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절강행(57)
멸왜단에게 수작을 부린 배후를 알았으니 이제 움직여야 할 때다.
수확 대상자가 셋이나 포함된 적들이다. 천문위 하나에 초극이 둘. 그것만 해도 나 홀로 어떻게 해볼 상대가 아닌데, 거기에 창정 양심청의 뒤를 친 흑의인 열둘도 있다. 합공을 익힌 듯한 초극 열둘이라니 토 나오는 전력이다.
하지만 진우탁을 움직일 수 있고, 절강 무림을 움직일 수 있으니 크게 걱정은 안 된다.
신창양가? 신창양가는 걱정할 필요 없다.
= 구민신창은?
이쪽에는 신창양가의 전대 가주인 구민신창이 있으니 말이다.
- 반 각 전에 진우탁, 황학약과 대면했습니다.
이제 슬슬 나를 부르러 올 때가 됐는데….
“대주, 단주께서 부르십니다.”
그 말에 얼른 몸을 일으켜 단주 집무실로 향했다.
“단주, 뇌응대주입니다.”
“들어오게.”
진우탁의 말을 따라 집무실로 들어서니 농꾼의 말대로 황학약과 구민신창이 같이 있었다.
“뇌응대주? 자네가 벽력응주 본인인가?”
구민신창이 나에게 물었다.
“멸왜단에서 뇌응대를 맡고 있고, 절강의 동도들이 ‘벽력응주’라 부르는 이도연이 신창양가의 전대 가주이신 구민신창 양 노 선배를 뵙습니다.”
“아주 멀쩡한 모습이 보기 좋구먼. 다행이야, 다행!”
구민신창이 밝은 얼굴로 내 인사를 받았다.
사사혈창대에게 내가 죽기라도 했다면 절강 무림과 전쟁을 해야 할지도 모를 상황인데, 내가 사지 멀쩡한 모습을 보였으니 저러는 것이 당연하다.
“험, 이렇게 당사자가….”
“양 노 선배께서 이렇게 본단을 찾으신 이유는 최근 신창양가에서 일어난 가주 명령 사칭 건 때문이지요?”
오대세가의 전대 가주이자 무림 대선배의 말을 자르는 아주 시건방진 짓이지만, 뻔한 이야기 들어 줄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여타 이유야 어쨌든 신창양가가 지금 나나 멸왜단에게 큰소리칠 입장이 아니지 않은가. 솔직히 이럴 때 아니면 구민신창 같은 무림의 대선배에게 언제 큰소리를 내보겠느냔 말이다.
“그걸 어찌 아는가!”
구민신창도 내 무례보다는 내가 말한 내용에 더 관심이 가는 모양이다.
“사칭이라고? 뭔가 더 알아낸 것이 있다는 말이군!”
진우탁이 나를 보며 눈을 번뜩인다.
“알아낸 게 있으면 빨리 말해 보게.”
황학약이 그에 동조해서 나를 재촉했다.
“진혜예 부대주를 암습한 실행범은 신창양가의 ‘양유경’이라는 자였습니다.”
“본가의 유자 돌림이라면 방계 혈족인데? 영파에서 일을 벌인 자는 상당한 실력을 보였다 들었….”
“양 노 선배, 손자 중에 ‘양언직’이라고 있지요.”
“둘째 놈의 장남이네.”
내가 또 싹둑 하고 말을 잘랐지만 이번에도 신경 쓰지 않는 구민신창이다.
“양언직이 그를 ‘사형’이라 부르더군요.”
“하아, 방계의 조카 중에 그런 고수를 키워 내고 언직이 녀석을 제자로 거둬들일 정도의 고수가 있었단 말인가?”
구민신창이 아쉬움의 탄성을 터트렸다. 어찌 됐든 진혜예의 목숨을 앗아갈 뻔한 자가 양유경이다. 진우탁이 그냥 놔둘 리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 양유경이라는 놈을 잡으면 이번 일의 배후를 캘 수 있다는 말이군.”
진우탁이 슬슬 살기를 피워 올리며 말했다.
“배후는 이미 알아냈습니다.”
“뭐?”
“과연 벽력응주로세!”
내 말에 진우탁이 눈을 크게 떴고, 황학약이 감탄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구민신창은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 단주, 일 안 하십니까? 제가 왜 말을 돌리는지 진정 모르시는지요?
나는 조용히 진우탁에게 전음을 날렸다.
“이 대주,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지금 딸 문제로 평정을 유지하기 힘드네. 그러니 신창양가와의 협상은 자네가 하게. 자네도 이번 일로 인해 피해를 봤으니 말이야.”
아, 이 인간! 나한테 그냥 밀어 버리잖아!
“배상을 원하는가?”
구민신창은 한때 신창양가의 가주 직을 맡았던 인물이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바로 알아들었다.
“당연한 것 아닌지요?”
어쨌든 신창양가의 인물들이 벌인 일에 멸왜단이 피해를 입었지 않은가.
“무엇을 원하나?”
“신창양가에서 관리하는 운하 구간의 통행료를 무료로 해주겠다는 일회성 증서를 연간 열 장씩 오 년 동안 제공해 주십시오. 그리고 멸왜단의 이름으로 표행이 운하를 통과한다면 통행료의 이 할을 감해 주시고요. 기간은 신창양가와 멸왜단의 동맹이 유지되는 동안으로 하지요.”
육가장에게 내걸었던 조건을 고대로 들고 와서 말했다. 육가장 때처럼 상호 불가침이 아니라 동맹을 내건 것이 다르지만 말이다.
- 이번 일과 관련된 놈들의 목은 왜 빼는가!
진우탁의 노성이 전음이 되어 귀를 파고들었다.
- 맡겼으면 좀 보고 있어요!
진우탁에게 전음을 날리며 눈을 부라렸다.
“끄응.”
진우탁이 못마땅하다는 표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흠.”
구민신창이 슬쩍 진우탁을 보며 신음성을 내뱉었다. 진우탁의 불만 가득한 신음을 다른 뜻으로 해석한 듯한 표정이다.
과하다고 보면 과한 요구일 수도 있지만 절강 무림 입장에서는 당연한 요구다. 신창양가 내부 사정이 어쨌든 신창양가가 절강 무림에 시비를 건 것은 사실이니 말이다.
“내가 당장 답해 줄 수 없는 것들이네. 가주와 상의를 해보고….”
“지금 당장 답을 해주셔야 합니다.”
내가 구민신창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허, 어린놈이 경우가….”
구민신창이 노성을 터트리려는 그 말마저 잘라 버렸다.
“애석하게도! 현 신창양가의 가주 자리는 공석입니다! 양 노 선배께서 결정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신창양가와 전쟁을 해야 하는 입장이란 말입니다!”
“뭐?”
“둘째 아드님께서 ‘양묵현’이라는 천문위와 손을 잡고 신창양가의 가주였던 첫째 아드님을 살해했습니다. 이 각 정도 전에요.”
“그게 무슨 소리냐!”
노성과 함께 구민신창이 내 코앞으로 들이닥쳤다.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내 양어깨를 으스러지라 움켜잡았다.
“무슨 소리냐 물었다!”
“양 노 선배 진정하시지요!”
“그러다 애 잡습니다!”
세 천문위의 커다란 목청이 좁은 집무실을 가득 채운다.
= 농꾼, 잡힌 부분 코팅하고 최대 출력으로!
간신히 손가락을 까닥여 내 의사를 전했다.
“대답을….”
콰자자자작!
양어깨에서 뇌전이 튀며 구민신창의 양손을 떨쳐냈다.
빌어먹을 천문위! 초극 고수라면 열 번 넘게 기절할 전격을 한 번에 쏟아 부었는데 손 좀 밀어내는 게 다라니!
“이놈!”
구민신창이 막 다시 손을 쓰려는 찰나, 다른 두 천문위가 끼어든다.
“양 노 선배!”
“진정하시오!”
두 명의 천문위가 양쪽에서 팔을 하나씩 붙드니 아무리 구민신창이라 해도 수가 없었다.
“둘째 아드님은 가주 살해범으로 양 노 선배를 지목했습니다. 아마 이삼일 안에 그렇게 소문이 퍼질 겁니다.”
“네놈, 어떻게 그 일들을 아는 것이냐?”
내 말에 구민신창이 이를 물며 물었다.
“제가 왜 응주라 불리는지 모르시나 봅니다?”
내가 구민신창을 보며 물었다. 진우탁이 대신 설명을 했다.
“이 대주는, 부리는 매들이 보고 듣는 것들을 자신도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양주로 가는 도중 습격당하자 자기가 부리는 매를 보내 신창양가를 감시하고 있었던 겁니다.”
“하아, 후!”
구민신창이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일을 열었다.
“나보고 그 이야기를 무작정 믿으란 말인가?”
증거를 원한다면 보여주면 될 일이다.
= 양심청 음성 데이터 땄지?
- 예, 리퍼. 확보된 상태입니다.
= 두 사람 대화 그대로 읊을 테니 알아서 목소리 변조해.
“아버지, 혹시 최근에 사사혈창대에게 따로 시킨 일이 있으십니까?”
양심청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사사혈창대?”
구민신창의 목소리로 말을 받는다.
“묵일과 묵월, 쌍둥이 형제에게 따로 시키신 일이 있으신지 묻는 겁니다.”
신창양가의 심처에서 오간 대화를 그대로 재현해 내니 구민신창의 눈이 커질 수밖에 없다.
“대단한 재간이군.”
구민신창의 인상이 침울해졌다. 첫째 아들이 둘째 아들에게 죽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심성과 손을 잡은 천문위, ‘양묵현’이라 했던가? 들어본 적이 없어 그러네.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있나?”
구민신창이 물었다.
= 농꾼, 양묵현의 프로필 띄워.
- 예, 리퍼.
“‘양성환’이라는 사람의 서자로….”
“그런 것이었군.”
프로필의 첫 줄을 채 다 읽지도 않았는데 구민신창이 뭔가를 알아낸 듯한 얼굴이 되었다.
“심성, 그 멍청한 놈이!”
양성환이란 사람이 누구기에 저런 반응인지 궁금하다.
진우탁을 보며 슬쩍 눈으로 묻자 바로 전음이 날아든다.
- 양성환은 양 노 선배가 절강에서 구민신창의 명성을 얻고 있을 때 신창양가의 소가주였던 사람일세.
구민신창에게 가주 자리 뺏긴 사람이란 소리다. 그러니깐, 그 아들인 양묵현은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서 이 짓을 벌였다는 소리가 된다. 그렇다면 제 아들을 가주 만들기 위해 형을 후려친 양심성은 그냥 놔둬도 뒤통수 맞고 뒈질 운명이라는 말이다.
“멸왜단이 내건 조건을 모두 수용하겠네.”
구민신창이 나를 바라보며 두 눈을 불태웠다.
“동맹으로 가문의 반도들을 제압하는데 도움을 달라는 것이지요?”
“그대로네.”
내 물음에 구민신창이 대답했다. 여기에 대한 내 대답은 하나다.
“단주님!”
멸왜단의 책임자는 뇌응대주 이도연이 아니라, 멸왜단주 진우탁이니깐.
구민신창의 고개가 자신에게 향하자 진우탁이 입을 열었다.
“황 사형, 심하게 손을 쓰셨소?”
“응?”
“잡아 놓은 양가 사람들 말이오.”
“아, 그 사사혈창대?”
잠시 어리둥절하던 황학약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몇 대 쥐어박긴 했지만, 몸 쓰는 데는 무리 없는 수준이지.”
그 작자들은 가주의 명을 받아 움직였다고 찰떡같이 믿고 있었다. 그러니 써먹을 수 있는 인원이다.
“그들에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하다 봅니다만, 인원이 더 필요합니까?”
진우탁이 구민신창에게 물었다.
“충분하네.”
구민신창의 대답과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로 사사혈창대를 풀어 줬다. 그들은 전대 가주인 구민신창에게 사정을 듣고 바로 합류.
그렇게 일행이 된 우리들은 쾌속선 한 척에 올라타고 양주를 향해 출발했다.
운하를 타면 사람이 미는 쾌속선은 눈길을 끌 수밖에 없기에 바다로 나갔다. 바다로 나가 장강 하류로 들어가면 양주로 가는데 아무런 무리가 없다.
그렇게 바다를 달리고 있을 때다.
- 리퍼, 수확 대상자 셋과 열둘의 초극이 신창양가를 벗어났습니다.
농꾼의 보고가 올라왔다. 그들은 신창양가 장악의 주역들 아닌가. 그들이 떼거리로 신창양가를 벗어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 반역의 주역들이 죄다?
- 양심성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떠오르는 화면.
“걱정하지 마시오. 꼭 모셔올 테니 장례 준비나 잘 하시구려.”
“믿겠소.”
양묵현의 말에 양심성이 두 손으로 공수의 예를 취하며 말했다.
짧은 대화였지만 수확 대상자들을 포함한 저들이 떼거리로 나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구민신창을 끝장내기 위해 나온 것이다.
= 응5를 수확 대상자들 감시로 돌려.
- 예, 리퍼.
구민신창의 몸에 추종향도 뿌려 놓았으니 저들이 추적을 하려면 못할 것도 없는 상황이다.
아니 배 타고 바다로 나와 버렸으니 추종향의 흔적은 멸왜단 근처에서 끊기게 되는 건가?
= 농꾼.
- 예, 리퍼.
= 구민신창의 몸에 묻은 추종향 지금 합성할 수 있어?
신창양가를 정리할 동안 저 작자들을 바깥으로 내돌 게 하는 것도 괜찮을 듯했기에 묻는다.
- 가능합니다.
= 그럼 합성해서 여기저기에 좀 뿌리자고.
계산만 잘하면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우리가 원하는 위치에 녀석들이 제 발로 찾아오게 만들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 리퍼. 급보입니다.
= 뭔데?
- 양언직이 사망했습니다.
“뭐?”
- NZ-11의 수확이 시작됩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