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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퍼 - 무공수확자-71화 (71/175)

71화

장철상의 어느 날(02)

눈을 뜨니 숲속 공터에 서 있다. 공터 한쪽에는 동굴이 하나 보인다.

눈에 익숙한 풍경. 사형이 만들고 사부님이 지금 들어앉아 계신 곳. 금정산의 풍경이다.

공주 부도 청도방 총타의 내 거처에서 잠든 내가 여기에 이렇게 서서 눈뜰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사형이오?”

내 목청껏 돋은 소리에 동굴 안에서 익숙한 얼굴이 나왔다. 나에게 사부님과 청도방을 떠넘기고 마귀와 한몸이 되어 강호로 튀어 버린 사형이다.

“며칠 전에 얼굴 봤잖아. 그런데 또 왜?”

“파머 그 마귀의 수작으로 꿈속에서 본 게 본 거요?”

“지금도 꿈속이다만?”

“됐고, 사형이 사부님 설득이나 좀 하시오.”

“응? 무슨 설득? 사부님이 왜?”

“사형이 보낸 왜구들의 수법 말이오.”

“호거술? 호거술을 사용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나? 내가 쓸 때는 아무 문제없었는데?”

“그거 수련하신다고 금정산에 들어가셨소.”

“호거술을 익힐 게 뭐 있다고…. 아 사부님은 그걸 안 하셨지. 여전히 생각 없으시다냐?”

“금주법(金鑄法) 말이오?”

금주법, 파머 그 마귀가 뿌린 마귀의 종자를 가진 사람만이 익힐 수 있는 수법이다. 물에 녹인 금속을 몸속에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몸에 입히고 변형시키는….

“그래, 금주법.”

“없으시니 금정산에 들어가신 거 아니오.”

금주법을 써서 금고(金鼓)를 만들 수 있으면 따로 수련할 필요가 없는 것이 호거술이다. 금고는 마귀가 만든 물건답게 사람 소리든 뭐든 죄다 낼 수 있으니 말이다.

내가 호거술을 익히는데 걸린 시간은 이틀이었다. 내 몸속에 자리 잡은 마귀의 종자가 내공 경로를 몸에 각인하고, 금주법으로 만든 금고로 나에게 알맞은 소리를 찾으니 더는 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사부는 금주법을 익히지 않으신 탓에 금고를 만들지 못하니 그 모든 것을 목청을 돋워 해결해야 했다.

끊임없이 울릴 수 있는 금고에 비해 사람의 목청은 얼마나 쉬이 지치는가 말이다.

아니 마귀의 종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사부도 나처럼 그 망할 귀신인 파머에 의해 마귀의 종자를 받아들였지 않은가 말이다.

어차피 버린 몸인데 거기에 금주법 하나 더해진다고 뭐가 달라진다고 저러시는지.

“사부님에게 무슨 설득을 하라는 거냐? 무공 수련에 관련해서는 아무리 나라도….”

“사부님의 수련을 방해할 목적은 없소. 다만 그 수련 장소를 금정산이 아니라 총타로 해주십사 하는 거지.”

“우리 청도방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냐?”

사형의 말에 기가 찼다.

“없을 것 같소? 파룡당을 박살내고 청도방이 들어섰소. 하지만 우리 청도방이 파룡당처럼 공주부 전체의 패권을 움켜줬소? 아니오. 공주 부도의 패권만 잡았지. 그런 이유가 뭐요? 힘이 모자라고 사람이 모자란 탓 아니오! 어찌어찌 파룡당을 물리쳤지만 초극 고수 세 명이 버티던 파룡당과 초극이라고는 사부님 한 분뿐인 청도방의 위엄이 같을 수 없음을 당시 사형도 알았기에 그저 공주 부도 패권만으로 만족했던 거 아니오!”

“그야 그렇지.”

“그런 청도방이오만, 지금 상황은 어떻소? 파룡당 파멸의 주역이랄 수 있는 사형은 어느 순간 사라지고 그 사제인 내가 사형의 자리를, 소방주의 자리를 꿰찼소. 그런 마당에 청도방 유일의 초극 고수인 사부님은 수련한답시고 코빼기도 안 보이고 있소! 이걸 본 다른 흑도들이 어떤 생각을 할 것 같소!”

“파룡당을 날려 버린 귀계를 짠 대제자의 뒤통수를 그 사제가 후려쳤고, 이에 상심한 청도방주가 방의 일에서 손을 땠다?”

내 말에 사형이 바로 핵심을 짚는다. 여타 흑도들이 충분히 그렇게 오해할 만하지 않는가. 아니 오해로 끝나지 않는다. 이건 그들이 보기에는 틈이었다.

잡아먹힐 틈을 보이는 상대에게는 이빨을 드러내 주는 것이 흑도의 생리 아닌가.

“이제 이 동생이 사부님을 설득해 달라는 연유를 아시겠소?”

사부님이 총타에 계셔 주기만 하면 저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여타 흑도들과 괜한 싸움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있을까?”

이 인간 다 알아듣고서 또 뭔 소리야!

“사형!”

“지금 청도방을 어떻게 해볼까 하는 작자들 말이야, 파양호 수채를 등에 업은 길안부 복로방은 아니잖아? 기껏해야 남안부(南安府)의 흑도 녀석들일 텐데, 그 정도면 솔직히 사제 선에서 정리 가능한 녀석들 아니야?”

“그들 중 초극….”

“파룡당에 눌려서 공주부를 넘보지 못한 녀석들이라고. 그런 녀석들이 공주 부도로 기어들어 온다 해도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사형은 이 아우가 초극 고수를 상대할 수 있다고 봅니까?”

“호거술 다 익혔다며? 그럼 이제 너도 강기 쓰잖아. 뭐가 문제야?”

너무나 쉽게 나오는 대꾸에 기가 찼다. 자기 일 아니라는 건가?

“사형 말을 너무 쉽게 한다 생각하지 않소? 진짜 강기와 그런 편법이….”

“장철상!”

사형이 내 말을 끊었다.

“지금 청도방 상황이 어떤지 너도 알고 나도 안다. 그런데 우리 둘이 아는 것을 사부님은 모를까?”

모르고 계실 리가 없다. 나나 사형이나 무공뿐만 아니라 머리 굴리는 방법까지 사부에게 배운 것이니 말이다.

“사제가 할 수 있다 보시기에 사부님은 청도방을 맡기고 금정산에 들어가신 거야. 이번 기회에 놈들을 상대로 청도방 소방주의 위엄을 강서에 떨쳐야지.”

“…….”

기가 차서 뭐라 대꾸할 말을 찾고 있자, 사형이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공방에서 안테나 하나 나올 거다. 그거 총타에 잘 세워 놓고. 그럼 계속 고생해라. 사제.”

사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변의 풍경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눈을 뜨니 익숙한 천장이 보인다. 청도방 심처에 자리 잡은 내 방인 것이다.

“사제가 좀 도와달라는데 답이 계속 고생해라? 너무 하잖아! 사형!”

아니 내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자고 이러는 건가? 청도방은 우리 사문의 터전이다. 사부님이 세우시고 사형이 돌아올 공간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넌 할 수 있다. 잘 처리해 봐!’라는 무성의함이라니! 달에 은자 천 냥을 가져가잖아! 최소한 가져가는 은자만큼의 관심은 보여야 하는 거 아니냐고! 아니 그 와중에 또 자기 필요한 일은 시키고 말이야!

감정을 안 가지려고 노력해 보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

“둘 이상이 찾아오면 그때는 한 손 보태마. 하지만 하나라면 네 선에서 정리해야 하는 것이 옳다.”

금정산에 간 김에 사부님에게 총타로 돌아가심이 어떠냐고 말을 꺼내 봤다.

“네 사형은 금주법으로 만들어 낸 벽력을 검기와 합일하여 초극 고수의 강기를 상대했다. 그런데 너는 거기에 강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호거술까지 익히고 있다. 무엇을 그리 두려워하느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별수 없이 ‘공방’이라 이름 붙은 마귀의 구덩이에서 ‘안테나’라는 철봉만 짊어지고 청도방으로 돌아왔다.

내 몸속에 자리 잡은 마귀의 종자가 일러주는 대로 총타의 전각 지붕에 안테나라 불리는 철봉을 설치했다. 처소로 돌아와 쉬고 있자니 갑작스레 눈앞으로 다른 풍경이 떠올랐다.

객잔의 객방으로 보이는 방 안에서 자리에 앉은 노인을 세 명의 장정이 둘러싸고 있는 광경이다.

“하아, 또?”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온다. 내 안의 마귀가 이런 광경을 내 눈앞에 띄우는 이유는 하나다.

청도방을 어떻게 해보려는 수작을 부리려는 작자들이라는 소리.

마귀 파머의 손을 거친 동물들은 까치와 까마귀 같은 날짐승들은 물론이고 고양이나 쥐새끼들도 있었다.

공주 부도는 그런 파머의 손길을 거친 동물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물샐 틈 없는 감시망을 이루고 있다.

세 장정에 대한 내용들이 눈앞으로 흐른다. 그들의 골격과 근육에 대한 것들이다. 대강 단련 정도를 보면 죄다 절정은 되는 자들. 하지만 노인에 대해서는 어떤 정보도 없다.

마귀 파머의 손을 탄 동물들이 그 육체의 단련 정도를 꿰뚫지 못한다는 것은 노인의 무위가 초극지경이라는 증거다.

“젠장! 초극 고수라니!”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귀를 기울인다. 그냥 지나가는 무인들이기를 기대하지만 그럴 리 없다.

“알아보니 어떻던가? 소문 대로던가?”

노인의 물음에 세 명의 장정 중 사십 대로 보이는 자가 입을 열었다.

“예, 사부. 청도방의 원 소방주였던 섬패 이도연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고, 청도방주 패력도 조문형도 부재 중인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역시 사부의 부재 소식을 듣고 이상한 오해를 하고 달려온 작자들이다.

“그렇다면 현 청도방의 핵심 전력은 어느 정도지?”

“방주가 자리를 비운 탓에 현 소방주인 옥안쾌도가 수장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만, 옥안쾌도는 아직 서른이 되지 않은 나이로 그 무위는 절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방의 중진인 절정 무인들이 열다섯, 하지만 그 중 열둘이 청도방에 망한 파룡당의 잔당들입니다.”

“파룡당의 잔당들이라면 현 청도방에 불만이 많을 수도 있겠군.”

“불만보다도 불안해 할 가능성이 크지요.”

“들쑤셔 볼 만한 자들이라는 말이군.”

“예.”

더 볼 것도 들을 것도 없었다.

“저것들 어디야?”

내 말에 마귀의 종자가 반응한다. 눈앞으로 공주 부도 지도가 떠오르며 저들이 묵고 있는 객잔을 누런 점으로 표시한다.

“밖에 누구 없느냐?”

“소방주님 부르셨습니까.”

“방의 중진들을 대청으로 모두 불러!”

“예.”

문밖의 기척이 멀어져 갔다. 나는 지필묵을 꺼내 마귀의 종자가 보여준 그 넷의 얼굴을 그렸다.

절정 무인의 날카로운 눈썰미와 정확한 손속은 그림을 그릴 때 상당한 도움이 된다.

“소방주님, 대청에 중진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수하의 보고에 직접 그린 용모파기를 들고 대청으로 갔다.

열다섯 청도방 중진들에게 네 장의 그림을 돌려보게 했다.

“이 네 명에 대해 아는 자 있느냐?”

“소방주, 속하가 아는 얼굴이 하나 보입니다.”

외당 당주 월윤이다.

“월 당주, 말해 보게.”

“속하가 강서에서 자리 잡기 전 호광에서 활동한 적이 있는데, 그쪽에서 이 노인을 잠시 본 적이 있습니다. 침주(郴州) 방면의 수로에서 놀던 인물로 침수(郴水)의 세 수로를 깔고 앉았다 하여 ‘진삼천(鎭三川)’이라 불리던 초극 고수입니다.”

호광 수로에서 놀던 자라면 동정호 수채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동정호 수채와 깊게 관련된 자가 강서의 물길을 노릴 수는 없다. 강서 물길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파양호 수채의 심기를 건드는 일이니 말이다.

“도를 넘은 짓을 하다가 형산파의 심기라도 건드린 모양이군.”

호광의 수로는 장강 삼채 중 하나인 동정호 수채가 잡고 있다지만, 호광 남부는 정도 팔파 중 일원인 형산의 속가들이 넓게 퍼진 곳이다. 형산의 속가들에게 내쫓긴 것이 아니면 침수의 지배자가 공주 부도에서 알짱거릴 이유가 없었다.

“진삼천의 패당들이 공주 부도에 들어온 것입니까?”

월 당주가 물었다.

“그래.”

“본 방을 노리고 있다는 것입니까?”

“본 방의 소식을 염탐하는 것에 다른 이유가 있겠나?”

남안부의 흑도들이 우리 청도방을 찔러 보기 위해 끌어들인 것이 분명했다.

“방주께 알려야 됩니다.”

“소방주, 속히 방주를 모셔 와야 합니다.”

방의 중진들이 앞 다투어 말한다. 나도 내심 저들과 같은 의견이지만, 초극 고수 하나 정도의 위협은 알아서 처리하라 하신 사부 아닌가.

“진삼천 정도로 사부님의 청정을 깰 수 없다.”

내가 진짜 초극을 상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해봐야 했다.

“소방주! 상대는 초극 고수입니다!”

“본 방 중진들 열다섯이 힘을 합한다면 이길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최소 절반은 죽을 겁니다!”

저게 옳은 반응이다. 하지만 옳다고 그냥 놔두면 절반은 진삼천에게 붙을 것이 뻔하다.

이럴 때 방법은 하나다.

금주법으로 내 손을 금속으로 물들이며 그 손으로 칼자루를 잡았다.

챙!

발도와 동시에 손에 금고를 만들고 호거술을 발휘한다.

오올~!

금고의 울림과 동시에 도신에 맺힌 도기가 휘황한 광채를 뿜었다. 도기가 낼 수 없어야 하는 광채!

“강기!”

“도강이다!”

“소방주께서 도강을!”

“초극 지경!”

그 광경에 중진들이 모두 입을 딱 벌렸다.

“내가 진삼천을 상대한다. 아직도 사부님의 청정을 깨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가 있나?”

호거술로 만들어 낸 가짜 강기도 일단은 강기. 눈앞에 강기를 들이밀며 하는 내 말에 반대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그래 철상아 한번 해보는 거다! 해보고 안 될 거 같으면 금정산으로 튀어서 사부님 모시고 오면 된다.

사형과 파머 그 마귀가 남긴 의익행(衣翼行)의 경공은 상대가 초극 고수라도 충분히…. 도망갈 수 있겠지? 있을 거야.

젠장! 사부님도 사형도 너무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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