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보복행(06)
파양호에서 호광의 성도인 무창부까지 대충 천 리. 농꾼이 귀몰색마의 신체로 쉴 틈 없이 노질하니 이틀 만에 당도했다.
무창 부도에 당도하기 무섭게 거간꾼을 찾아 한적한 곳에 자리 잡은 작은 장원 하나를 빌렸다.
귀몰색마의 목을 원하는 자들을 불러 모을 장소다.
무창 부도 남쪽에 있는 팔분산(八分山) 중턱에 자리 잡은 장원이라 어느 정도 소란이 일어도 달려와서 귀찮게 할 사람 없는 곳이다.
“아직도 백라장은 움직임이 없고?”
“예, 리퍼. 별다른 움직임이 없습니다.”
“하오문이 왜 이러지? 돈 벌 기회를 놓칠 놈들이 아닌데.”
귀몰색마에게 원한 있는 자들에게 현재 소식을 팔면 되는 간단한 일이다. 드는 수고에 비해 제법 큰돈을 만질 수 있는 기회. 그런데 목표인 백라장과 접촉이 없다. 계속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부도의 청파루를 찾아.”
한번 알아봐야 했다.
응 시리즈를 움직여 무창 부도의 현판들을 싹 훑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이유가 없다.
“청파루는 없지만 청파객잔은 찾았습니다.”
이 동네에서는 기루가 아니라 객잔의 형태로 운영하는가 보다.
“그쪽으로 간다.”
얼굴을 완전히 가릴 수 있는 죽립(竹笠)을 썼다. 물론, 귀몰색마도 똑같은 것을 쓰게 했다.
부도의 청파객잔은 청파루와 같은 정보 거래소가 맞았다.
“귀몰색마에 대한 최근 소식을 원하신다고요?”
“보름 이전의 소식들로. 그 이전의 소식들은 필요 없다.”
내 요구를 들은 점소이가 물러갔다. 그리고 반 각쯤 지나자 돌아왔다.
“은자 두 냥입니다.”
은자를 꺼내 건넸다.
“아흐레 정도 전에 강서 공주부, 이튿날 남안부에서 색행이 확인되었습니다.”
그게 끝이다. 놈이 잡혔다는 소식이나 무창에서 목을 벨 것이라는 말 따위는 없다.
“끝인가?”
“예.”
혹시나 해서 물었지만, 대답은 변함없다.
“수고하게.”
농꾼이 움직이는 귀몰색마의 몸과 함께 청파 객잔을 나섰다.
“이 새끼 설마 하오문과 무슨 관계 있는 거 아냐?”
내가 남안부에서 귀몰색마를 잡은 뒤 8일이 지났다.
돈 안 되는 소식도 아니고 돈 되는 일이니, 전서구를 사용하기에 꺼릴 것이 없다. 아니 이런 소식은 시간이 지나면 값이 떨어지니 당연히 신속하게 보고될 것이다.
훈련 받은 전서구가 하루에 족히 이천 리 이상을 날 수 있음을 감안 하면 대충 삼 일, 사 일이면 호광성 전역에 귀몰색마의 소식이 전해져야 했다.
아니 절차상 문제가 있어 늦어졌다 해도 오륙 일이면 호광 전역에 소식이 전해져야 했다. 그래야 호광 각지에 흩어져 있는 세력에 소식을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팔 일이 지난 지금에도 호광의 성도인 무창에 위치한 하오문이 귀몰색마가 잡혔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건 하오문의 어딘가에서 소식을 차단했다는 소리다.
“기억 데이터 검색 결과, 하오문의 인물과 인연이 닿은 기록은 없습니다.”
귀몰색마의 입으로 농꾼이 답했다.
“하아.”
최악의 경우 누군가가 하오문에 귀몰색마에 대한 정보 차단을 요청했다고 생각해야 한다.
“일이 왜 이렇게 꼬여!”
하오문은 정보 장사꾼들이다. 그 장사 밑천인 정보를 팔지 말라고 팔지 않을 놈들이 아니다.
대외적으로 귀몰색마와 척을 진 세력 중 가장 강한 곳은 백라장. 귀몰색마에게 가장 큰 현상금을 걸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러니 어지간한 곳에서 귀몰색마에 대한 정보 차단을 요청한다 해도 그 사실까지 백라장에 팔아먹을 놈들이 하오문이다.
정보 차단 요청을 근거로 귀몰색마에게 이런 배후가 있는 것 같다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런 하오문 놈들이 군말 않고 정보 차단에 들어갔다. 그 말은 정보 차단 요청의 주체가 백라장이 알아도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의 힘을 지닌 곳이라는 말이 된다.
“백라장 말고 놈의 뒤를 봐 줄 세력은?”
“귀몰색마의 기억에는 없습니다.”
“젠장.”
도대체 뭐 하는 새끼길래 본인도 모르는 비호 세력이 튀어 나오냐고.
“나서기 전에는 누군지 알 수 없으니 우리는 그저 할 일 하는 수밖에 없군.”
어쨌든 하오문을 통해 자연스레 소식이 들어가게 하는 것은 실패다.
그냥 소문을 낼까 싶기도 했지만 그랬다가는 쓸데없는 구경꾼들이 많아질 게 뻔했다.
이번 일의 목표는 백라장 놈들을 파묻어 뒷걱정을 없애는 일. 그런 일을 하는데 주위에 눈이 많으면 좋을 것 없지 않은가.
“귀몰색마에 현상금을 건 세력을 다 부를 수는 없고, 액수로 끊어서 상위 열 곳만 뽑아.”
눈앞으로 그 목록들이 떠올랐다. 당연히 백라장은 포함되어 있다. 백라장에만 소식을 보낸다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가 있었다.
백라장은 형산의 삼대 속가 중 하나다. 소장주를 비롯한 백라장 고위층들이 사라지면 형산파가 나설 것은 당연지사.
그러니 나중에 형산파가 나서 조사해도 뭔가 수상함을 느끼지 못하게 해야 했다.
그렇게 서신을 보낼 곳을 정하고는 열 장의 서신을 작성했다.
서신을 단단히 봉하고는 형산 속가가 운영하는 표국(驃國)을 찾았다.
남로표국(南路驃國).
이름 그대로 호광 남부로 향하는 표행을 전문적으로 하는 곳이다.
“서신은 전달해야 하는 거리와 마감 시일에 따라 그 가격이 달라지오만?”
접수처의 문사가 나를 보며 말했다.
“서신을 보내야 할 곳들이오.”
내가 준비한 목록을 문사에게 내밀었다.
“응?”
목록을 살핀 문사의 얼굴에 잠시 놀란 기색이 서렸다 사라졌다. 서신을 보낼 목록에 형산 삼대 속가 중 하나인 백라장이 포함되어 있으니 그런 것이다.
“방법은 알아서 하시고 최대한 빨리 서신을 전했으면 좋겠소.”
“최대한 빨리라, 정확한 기일을 말해 주시겠소?”
“늦어도 이틀 안에는 모두 서신을 받았으면 하오.”
“이틀이라 굉장히 급한 일인가 보오. 하지만 본 표국의 능력으로는 형주부(荊州府)의 단산장과 마안장, 운양부(鄖陽府)의 당성장은 이틀 안에 소식을 전하기는 불가능이오.”
“그럼 그 세 곳을 빼고 맡아 주실 수 있으시오?”
“물론이오.”
그렇게 서신을 맡기고 팔분산의 장원으로 돌아왔다.
***
호광 장사부 상음현 백라장.
“본산에서 연락이 왔느냐?”
“본산에서는 비급을 내주기는 힘들고, 소장주인 백천을 본산에서 수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쪽입니다.”
백라장주 우극현의 물음에 그의 친동생이자 백라장 내당주인 우극일이 답했다.
“그럴 수는 없네. 그랬다가는 백천 녀석의 내공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본산의 존장들이 바로 알아볼 걸세.”
“그냥 백천의 사정을 존장들에게 알리고 도움을 구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형님.”
“말이 되는 소리를! 그간의 행적을 그분들이 아시면 백천을 그냥 놔둘 것 같은가?”
“…….”
“하아, 그나저나 백천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나?”
“한 달 되려면 아직 삼 일 남았습니다.”
“멍청한 놈. 평생 배워도 모자란 절학들이 있는데 어떻게 그런 잡기에 빠질 수가 있는지….”
백라장주가 그렇게 한탄을 하다가 말을 멈추고는 문밖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문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주, 내당의 우백청입니다.”
백라장주의 조카이자 내당주의 아들이다.
“들어와라.”
백라장주의 말에 우백청이 안으로 들어섰다.
“밤이 늦었는데 무슨 일이냐?”
우극일이 아들에게 물었다.
“무창의 남로표국에서 전서구로 묘한 서신을 하나 보내왔습니다.”
“무슨 서신이기에?”
“오 년 전 본장의 천라지망을 빠져나간 색마를 기억하십니까?”
우백청의 말에 우극현, 우극일 두 형제의 눈이 빛났다.
“귀몰색마를 말하는 것이냐?”
“예, 장주.”
“그 색마가 왜?”
“잡혔답니다.”
“뭐?”
조카의 말에 백라장주의 눈이 커졌다. 아니 눈만 커진 것이 아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간다.
“그게 사실이냐?”
우극일이 재빨리 아들의 어깨를 잡아 자신 쪽으로 돌리며 물었다.
“무창 팔분산에서 참할 예정이랍니다.”
“언제?”
“닷새 남았군요.”
아비의 물음에 우백청은 들고 온 서신을 슬쩍 보고 답했다.
“그게 남로표국에서 온 서신이더냐?”
동생이 조카의 시선을 돌리는 사이 신색을 회복한 백라장주가 물었다.
“예, 장주.”
우백청이 서신을 백라장주에게 건넸다.
“흠.”
백라장주는 서신을 읽고는 내당을 책임지고 있는 동생에게 넘겼다.
“하아!”
서신의 내용에 우극일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잡았다면 좋았으련만. 어쨌든 우리 백라장이 빠질 수 없는 일인 듯합니다. 장주.”
“외당주에게 일러 백라장을 대표해 참석하게 하라.”
백라장주의 명에 우백청이 바쁘게 움직였다. 닷새의 기간은 그렇게 넉넉한 것이 아니니 서둘러야 했다.
우백청이 나가는 것을 확인한 우극현이 동생을 바라보았다.
“빌어먹을! 언젠가는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바보 같은 녀석!”
백라장주가 귀몰색마를, 아들을 탓하며 이를 악물었다.
“서신을 보면 우리 백라장에만 보낸 것이 아닙니다. 귀몰색마에게 현상금을 건 세력 중 상위권의 세력들에게 다 보낸 것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아직 정체를 들킨 것은 아닌 듯합니다.”
백라장 내당주도 귀몰색마의 정체를 아는 것이다.
“녀석의 진면목이 드러나기 전에 구해야겠지?”
“당연하지요.”
백라장주의 말에 내당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너와 나 둘뿐이다. 둘이서 가능할까? 너도 알다시피 녀석의 실력은 이미 우리를 넘어선 지 오래. 그런 녀석을 사로잡았다는 것은, 우리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강자라는 말이 아니냐.”
“두 분 숙부님께 부탁드려야지요.”
“그 두 분에게 녀석이 그간 해온 짓들을 알리자는 것이냐?”
백라장주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서생원 시리즈가 보내온 영상을 멈췄다.
“저치들이 말하는 두 숙부라는 작자들은 누구야?”
“백라장의 장로인 우중원과 우중근입니다.”
농꾼 녀석이 귀몰색마의 입으로 대답함과 동시에 내 눈앞으로 그 둘의 프로필이 떠올랐다.
풍채 좋은 노인들로 도저히 일흔 먹은 늙다리로 보이지 않았다.
우중원은 원공검을 익혔고 우중근은 형산이 자랑하는 패도 검공인 대천륜검(大天輪劍)을 익혔다.
“녀석이 초극에 오른 다음, 저 둘과 비무한 데이터는 없는데?”
수확한 데이터를 살펴봐도 저들에 대한 것은 없었다.
“귀몰색마의 기억으로는 저 둘은 그때쯤 공력의 수발에 문제가 생겨 비무를 피했다 합니다.”
“하아!”
한숨이 나온다. 초극 고수나 되는 작자들이 공력 수발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두 가지 경우밖에 없다.
내상을 입었거나, 뭔가 벽을 넘어 더한 힘을 얻었거나 말이다.
하지만 전자라 볼 수는 없다.
내상을 입어 골골하는 작자들에게 백라장의 초극 고수 중 하나인 우극일이 저렇게 기댈 리 없으니 말이다.
“저 작자들 천문위 아냐?”
“저들이 천문위라면 백라장은 형산 삼대 속가가 아니라 최고의 속가라 불렸겠지요.”
그렇긴 하다. 하지만 천문위가 아니라도 뭔가 일반적인 초극 고수와는 다른 작자들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이러나저러나 나 홀로 상대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
“무슨 방법이….”
“리퍼, 초극 고수 셋이 장원으로 접근 중입니다.”
이건 또 뭔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