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절강행(55)
나를 둘러싼 것은 초극 넷에 절정 열여섯. 초극 넷은 근거리에서 나를 둘러싸고 절정들은 넷씩 짝을 지어 나와 대충 십여 장쯤 거리를 두고 있다.
“동도끼리 기어이 피를 보자는 거요?”
내가 인상을 쓰자 양묵일이 미소를 지었다.
“본가는 절강 무림과 평온한 동도가 되기를 원하기에 이런 수고를 하는 것이오.”
무슨 개소리를….
설마, 신창양가가 이 지랄을 하는 이유가 육가장과 같은 건가? 멸왜단이, 보타산 속가가 향후 남직례로 영향력을 넓히는 것을 막아 보자는?
아니 육가장을 잡아먹지 않고 놔둔 것을 보면 몰라? 몇 년 뒤면 몰라도 멸왜단에게 당장 그럴 힘도 여유도 없다니깐!
게다가 육가장을 후려칠 때 사부와 사제의 존재를 밝혔잖아. 나 하나 죽인다고 절강 무림에 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생각해 보니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육가의 가주와 진우탁 뿐이었어. 둘이 입을 다문다면 소문날 이유가 없잖아!
하지만 모든 게 나를 끌어내기 위한 수작이라 쳐도 뭔가 이상하잖아. 진혜예는 진짜 죽을 뻔….
- 리퍼!
농꾼의 경고성과 함께 코앞으로 강기에 휩싸인 창이 들이닥친다.
캉!
도격으로 후려치니 허공으로 튕겨 나가는 투척용 창?
넷씩 짝을 지은 절정 놈들이 짊어진 것이 투척용 창이다. 저것들 합공을 익힌 것들이다. 셋이 한 놈에게 공력을 몰아주고, 한 놈이 그 공력을 이용해 투척용 창을 던지는 것이다.
사방에서 투척용 창들이 쏟아진다. 일단 놈들이 무슨 생각으로 이 지랄을 하는지는 이 자리를 끝낸 다음 생각하자!
“타압!”
쩌쩌쩌쩌쩡!
강기로 그려 낸 벼락의 그물이 쏟아지는 창들을 튕겨 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초극 고수 넷이 나를 향해 창질을 한다.
그야말로 빛살처럼 찔러 드는 창날들. 정면에서 목을 노리는 창날을 후려치고, 척추를 노리는 창날을 칼을 뒤로 돌려 걷어내고 옆구리를 노리는 것은 빈손으로 밀어낸다.
칼이 닿는 곳은 칼로, 손이 닿는 곳은 금속으로 코팅한 손으로 막아낸다.
나는 미친놈처럼 칼과 손을 휘둘러 방어를 하고 있지만 내 사방을 둘러싼 신창양가의 넷은 느긋한 얼굴로 손과 발을 격하게 놀리며 창을 찔러댄다.
- 리퍼!
농꾼의 경고. 머리 위로 떨어지는 투척용 창이 두 개!
카캉!
급히 머리 위를 지나는 도격을 그려 튕겨 내지만 그 사이에 섬전 같은 찌르기가 내 다리 사이로 파고든다.
급히 몸을 비틀고 발을 놀려 창날이 다리 사이가 아닌 무릎 위를 지나가게 한다.
창날이 다리 사이에 끼어들면 발이 봉쇄되는 것과 다름없다.
머리 위로 다시 투척용 창이 떨어진다. 하지만 내게는 농꾼이 있다.
주위 놈들의 공격을 막으면서 창을 튕겨 내는 적절한 궤적을 순식간에 계산하고, 농꾼의 안내에 따라 칼을 휘둘러 막아낸다.
- 밖에서 저들이 창을 던지고 근접한 초극 넷이 리퍼를 낙하지점으로 몰아가는 방식입니다.
근접한 넷은 일 장 길이의 창을 들고 나의 접근을 막고 있다. 상대가 둘 정도면 어떻게 기회를 보고 거리를 좁힐 수 있겠지만 넷이다.
내가 크게 움직이려 하면 다른 놈이 창을 찔러 내 움직임을 막거나 칼을 돌리게 한다.
제일 귀찮은 것이 다리 사이로 찔러 넣어 내 걸음 자체를 막는 수작이다. 다리 사이나 팔과 몸통 사이로 창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면 바로 창대에 몸이 얽혀 들어 움직임을 봉쇄당하니 그건 피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칼의 거리로 들어가 제대로 된 칼질을 하기 힘들어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쏟아지는 창격과 투창을 막아내며 시간을 보낸다. 이렇게 체력과 집중력을 소모시켜 피해 없이 나를 잡겠다는 수작. 솔직히 창에 몇 번 찔릴 각오만 하면 이 정도 협공을 깨는 것은 일도 아니다.
물론 그렇게 칼의 거리로 들어서면 이 진형이 바뀔 가능성도 크다. 그리고 이 넷이 합공을 익혔다면 나는 사자 아가리에 자청해서 대가리를 들이미는 꼴이 된다.
솔직히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한 것은 저자들이다. 그러니 내가 괜한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
= 어디쯤이야?
- 40초 안에 도착합니다.
내 말에 농꾼이 바로 숫자를 띄워 초읽기를 한다.
쏟아지는 공격을 열심히 막고 있자니 숫자가 0이 되었다. 그 순간 나를 둘러싼 포위망의 북쪽과 서쪽이 무너져 내렸다.
거리를 두고 창을 던지던 두 방향의 절정 무인들이 쓰러짐과 동시에 각 방향에서 튀어 나온 그림자 하나가 각기 눈앞에 있는 초극 고수의 뒤를 덮쳤다.
“위험!”
“적이다!”
맞은편의 창잡이 둘이 급히 경고성을 내질렀지만 그림자의 표적이 된 창잡이들은 어떤 대응도 하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죽이지는 마세요!”
내 말에 두 그림자가 내 옆을 스쳐 지나며 각기 자신의 정면을 덮쳐들었다.
“타합!”
“하앗!”
신창양가의 두 초극 고수가 전력을 다해 자신의 절기를 토해냈지만 단숨에 창대가 잡히고 제압당한다.
“흩어져!”
여덟의 절정 무인들이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몸을 날려 도망치려 했지만….
피피피핑!
“도망가면 이번에는 척추에 박아주지.”
막강한 기세를 품고 순식간에 곁을 스쳐 지나가는 무엇과 그 뒤를 잇는 협박에 몸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피 보기 싫은 사람에게 피 보기를 강요할 것 아니라면 얌전히 이쪽으로 오게.”
멀쩡한 신창양가의 절정 무인 여덟을 한자리로 불러 모으는 그림자는 도화도주 황학약이고.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 더는 볼 것도 없지 않나? 그냥 매를 빌려 주는 것이 어떤가.”
다른 하나의 그림자는 당연히 멸왜단주 진우탁이다. 이 둘은 내가 신창양가 사람들과 양주로 떠나자 은밀히 그 뒤를 따른 것이다.
백 리 정도의 거리를 격했으니 신창양가 일행들이 눈치 챌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역시 둘 다 예의가 바르단 말이야. 늙은이 일 안 시키려고 하나도 안 놓치는 것 보면.”
히죽거리면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항주 흑도의 조구흥이다. 그가 응7을 이용하여 나와 소통하고 두 사람의 눈이 되었기에 백 리 거리를 격하는 미행이 성립된 것이다.
“일단, 이 작자들 데리고 총타로 복귀하지요.”
신창양가 혈족이 분명한 작자들이 조사를 위해 파견되는 나를 죽이려 했다. 상황이 이러니 내가 신창양가로 갈 필요가 없어졌다.
내가 신창양가의 쌍둥이를 들쳐 메자 진우탁이 남은 초극 고수 둘을 들쳐 멨다.
“기절한 동료들을 한 놈씩 업고 가자.”
황학약의 말에 신창양가의 절정 창잡이 여덟은 쓰러진 자신의 동료들을 하나씩 둘러업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
“내일 정오쯤에 도착한다더니 빨리 왔구나.”
신창양가의 당대 가주인 창정(槍頂) 양심청은 자신의 거처로 찾아온 양심관을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
“가주, 독대를 청하오.”
하지만 양심관의 얼굴은 양심청과 달리 아주 굳어 있었다. 심각한 그의 얼굴에 양심청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출입을 통제하고 단속해라.”
양심청의 말에 그의 거처에 몸을 숨기고 있던 호위들이 부산스레 움직였다.
“어떻게 된 일인가?”
“내가 묻고 싶은 말이오. 가주!”
“무슨 소리인가?”
“뇌응대주가, 벽력응주가! 절강 무림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잘 아시지 않소이까! 그가 죽으면 멸왜단이, 절강 무림이 그냥 있을 것 같으오! 진짜 절강 무림과 전쟁이라도 하실 생각이시오!”
양심관의 고성에 양심청은 그저 눈을 껌벅였다.
“도대체 무슨 소린가? 알아들을 수가 없군. 차분히 말해 보게.”
“사사혈창대(賜死血槍隊)!”
양심청의 말에 양심관이 또박 하니 말했다.
“사사혈창대가 왜? 설마, 영파부에서 사고를 친 것이 그들이었다는 건가?”
양심청의 눈이 커졌다.
“사사혈창대를 보내 벽력응주를 데려간 것이 가주가 아니란 말이오?”
양심관이 이를 갈 듯 물었다.
“하아, 난 또 영파부에서 사고를 친 게…. 그런데 사람 데려오는 일에 사사혈창대가 움직일 이유가 없잖아?”
“…….”
가주의 반응에 양심관의 인상이 구겨졌다.
“사사혈창대가 벽력응주를 데려갔단 말인가? 도대체 누구 명을 받고!”
가주 양심청도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듯 언성이 높아졌다.
“가주께서 보낸 것이 아니었소?”
“내가 벽력응주를 죽이려 할 이유가 있나?”
“그들은 가주의 명을 받았다 했소!”
“나는 그런 명을 한 적 없네.”
“가주의 직인이 찍힌 척살령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것이 그들입니다.”
“누가 가주의 직인을 도용했단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양심청이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가주의 직인을 만지며 물었다.
당대 가주의 별호는 창정이다. 세상 모든 창잡이들의 우두머리라 칭해질 정도의 고수. 창으로 천문위가 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목에 걸린 물건을 마음대로 빼가고 다시 돌려놓는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일단 그들을 불러들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렇지, 당사자들에게 듣는 게 가장 좋겠어.”
바로 지급(至急)의 명령서가 만들어지고 전서응이 날았다. 하지만 날이 밝도록 아무런 회신이 없었다.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 하지?”
“설마, 태상가주께서….”
“물러나신 아버지가 왜?”
양심관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에 양심청이 눈을 부릅떴다.
“묵일, 묵월 형제가 가주의 명을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이 그럴 리가….”
“그렇다면 어떤 상황이겠습니까? 사사혈창대의 전력으로 벽력응주에게 당했을 리도 없잖습니까?”
“그렇지.”
“벽력응주가 몸을 빼내 그 뒤를 쫓고 있다 해도 지급의 소환 명령이었습니다. 임무를 포기하고 돌아와야 할 상황이지요. 하지만 돌아오기는커녕 아무런 연락이 없습니다. 그러니 태상가주께서 따로 명을 내렸을 경우밖에 없지 않습니까.”
“하아, 우리끼리 떠들어 봐야 답 나올 일이 아니다. 아버지를 뵈어야겠어! 따라오게!”
양심청이 양심관과 함께 자신의 거처를 나섰다. 심처에 마련된 전대 가주의 처소로 움직였다.
“아버지, 청입니다.”
“가주 자리 앉아서 바쁜 놈이 어쩐 일이냐. 들어오너라.”
처소 안에서 들려온 답에 둘은 안으로 들어섰다.
“같이 온 건 집법당에 있는 관이 아닌가?”
“백부를 뵙습니다.”
신창양가의 전대 가주 구민신창 양성휘의 말에 양심관이 예를 올렸다.
“무슨 일이냐? 집법당에 있는 관이랑 같이 오다니. 혹여 내 잡혀 갈 만한 일을 했다는 거냐?”
양성휘가 히죽거리며 농을 건네는데 받아 주는 사람이 없다. 아들놈과 조카 놈이 아주 심각한 얼굴만 하고 있을 뿐.
“가문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양성휘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아들과 조카가 아니라 공무로 찾아온 가문의 가주와 집법당 부당주를 대하는 태도가 된 것이다.
“아버지, 혹시 최근에 사사혈창대에게 따로 시킨 일이 있으십니까?”
“사사혈창대?”
가주의 말에 양성휘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묵일과 묵월, 쌍둥이 형제에게 따로 시키신 일이 있으신지 묻는 겁니다.”
양심청이 아버지가 알기 쉽게 다시 물었다.
“그 둘이라면 제 애비 가고 난 다음에 여기 발 끊은 지 오래됐소. 그 녀석들이 무슨 사고라도 쳤소이까?”
양성휘의 말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양심청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버지도 아니시다면, 도대체 누가!”
“도대체 무슨 일이오?”
“누가….”
양성휘가 물었지만 양심청은 대답보다 해답을 찾기 위해 골머리를 잡고 있었다.
“부당주, 도대체 무슨 일이오?”
양성휘는 가주가 자신의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자 집법당 부당주에게 고개를 돌렸다.
“일의 시작은 멸왜단의 추궁 서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본가의 누군가가 멸왜단주의 고명딸을 암습했으니 범인을 내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금시초문의 일이라 제가 가주의 명을 받고 조사대를 꾸려 멸왜단으로 향했습니다.”
“멸왜단주면 우탁이 아니오? 우탁이 딸을 본가의 혈족이 암습했다고? 본가에서 그럴 이유가 없지 않소?”
“멸왜단에서 본가의 정안각 탐안들을 억류해 둔 상태였습니다. 탐안들에게 확인하니 본가의 명을 받고 합류한 혈족으로 추정되는 인원이 탐안과 함께 영파부로 들어갔고, 암습 사건 직후 종적을 감추었답니다.”
양심관이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사실들을 나열했다.
“습격이 있었던 것은 분명했습니다. 진 소저의 상처 또한 목숨이 위험할 정도였던 것을 확인했고요.”
이야기는 쌍둥이가 포함된 사사혈창대의 이야기까지 주욱 이어졌다.
“그래서 그 벽력응주란 아이는 어떻게 되었소?”
“사사혈창대와 연락이 끊긴 탓에 생사를 알 수 없습니다.”
“죽었든 살았든 이대로 두면 멸왜단이, 절강 무림이 들고 일어날 일이 된다 그 말이구려?”
“예.”
집법당 부당주의 대답에 양성휘는 신창양가 당대 가주에게 고개를 돌렸다.
“가주!”
짧고 굵은 부름에 양심청은 답 안 나오는 문제에서 벗어났다.
“예, 아버지.”
“가주께서는 집안을 단속하시오. 절강 무림은 이 늙은이가 어찌해볼 테니!”
서생원이 보내온 영상에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신창양가도 누군가에게 놀아났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