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보복행(04)
위잉!
농꾼의 대답과 동시에 몸의 감각이 사라졌다. 아니 사라졌다고 느끼는 순간 이미 몸 중심에서 뭔가가 뻗어 나가 전신을 채웠다.
“타합!”
그 순간의 틈을 본 걸까? 놈이 기합을 내지르며 덮쳐들었다.
“합!”
이에 내 몸이 반응한다.
캉, 콰카캉!
검과 도가 각기 힘을 품고 거세게 충돌한다.
귀원공의 인도에 따라 태산파에서 수확한 데이터가 전신을 지배한다. 데이터가 이르는 대로 호흡을 가다듬고 데이터가 이르는 대로 힘을 움직인다.
전신을 지배하는 데이터는 태산구성 염진성의 감각. 염진성이 수련한 단한도의 요결대로 손을 움직이고 발을 움직이니 그것은 곧 흐름이 되어 칼을 따르게 했다.
내가 금정산에서 익힌 귀원공의 진정한 공능이 바로 이것이다. 데이터를, 이 감각을 몸에 바로바로 적응시키기 위한 심법.
어쨌든 귀원공으로 태산구성의 데이터를 활용해서 대감도를 휘두르자 아까 같은 미묘한 괴리감이 없었다.
그 괴리감이 없으니 귀몰색마를 상대하는 것이 아까보다는 쉽다랄까?
태산구성의 데이터가, 그 감각을 따르는 움직임이 귀몰색마를 뛰어넘을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대감도 하나는 정말 기가 차게 다룬다.
거기에 농꾼이 내 등에 붙어 있는 인공 근육, 방수를 움직여 나를 돕는다.
방수가 휘두르는 두 개의 소도는 태산파의 무공인 봉선도(縫旋刀)의 움직임을 재현해 내고 있다.
봉선도와 단한도는 합이 잘 맞는 무공. 그러니 귀몰색마는 지금 단한도를 사용하는 무인 하나와 봉선도를 사용하는 무인 둘, 태산파의 초극 고수 셋을 상대하는 모양새다.
쩌쩌쩡!
놈이 다시 뇌공추를 휘두르지만, 이번에는 내가 신경 쓸 필요 없다. 농꾼이 방수를 움직여 봉선도로 잘 막아내니 말이다.
땡큐, 염가동. 댁이 조카인 태산구성을 대리 수확하지 않았다면 뭐 될 뻔했어.
“이익! 도대체 무슨 사술(邪術)이냐!”
놈이 노성을 내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제 놈이 보기에는 그저 도파(刀把)에 밧줄을 연결해 놓았을 뿐인 소도 두 자루다. 그런데 그 두 소도가 사람이 휘두르듯 움직이니 사술 소리가 나올 만하다.
“사술이 아니고 과학이다. 무식한 놈아!”
흥이 올라 그렇게 대꾸한다. 그렇게 올라오는 흥에 농꾼이 냅다 찬물을 뿌린다.
- 리퍼, 배터리 용량을 주의하십시오.
도기에 전압을 걸어 세 가닥의 유사 강기를 사용한다면 340초의 시간제한이 생긴다.
힐끔 보니 남은 시간은 20초.
= 비수 암습!
“호거술만 적용!”
손과 입으로 동시에 뜻을 전하며 크게 칼을 내려친다.
두 손으로 휘두른 칼을 놈이 한 손으로 쥔 검으로 받아낸다. 동시에 빈손으로 뇌공추를 발휘 두 자루 소도를 쳐냈다.
오올!
그 순간 놈의 양 옆구리를 향해 호거술이 터져 나왔다.
파핫!
도기를 번뜩이던 비수가 강기를 토하며 그의 양 옆구리에 하나씩 박혔다.
“어, 어떻게?”
“한 쌍이 아니라 두 쌍이거든.”
각기 비수를 움켜쥔 한 쌍의 방수가 내 허리춤으로 사라진다.
인공 근육으로 만든 나를 돕는 손, 방수는 두 개 한 쌍이 아니라 네 개 두 쌍을 달아 놨었다.
내가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도기는 셋. 다수를 상대할 때 암기의 투척용으로 쓰거나 천문위에게서 도주 시 급격한 방향 전환을 위해 한 쌍을 더 달아 놓은 것인데….
어쨌든 이겼으니 기분 좋게 웃어주면서 녀석의 이마에 한 손을 올렸다.
파학!
내가중수법을 발휘해서 놈의 뇌를 곤죽으로 만들자 녀석이 칠공으로 피를 뿜으며 허물어졌다.
- HG-15의 수확이 시작됩니다.
놈의 데이터야 공방의 데이터 뱅크에 저장되니 당장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일단 녀석의 시체를 짊어지고 장원을 빠져나간다. 초극 고수 둘이 강기를 휘두르며 날뛰었으니 주위가 폐허가 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멀쩡한 남의 장원 하나를 박살 낸 꼴이지만 사람 안 죽은 게 어딘가.
안 죽었겠지? 안 죽었을 거야.
어쨌든 녀석을 짊어지고 인적 없는 곳을 찾아 움직인다.
“이 녀석 백라장에 정체를 들켰는지 확인해.”
- HG-15의 데이터를 전송받아 찾는 쪽이 공방의 데이터 뱅크에서 찾는 것보다 빠릅니다만?
수확 데이터를 빨리 받으란 소리다. 적당한 곳을 찾아 발을 멈추고 호흡을 조절해 호신강기를 억제했다.
눈앞의 화면들이 요동쳤다. 그러기는 30초 정도 했을까?
- 대상의 기억 확인되었습니다. 아비인 백라장주와 숙부인 내당주가 귀몰색마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결국, 백라장도 지워야 한다는 소리군.”
투지를 불태우며 녀석을 내려다보는데 어째 얼굴이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사제와 싸울 때와 얼굴이 다르잖아?”
- 지금은 면구를 쓴 상태입니다.
“그럼, 이 위에 다시 덮을 필요 없겠군.”
귀몰색마를 잡았다고 소문을 내야 하는데 녀석의 본래 얼굴로 일을 진행하면 백라장과 대놓고 싸우자는 이야기밖에 안 된다.
아니 백라장 뿐만이 아니다. 까닥 잘못하면 형산 본산이 나설 가능성도 있다. 백라장은 형산 속가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곳이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좋은 일 없다.
그냥 녀석이 백라장의 후계자임을 모른 척 귀몰색마를 잡았다 해야 백라장도 은밀히 움직이려 할 것 아닌가.
“녀석 안의 나노 머신을 조작할 수 없어? 녀석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말이야.”
놈이 그냥 귀몰색마로만 죽었다면 백라장주가 당장 복수하지 않고 후일을 기약할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되면 이번 일에 오랜 시간을 투자할 수 없는 내 입장 상 괜한 후환을 남기게 되는 격.
그러니 백라장이 반드시 나서게 만들어야 한다. 물론, 대놓고 나서도록 하는 게 아니라 은밀히 나서도록 말이다.
그러기 위한 제일 좋은 방법은 백라장 소장주란 정체를 들키지 않고 귀몰색마로 사로잡힌 경우다.
백라장에서는 어떻게든 몰래 빼돌리려고 기를 쓸 것이니 말이다.
- HG-15를 해킹하는 것보다 그냥 마*카*투 계열을 투입하는 것을 권합니다.
“지금 상태에서 마*카*투를 넣으면 녀석 안의 나노 머신에게 해킹당해서 그쪽으로 합류하는 거 아냐?”
- HG-15의 소속 개체들은 다음 숙주로 이동하기 위한 환승 프로그램이 가동되어 체내 한곳으로 결집 중입니다. 그리고 숙주의 사망으로 호신강기가 사라졌기에 HG-15가 마*카*투 계열에 대한 해킹을 시도해도 외부에서 충분히 대응할 수 있습니다.
농꾼의 확인에 나는 품에서 마*카*투 델타를 꺼내 녀석의 입에 물렸다.
이 각쯤 지나자 녀석이 핏기 없는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움직일 수 있지?”
“뇌를 제외한 다른 장기들은 멀쩡합니다. 충추신경계를 장악하고 뇌 쪽으로 이어지는 혈관계를 정리했으니 반년 정도는 문제없을 듯합니다.”
녀석이 입을 벌려 자신의 상태를 설명한다.
“농꾼 너냐?”
“예. 리퍼. 마*카*투 델타의 인공지능으로 자연스러운 대화는 무리기에 제가 외부 지원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음파 통신으로 충분히 가능한 지원이니 호신강기를 억제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잘됐군.”
“그런데 언제까지 이렇게 벗고 있어야 합니까?”
옷부터 입혀야겠다.
기성복 따위 없는 게 지금 이 시대다. 그러니 녀석에게 옷을 입히려면 비슷한 덩치를 지닌 사람이 사는 집을 찾아 그 집에서 옷을 가져오는 수밖에 없었다.
응 시리즈가 현도 전체를 스캔해서 대상을 찾고 내가 직접 옷을 훔쳐 와 녀석에게 입혔다.
녀석을 끌고 홍등가로 향했다.
목적지는 놈과 싸우기 전에 찾아둔 청파루다.
남들은 다 잘 시간이지만 기루의 사람들과 손님들에게는 한창 흥청망청할 시간.
“아이고 두 분 대인. 어서 오십시오.”
청파루에 도착하자 기루의 덩치 좋은 하인이 우리 둘을 맞이했다.
“예기(藝妓)를 불러 주게. 무각마(無脚馬)를 잘 타는 애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왔어.”
괴이한 쇳소리 같은 내 목소리에 하인의 몸이 잠시 움찔했다.
하지만 발 없는 말, 소문을 다루는 자를 보러 왔다는 내용에 이내 신색을 바로 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우리는 하인에 의해 기방으로 안내됐다. 그리고 잠시 뒤 기녀 하나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무각마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어떤 종류를 원하시는지요.”
“사려는 게 아니다.”
“파시려는 분이셨군요. 어떤 종류의 무각마지요?”
“귀몰색마.”
“귀몰색마라? 우리가 모르는 일이면….”
“그냥 목을 베지. 당사자 옆에 앉혀 놓고 별짓을 다 하는군!”
귀몰색마가 기녀의 말을 끊으며 이죽거렸다.
“당사자?”
이에 기녀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귀몰색마를 바라보았다.
“걱정할 필요 없다. 제압당해서 힘을 못 쓰는 상태니.”
“정말 귀몰색마인가요? 듣기로는 귀몰색마의 무공은 초극에 이르렀다던데?”
내 말에 기녀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묻는다.
나는 조용히 허리춤으로 손을 돌려 소도를 뽑았다.
우웅!
소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기.
“초극 고수!”
기녀의 눈에서 의심이 사라졌다.
“이곳 현도 봉황대로 쪽 한 장원에서 일을 벌이고 있는 놈을 습격해서 제압했지.”
“네 놈은 사내도 아니다. 어찌 방사 중인 사람을!”
귀몰색마가 인상을 쓰며 투덜거린다. 당연히 농꾼이 장단을 맞춰주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저 색마를 살려 두는 것인지요?”
“목은 하난데 원하는 사람은 많으니깐.”
하오문이 돈 되는 정보를 놓칠 리 없다. 귀몰색마의 소식을 원하는 자들은 그와 원한이 있는 자들. 백라장도 표면적으로는 귀몰색마와 원한이 있는 곳이다. 그러니 하오문은 이 소식을 백라장에도 팔아먹을 것이 뻔했다.
청파루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다가 해 뜨기 무섭게 숭의 현도를 나섰다.
“사제는?”
“남강(南康)의 북쪽 관도에서 발이 묶였습니다.”
농꾼이 귀몰색마의 입을 빌려 답을 하며 눈앞으로 화면을 띄웠다.
무더기를 이룬 무림인들이 두 패로 나뉘어 관도 옆 공터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예상대로 청도방 무인들을 남안부의 흑도가 막아선 것이다
두 집단 사이에 오가는 내용은 뻔하다.
“우리는 귀몰색마를 잡기 위해 나선 것이오. 남안부 흑도와 다투기 위해 온 것이 아니오. 그러니 빨리 길을 열어 주시오!”
“귀몰색마라 우리 쪽에서는 듣지 못한 이름이오. 그런 자가 진짜 남안부로 들어 왔는지 알아볼 터, 공주부로 돌아가 확인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시오.”
“공주 지부대인이 발급한 체포 문서도 이렇게 있소. 이는 공주부의 공무이기도 하오.”
“확실히 그렇구려. 그런데, 공주부의 공무는 공주부 안에서 봐야 하는 것 아니오? 여기는 공주부가 아닌 남안부요.”
서로 체면을 차리고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여차하면 칼을 뽑아 휘두를 분위기였다.
“감정 격해지기 전에 물리는 것이 좋겠지.”
사제는 남안부 흑도들과 전쟁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성깔 사나운 흑도의 인물들이 저렇게 계속 대치하고 있으면 사고가 나기 마련.
그러니 일 커지기 전에 청도방이 물러서게 만들어야 했다.
사제에게 연락한 뒤 귀몰색마의 목덜미를 잡아 짐짝처럼 짊어지고 바닥을 박찼다.
두 흑도 세력이 대치하고 있는 곳까지 대강 백 리. 초극 고수의 날랜 걸음이라면 반 시진이면 충분하다.
청도방과 남안부 흑도들이 대치하는 모습이 보이자 짊어진 귀몰색마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녀석을 앞세우고 관도 위를 걸어갔다.
두 집단이 대치하고 있다지만 오가는 사람들을 위해 관도는 비워 둔 상황. 비워 뒀다 해도 대치하는 두 집단의 지척이긴 하다.
“허, 청도방의 젊은 놈.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있군.”
그러니 이딴 소리를 하면 당연히 들을 수밖에 없다. 두 지역 흑도인의 시선이 모조리 관도 위로 쏠렸다.
“네놈은 귀몰색마!”
청도방의 소방주인 사제가 노성을 내지르며 칼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기세를 피워 올리며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온다.
“귀몰색마?”
“저자가?”
“뭣들 하나? 소방주를 도와 색마를 잡지 않고!”
“잡아라!”
사제의 뒤를 따라 청도방 무인들이 무기를 뽑아 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관도를 향해 내달리지 못했다.
콰쾅!
굉음과 함께 한 자루 대감도가 서슬 퍼런 강기를 토해내며 그들 소방주를 물러나게 만든 탓이다.
“댁은 누구기에 내가 잡은 색마에게 칼을 겨누시오?”
그렇게 청도방을 건사하기 위한 연극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