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절강행(67)
세 숙질은 서로 짜기라도 한 듯 몸을 뒤로 물리며 허리춤의 검 자루를 잡았다.
“이 허깨비 같은 것들은 뭐요?”
남궁화청이 물었다. 서생원 시리즈가 보낸 영상을 보고 하는 소리다. 눈앞의 현실과 구분하기 위해 반쯤 투명하게 비춰 주니 과학 지식이 없는 이 시대 사람들 눈에는 귀신이나 허깨비처럼 보이는 것이다.
“어디서 많이 본 광경 같지 않습니까?”
웃으면서 반문했다. 통신 벌레를 이용한 음파 통신 기법을 적용했기에 호신강기를 억제하지 않아도 연결되는데 무리가 없는 것이다.
“숙부, 아무래도 본가의 풍경 같습니다.”
“아는 얼굴들이 보입니다.”
남궁산천과 남궁호천이 침착하게 말했다. 남궁화청이 답을 원하듯 나를 본다.
“두 분 말대로입니다. 지금 남궁세가를 살펴보는 녀석의 시야입니다.”
놀란 눈을 하고 있는 세 숙질을 한번 둘러보고는 말을 이었다.
“녀석의 눈과 귀로 세가와 동맹에 해가 될 짓을 하려는 자들을 찾는 일. 그것이 세 분이 할 일입니다.”
화면을 옮기는, 서생원의 시야를 갈아타는 방법과 영상의 확대 축소, 음량 조절하는 방법 등을 가르쳐 줬다.
물론, 이들이 서생원과 접속할 권한이 있다 해도 서생원 시리즈의 모든 것을 활용할 수는 없다. 거기에 서생원 시리즈의 정체가 들킬만한 요소들은 제한된다. 이들은 모든 것이 매가 가진 능력이라고 알면 되니 말이다.
“세가로 돌아가기 전에 익숙해져야 할 겁니다.”
그렇게 그들과의 볼일을 마치고는 단주 집무실로 향한다.
= 명단과 명령 계통 확보했냐?
- 예, 리퍼.
대답과 동시에 사람들의 프로필이 떠올랐다. 남궁세가가 저 셋을 움직여 비밀리에 묻어 버린 자들이었다. 그중에서 써먹을 만한 프로필을 골랐다.
“단주, 뇌응대주입니다.”
“들어오게.”
대답이 들리기 무섭게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남궁세가에서 보낸 인원들은 만나보고 오는 것인가?”
“예.”
“남궁세가의 가세는 언제 발표하는 것이 좋겠나?”
언제 남궁세가의 약점을 찾을 수 있겠냐는 소리다.
“동맹의 이름이나 정하시지요. 멸왜단에 오대세가의 둘이 가담하는 동맹인데 이름도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남궁세가의 가입이 확정된 다음에 정해도 늦지 않네.”
약점부터 찾으라는 소리다.
“이 년 전에 일어난 영산 정가장의 혈사. 남궁세가에서 벌인 일입니다.”
“허.”
내 말에 진우탁이 얼이 빠진 얼굴이 되었다.
“거기 장주가 무당 속가로 알고 있는데?”
“남궁세가의 전대 인물이 남긴 유물 탓에 일어난 일입니다.”
“비인부전의 법도가 사람 여럿 잡은 것이군.”
“자세한 이야기는 보고서로 올리지요.”
“그렇게 해주게.”
남궁세가가 신창양가를 후려친 암중 세력 따위 없다는 진실을 알아내도 그 입을 다물게 할 약점을 잡았으니 남궁세가의 동맹 가입은 문제없이 이뤄질 것이다.
“나흘쯤 뒤에 남궁세가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거기에 맞춰서 이번 동맹에 대한 소문을 흘리라는 말이군.”
진우탁이 내 말을 바로 알아듣고 말을 잇는다.
“크게 소문을 낼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남궁세가 내의 인물들이 이번 동맹과 제가 그쪽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 정도면 됩니다.”
서생원들이 물어온 정보를 분석해 보면 이번 동맹 추진은 남궁세가 내에서도 은밀히 진행된 듯했다.
“자네는 남궁세가에도 문제가 있다 보는 건가?”
남궁세가에 불만 세력이 숨어 있다면 이번 동맹 소식과 내 방문에 어떤 식으로든 반응할 가능성이 컸다.
“오대세가 중 가장 역사가 깊은 남궁세가 아닙니까? 그런 남궁세가가 자존심을 접고 우리에게 손을 내미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풀숲에 뱀이 있나 없나 확인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풀숲을 두드려 보는 것이다. 뱀이 있으면 놀라서 튀어 나올 테니 말이다.
“알겠네, 남궁세가에 연락하지.”
***
“갑자기 삼자 동맹이라니, 자네는 뭐 들은 거 있나?”
“나도 신창양가와 멸왜단의 동맹에 본가도 합류한다는 이야기밖에 들은 게 없어.”
“가주께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흑도 놈들이 뭉치니 그걸 견제하자는 게 아닐까?”
“그런 것이라면 본가의 중진들과 사전에 말이 오갔겠지.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없었던 것으로 아네.”
“이번 동맹의 결성과 우리 일이 관련될 일은 없지 않은가.”
“보통이라면 그렇지. 하지만 벽력응주, 그 망할 작자가 지금 본가로 오고 있다고.”
“벽력응주와 우리 일이 무슨 상관이라고?”
“그 작자. 뭔가 찾아내는데 귀신 같은 작자 아닌가. 신창양가를 뒤집어엎으려고 했던 암중 세력도 그 작자가 끼어든 탓에 다 잡혔다고 하지 않나.”
“그거야 무슨 사건이 터졌을 때 이야기지. 그자가 본가의 장부를 뒤질 일도 없을 텐데 무슨 걱정인가? 설사 장부를 뒤진다 해도 그 같은 무인이 무엇을 알겠나?”
서생원 시리즈가 보낸 영상은 그것이 끝이었다.
“하아.”
한숨을 내쉬며 객잔 침상에 드러눕는다. 멸왜단을 나서 남궁세가로 출발한 지 이틀째다. 늦어도 내일 저녁이면 남궁세가에 도착할 모양새인데 깔아놓은 감시망에 걸려드는 것이 없다.
“기껏해야 횡령으로 의심되는 작자들 몇.”
가장 수상한 대화가 장부 운운하며 횡령과 관련되어 보이는 건이다.
저 횡령의 규모가 어마어마하지 않은 이상 남궁세가가 감시망을 계속 유지하게 하기는 힘들 듯했다.
“이렇게 되면 청심단 빼먹기는 힘들겠는데?”
그렇게 툴툴대고 있자니 농꾼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 리퍼,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했습니다.
그리고 눈앞에 뜨는 화면. 남궁세가의 장원 평면도다.
- 평소의 동선은 이랬습니다만, 세가 내에 도는 소문을 듣고 난 직후 이렇게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설명과 함께 색깔이 다른 선들이 평면도 위로 그려졌다. 평소의 동선과 확연히 동떨어진 동선이다.
“동선의 주인은?”
- 남궁세가 약당에 소속된 의원입니다.
“후속 조치는?”
- 평소와 다른 동선을 따라 서생원을 투입 현재 수색…. 추종향의 일종으로 분류되는 냄새 분자를 감지했습니다. 냄새 근원지 추적, 위치는 거동 수상자의 일탈 동선상입니다. 냄새의 근원을 확보했습니다.
동시에 영상이 떴다. 정원의 화초 사이에 꼬깃꼬깃 뭉쳐진 종이가 숨겨져 있었다. 서생원이야 냄새로 금방 찾을 수 있었지만, 사람이 눈으로 찾는다면 한참을 뒤져야 할 만한 곳이다.
- 수거합니까?
농꾼의 물음에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놔두고 주위에 여유분의 꿈틀이와 통신 벌레 대기 시켜. 수거자를 추적해서 저게 어디까지 전달되는지 한번 따라가 보자고.”
만나서 쑥덕거리는 것이 아니라 저런 은밀한 접선이라니! 뭔가 전문가의 손길이 느껴졌다랄까?
“응5 투입해서 실시간 추적 들어가. 투입하는 김에 남궁세가 인근의, 아니 여주부 부도의 초극 고수들 죄다 파악하고 동선 추적 가능하게 벌레 붙이고.”
- 예, 리퍼.
뭔가가 남궁세가 안에 기어들어 와 있기는 있는 상황. 멀어져 가던 청심단이 다시 손 앞으로 다가온 격이다.
객잔 침상에 누워 얼마간의 시간을 보냈을까.
- 리퍼, 추적물이 장원 밖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종이 뭉치의 이동 경로와 그간의 접촉자들이 화면에 떠올랐다.
약당의 의원이 던진 종이 뭉치는 남궁세가 내 하인 몇의 손을 거쳐서 외부인에게 전달된 상태다.
“응5로 관측 가능해?”
응5가 출발한지 한 시간 남짓. 여주 부도와 이곳은 직선거리로 대강 100km쯤. 매의 속도를 생각하면 도착할 때가 됐다.
- 376초 후 여주 부도 전역을 감시할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합니다.
“여주 부도 지도 띄우고 지금 추적물의 위치 실시간으로 표시해.”
내 말을 따라 영상이 조정되었다. 그리고 십여 분 뒤 움직임이 멈췄다.
- 꿈틀이 배치 완료. 해당 공간에 초음파 탐지 시행. 초극 고수 하나에 절정으로 추정되는 넷입니다.
농꾼의 보고와 동시에 그들의 대화 소리가 귀를 울린다.
“남궁가 놈들이 신창양가와 멸왜단과 동맹을 체결, 벽력응주가 이쪽으로 오는 중이랍니다.”
“벽력응주?”
“최근 절강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자입니다. 벽력과 매를 자유자재로 부린다는 소문이 있는 자입니다. 명옹(明翁).”
명옹? 어디선가 들어본 호칭인데?
“매를 부려 적을 찾아내고 추적하는 데는 절강 제일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추종객이라는 소리인가?”
“단순 추종객이라 볼 수는 없습니다. 명옹. 일신의 무위가 초극에 이른 신진 고수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 자가 부리는 매 덕분에 절강 땅에 왜구들이 발을 붙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멸왜단이 육가장을 후려친 이유가 이 자에 대한 암살 시도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입니다.”
“왜구로부터 절강을 건져 낸 구원자로 절강 무림 전체가 싸고도는 인물입니다.”
“절강 무림 전체가?”
“예, 명옹. 이 자를 포섭한다면 절강 무림이 우리 뜻대로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우 교령의 말은 목표를 바꾸자는 것인가?”
“벽력응주 이 자도 목표에 포함 시키자는 겁니다. 혈고(頁蠱)는 만약을 대비해 한 쌍이 더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까?”
대박이다! 이 새끼들 고독(蠱毒)을 남궁세가의 누군가에게 쓸 계획이다. 수작을 부리고 있는 자들이 고독을 쓰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알리면, 남궁세가에서 감시망을 유지하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청심단 수급은 문제없다.
고독은 무서운 독이다. 고독이 체내에 파고들면 끝장이다. 죽지 않으려면 시전자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물론, 나는 그깟 기생충 따위 무섭지도 않다. 내 몸 안에는 이미 농꾼이 들어앉아 있으니 말이다. 뭐가 들어와서 어디에 자리를 잡던 잡아 죽일 수 있다.
나노 머신을 품은 자들에게는 통하지 않을 수작이지만, 이 시대의 여타 무인들은 두려워할 만한 수법이다.
“절강을 맡고 계신 장 명두(明頭)께서 좋아하지 않으실 일 같은데?”
명두에 명옹! 이런 호칭을 쓰는 놈들은 무림에 한 곳뿐이다.
“이번 일이 성공하면 연로하신 계 명두 대신 명옹께서 남직례의 명두 자리에 오르실 텐데 큰 문제가 있겠습니까?”
씨발, 마교(魔敎) 새끼들!
청심단 수급에 청신호가 들어온다 싶더니만 하필 그게 마교 놈들이라니!
소림을 흔히 무림의 태산북두라 부른다. 속가와 본산에 고수가 득실거리고, 거기다 소환단마저 대량 생산하니 당연한 이야기다.
허나, 그런 소림도 황제를 향해서는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마교는 황제가 역도로 낙인찍혔는데도 마이웨이를 달려 광동과 광서 두 개 성을 오롯이 손에 넣은 놈들이다.
나라에서도 놈들의 본거지를 후려치기 꺼리는 곳이 바로 백련교, 혹은 명교로 자칭하는 마교 새끼들 아닌가.
천문위가 열이 넘고, 초극이 백 단위로 득실거린다는 소문도 있다. 어쨌든 무림 최강의 단일 세력이 저 빌어먹을 마교다.
저놈들이 나를 노린다 생각하니 살 떨린다. 이때껏 고생한 것이 아깝지만 그냥 튀어?
아니 저놈들이 나를 찍은 이상 튀어봐야 답이 없다.
마교는 근본이 미륵 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종교 단체이기에 살기 팍팍한 이 시대의 하층민들 사이에 넓게 퍼져 있다.
그 덕에 십만 거지들을 기반으로 중원 곳곳에 눈과 귀가 있다고 자부하는 개방의 정보력에 전혀 뒤지지 않는 것이 마교 놈들 아닌가 말이다.
“하아, 후!”
심호흡으로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차분해진 심신으로 머리를 돌린다.
여기는 정보가 실시간으로 퍼지는 현대가 아니다. 소식을 전하는 가장 빠른 수단이 전서구나 전서응인 시대.
마교의 고위층으로 보이는 작자는 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무림에 이름난 고수 중 마교 놈들 때려잡고 잘 먹고 잘 사는 작자들이 의외로 많았다.
거기에 ‘절강을 맡고 계신 장 명두(明頭)께서 좋아하지 않으실 일 같은데?’라고 ‘명옹’이라는 작자가 말하지 않았는가.
그런 말이 나오는 이유가 뭘까? 큰 단체답게 파벌이 많다는 소리다.
“겁먹을 필요 없잖아.”
도망은 나중에라도 갈 수 있다. 그러니 일단 나를 어쩌겠다는 저 마교 놈들을 때려잡고 뽑을 수 있는 이익을 뽑아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