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보복행(11)
“백천 형님은 어디 있습니까? 제 형님의 칼은 왜 그 꼴이 되어 어르신들 손에 들려 있는 거고요?”
“일단 자리를 옮기는 것이 어떤가?”
내 말에 우중원이 답했다. 조카 손자 놈이 색마질 했다는 사실이 나올지도 모르니 듣는 사람 없는 곳으로 가자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러지요.”
고개를 끄덕이며 둘을 따라 자리를 옮겼다.
장원의 서쪽, 숲속 안 공터다. 내가 간밤에 혼자 난리쳐 놓은 그곳 말이다.
“이 칼은 여기서 발견되었네.”
우중근이 내게 칼을 건네며 말했다.
“우리를 보고 백천이 부른 원군이냐 물었지? 백천은, 그리고 그 칼의 주인은 팔분산에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하려 했던 건가?”
우중원이 내게 물었다.
“두 분, 백천 형님의 연락을 받고 오신 것이 아닙니까?”
내가 슬쩍 그들과 거리를 두며 물었다.
“백천이 백라장의 소장주인 우백천을 말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아이의 숙조(叔祖)가 되네.”
“설마, 백천 형님이 아무런 말도 없이 그냥 두 분을 불러내신 겁니까?”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우리는 귀몰색마가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왔네.”
“자네는 귀몰색마가 누군지 아나?”
우중원, 우중근 두 노인이 차례로 입을 열었다.
“백천 형님께 집안 분은 알고 계시다 들었습니다만?”
“하아.”
내 말에 우중근이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말을 돌릴 필요 없네. 시간을 아끼기 위해 일단 우리가 여기 온 경위를 이야기하겠네. 우리는 백천이, 귀몰색마가 잡혔다는 소식을 무창의 남로표국을 통해 날아온 서신을 통해 들었네. 물론 백천이 귀몰색마라는 사실은 언급이 없었네. 정확히는 귀몰색마를 잡았으니 팔분산의 하원장에서 근시일 안에 처분할 것이니 그 목에 관심이 있으면 찾아오라는 서신이었지.”
“그것뿐이라고요?”
“그래. 그러니 자네는 자네가 누구이며 어떻게 백천을 형님으로 부르게 되었고, 그 칼의 주인과 백천의 관계를 설명해 주게.”
“산동 태산 속가인 ‘염가북’이라 합니다.”
염가동의 이름을 빌려와 슬쩍 한 글자만 바꾼다.
“산동의 태산파라고? 거기 속가라 불릴 곳이 남았던가? 죄다 몰락했다 들었는데? 허. 과연, 명문은 몰락해도 명문이라 그건가? 아직 저력이 남아 있었군.”
우중원의 반응이다.
“산동에 있어야 할 사람이 어떻게 호광에 있는가? 실례가 되겠지만 태산 문하라는 걸 증명할 수 있나?”
우중근의 반응. 의심이다. 내게는 아주 좋은 방향이다.
“당연히.”
= 산산수 데이터 가동해.
- 예, 리퍼.
염진성이 산산수를 어린 사질들 앞에서 시연할 때의 데이터가 내 몸을 지배한다.
귀원공의 공력이 태산파의 심법을 따라 몸 안을 흐르고 양손에 모여든다.
궁, 구궁!
양손이 움직일 때마다 공간이 울린다. 산을 깎는 손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기세를 품고 양손이 산산수의 투로(鬪路)를 따라 움직였다.
“태산파의 산산수 맞네. 정통으로 배웠어.”
우중원이 감탄했다.
“그만하면 됐네.”
우중근이 말했다.
“제가 태산 속가라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까?”
내 말에 우중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백천과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말해 주게.”
우중근의 말에 내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다.
“형님의 이름은 염가중. 저와 같은 태산 속가 문하입니다. 백천 형님이 어떻게 귀몰색마가 되었는지 아십니까?”
“자네는 알고 있나?”
“이것 때문입니다.”
우중근의 반문에 품에서 사제에게 수거한 회천대양신공의 비급을 꺼냈다.
“이건?”
“백천 형님을 색마로 만들고, 제 형님이 산동을 떠날 수밖에 없는 원인을 제공한 물건입니다. 내공을 속성할 수 있는 심법으로 위장된 색공이지요!”
귀몰색마 우백천의 기억을 바탕으로 하는 이야기다. 회천대양신공은 처음부터 색공임을 드러내진 않는다.
뛰어난 내공 심법으로 위장된 것이다. 우백천도 색공인 줄 모르고 입문했다가 그 꼴이 된 것이다.
“백천 형님 말에 따르면 수련한지 일 년이 되면 색마가 될 수밖에 없다 하셨습니다. 제 형님도 그랬고요.”
이것도 귀몰색마의 기억에 있는 이야기다.
“형님과 백천 형님이 만난 것은 반년 전으로 두 사람 모두 색공이 만들어 내는 충동을 참지 못하고 길을 나섰다가 우연히 마주쳤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서로 같은 색공을 익힌 탓에 공력이 공명하여….”
즉석에서 이야기 한 편 지어낸다.
두 젊은 청춘이 빌어먹을 색공 때문에 색마가 되었다가 우연히 만났다. 같은 처지라 쉽게 친해졌다. 뭐 그런 이야기다.
“두 사람은 한참 이야기를 하다 알아챘습니다. 이 빌어먹을 색공이 두 사람의 손에 들어온 것은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누군가 목적을 가지고 뿌린 것일 수도 있다. 이런 결론을 내리고 그 누군가를 잡을 계획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술술 풀어 나갔다.
“그 말은 이번 일 자체가 색공을 뿌린 누군가를 잡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다는 말인가?”
“예, 제 형님은 아직 색마로 이름이 없었기에….”
“백천 이 녀석은 왜 서신을 그따위로 보내!”
우중원이 인상을 구겼다.
“하아, 망할 녀석. 집안 어른들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솔직히 말해서 도움을 구하면 될 것을….”
우중근이 그렇게 한탄한 뒤 말을 이었다.
“백천과 자네 형은 아무래도 놈들에게 끌려간 것 같네.”
“장원의 정문을 고치고 있던 것을 보았습니다. 습격은 간밤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간밤에 습격당한 것이 맞네. 우리가 장원의 사람들에게 확인했지.”
내 말에 우중원이 답했다.
“아직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았으니 잘하면 추적할 수도 있겠군요.”
“방법이 있단 말인가?”
“그 말 진짜인가?”
추적 가능하다는 내 말에 두 노인이 앞 다투어 묻는다.
“예.”
= 응3. 내려 보네.
휘익!
손가락을 움직여 농꾼에게 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입으로 휘파람을 크게 분다.
팔을 옆으로 뻗으니 잠시 후, 응3이 내가 내민 팔뚝 위로 내려앉았다.
“이놈은?”
우중원이 물었다.
“훈련된 매입니다.”
대답하며 토막 난 대감도의 칼자루를 내밀자 응3이 칼자루에 부리를 대고 잠시 냄새를 맡는 시늉을 하더니 다시 날아올랐다.
“저 녀석이 형님의 채취를 추적할 것입니다.”
“매의 눈이 좋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는데, 코가 좋은 줄은 처음 알았군.”
우중원의 말대로다. 매는 눈이 좋지 코가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알게 뭔가. 이 시대 중원에 조류 학자가 있을 리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 매를 쫓아가지 않아도 되나?”
매가 멀리 날아가는데 움직이지 않는 나를 보고 우중원이 물었다.
“당장 쫓아가는 것은 의미 없는 일입니다. 하늘을 날면서 채취가 날아오는 방향부터 파악해야 합니다.”
나름 머리를 굴려 둘러댔다.
“방향을 파악하는데 얼마 정도 걸리겠나?”
“짧으면 한 시진. 길어지면 반나절입니다.”
역시 머리를 굴려 답했다.
“그럼, 일단 우리를 따라오게.”
우중원이 먼저 움직이고 우중근이 뒤를 따랐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두 노인을 따라가며 물었다.
“색공을 뿌린 자들에 대해서 짐작 가는 게 있네.”
우중근이 백라장주에게 했던 소리를 나에게 해줬다.
“미면나찰! 왜 진작, 흑천맹주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색공으로 천문위에 오른 작자인데!”
뻔히 아는 이야기지만 전혀 몰랐다는 듯 탄식을 한다.
“일단 움직이세. 흑천맹이 움직인 것이라면 양양(襄陽)으로 먼저 가야 해!”
“양양이요?”
“호광에서 섬서 서안(西安)으로 가는 길이 양양에서 둘로 나뉘네. 양양을 지나 운양(鄖陽)을 거쳐 섬서 한중(漢中)을 통해 서안으로 가거나 양양에서 하남 남양(南陽)을 지나 섬서 낙남(洛南)을 거쳐 갈 수도 있지.”
“편하게 가자면 양양에서 남양 쪽으로 빠질 테고, 빨리 가자면 운양으로 갈 것이네.”
역시 강호에서 평생을 구른 노강호들이다.
내가 실시간 위치 추적과 중원의 전도를 보고 추론해 낸 사실을 그저 강호를 굴러다닌 경험으로 때려 맞추고 있으니.
“형님들을 납치한 것이 흑천맹의 놈들이라면 양양으로 먼저 가 놈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양양에서 매를 풀어 형님의 체취를 쫓는다면, 놈들을 바로 찾을 수 있으니….”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매는 계속 체취를 쫓게 하게.”
“그러지요.”
= 귀몰색마를 잡아간 작자들에게 응2를 보내서 계획대로 진행해.
- 예, 리퍼.
농꾼에게 명을 내린 다음 두 노인과 함께 양양을 향해 내달린다.
무창의 팔분산에서 양양까지는 대략 칠백 리 길. 물론 직선거리가 그렇다는 거다.
피풍의를 펴고 반쯤 날듯이 내달리면 직선거리로 갈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동행이 있다. 피풍의를 못 펴니 지형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칠백 리가 아닌 천 리 길을 내달려야 했다.
팔분산에서 출발한지 세 시진, 육백 리쯤 달렸을 때 응3을 불러들였다.
팔뚝 위에 내려앉은 응3을 몇 번 울게 했다. 그 울음을 통해 뭔가를 알아듣는 척을 하는 것이다.
“찾았답니다.”
“어디쯤인가?”
내 말에 우중원이 물었다.
“배로 움직이고 있답니다. 우리보다 남쪽입니다.”
“물길을 거슬러 오는 중이라 우리보다 한참 느리군.”
내 말에 우중근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어린다. 진득한 살기와 함께 말이다.
“형님. 멀리 갈 것도 없이 강변에서 기다리지요.”
“그러지.”
우중근의 말에 우중원이 동의했다. 배를 타고 물길을 거슬러 오는 것을 확인했으니 양양까지 갈 필요 없는 것이다. 나는 두 노인의 의견을 조용히 따랐다.
놈들을 확인하는 것은 매에게 맡겨 두고 우리는 강이 내려다보이는 구릉 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장강의 지류인지라 강폭이 수백 장은 되어 보였다. 넓은 강이 흘러가는 것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두 시진쯤 흘렀을까.
- 리퍼, 목표가 접근 중입니다.
농꾼의 알림과 동시에 넓은 강을 오가는 배 중 한 척이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날렵하게 생긴 것이 딱 봐도 쾌속선이었다. 거기에 삿대질하는 사공이 양쪽에 셋씩 여섯이나 된다. 사공이 입고 있는 것은 흑의의 무복. 그냥 사공이 아니라 무인들이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쾌속선의 뱃머리에 걸려 있는 흑포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린다.
= 응3. 내려 보내.
삐익!
내가 손가락을 움직이자 응3이 허공에서 울음을 터트린다. 내가 왼팔을 내밀자 응3이 그 위에 내려앉았다.
잠시 응3의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는 척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 배입니다. 뱃머리에 흑포를 내걸고 흑의를 입은 무인 여섯이 삿대질하는!”
오른손으로 놈들이 탄 배를 가리켰다.
“자네 헤엄칠 수 있나?”
우중근이 물었다.
“예.”
“그럼, 나와 형님이 놈들의 주의를 끌 테니 자네가 그 사이에 조용히 둘을 빼내게.”
“알겠습니다.”
“그럼, 움직이세.”
나와 두 노인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구릉 아래로 내려갔다.
강변에 도착한 내가 조용히 물속으로 들어가자, 두 노인은 등평도수를 펼쳐 강물 위를 내달렸다.
내가 머리까지 물속으로 집어넣자 피풍의가 내 전신을 감싼다.
= 백라장 생존자들의 실력이나 보자고.
물속에서의 움직임은 농꾼이 제어하는 피풍의에게 오롯이 맡겨 두고 한가하게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농꾼이 내 명을 충실히 따르니 눈앞으로 응 시리즈로 찍어내는 화면이 펼쳐졌다.
우중근과 우중원이 검을 빼들고 쾌속선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둘의 검 끝에서 강기가 구슬처럼 뭉쳐들고 있었다.
강기의 구슬? 설마 환강!
저 인간들 천문위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