며 내 몸을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이건 또 뭔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