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산동행(14)
“문제가 심각합니까?”
양연곤이 물었다. 농꾼 녀석이랑 대화한다고 양연곤을 너무 오래 잡고 있었다.
“양 소협의 문제가 아니라 매의 문제 같군요.”
대충 둘러댄다.
= 우산에 모여 있는 놈들은?
- 일단 밖으로 나오는 것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청주 부도 인근의 꿈틀이와 통신 벌레가 파괴된 탓에 당장의 위치는 잡아내지 못한다.
하지만 놈들의 거점이 응 시리즈의 감시 범위 안에 있기에 초극 고수의 움직임은 알 수 있다.
= 어쨌든 아직 거기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지.
- 예, 리퍼.
놈들의 거점은 산자락을 깊게 파고든 동굴 같은 곳이었으니 다른 출구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응5를 해킹한 놈에 대한 단서를 찾아야 하니 놈들을 쫓는 수밖에 없다.
“우산의 놈들을 쳐야겠습니다.”
“우산에 숨어 있는 자들은 황보세가에 맡기기로 하지 않았나?”
내 말에 남궁화청이 슬쩍 인상을 쓴다. 황보세가와의 협약을 뒤틀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 소지가 크니 저러는 것이다.
“그랬지요. 하지만 황보세가는 오지 않았습니다.”
응5와 연락이 끊기기 전 받았던 데이터를 뒤져봐도 황보세가의 전력이 청주 부도에 도착한 기록은 없었다. 신창양가와 접촉을 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전력 자체가 도착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연락도 없고요.”
“청주 부도에 황보세가의 분가가 있는 것을 생각하면 사정이 있어 늦게 도착한다는 연락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없다는 것은 이쪽으로 연락도 하지 못할 정도의 큰 문제가 생겼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내 말에 양묵일이 말을 보탰다.
“황보세가를 마냥 기다릴 수만 없지 않습니까?”
양묵월도 동조했다.
우리 일행이 불모의 유산을 차지했다는 소문이 난 상황. 놈들을 처리하지 않으면 불모의 유산을 노리고 있는 군웅들에게 쫓길 판이다.
누구와 싸우든 싸워야 하는 처지라면 놈들과 싸우는 것이 좋지 않은가.
“놈들이 이대로 사라지면 우리가 불모의 유산을 삼킨 꼴이 됩니다.”
내 말에 남궁화청이 벗어 둔 죽립을 썼다.
“결정됐으면 당장 움직이세.”
황보세가가 불만을 토로해도 정의맹에서 해줄 말이 많으니 주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우산 곳곳에 초극 고수들이 득실거렸다. 우리를 쫓아 군웅들이 우산을 오른 것이다.
= 근데, 수가 어째 좀 늘었다.
- 시간이 지나면 더 늘어날 듯합니다.
청하신수를 차지한 벽력응주가 청주에 나타나 우산에 올랐다는 소식을 하오문이 열심히 팔아먹은 듯했다.
“하아.”
남궁화청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꺼냈다.
“장보도 쟁탈전에 끼어든 군웅들이 죄다 청주 부도로 몰려오는 듯하군.”
응 시리즈의 시야를 통해 몰려드는 초극 고수들의 현황을 파악한 것이다.
그렇게 몰려드는 초극 고수들을 피해 놈들의 거점으로 향했다.
입구는 사람이 몸을 돌려야 통과할 정도의 바위 틈새.
내가 먼저 나섰다. 그냥 밀고 들어서지 않고 꿈틀이 하나를 슬쩍 던져 넣어 입구에 매복이 있나 살핀다.
손에 스피커를 만들어 초음파를 쓸 수도 있다. 하지만 동굴 깊숙이 들어가면 중계 없이는 응 시리즈와 같은 외부 개체와 통신이 힘드니 꿈틀이를 중계기로 활용해야 한다. 어차피 써야 하는 상황이니 그냥 이렇게 꿈틀이로 살피는 것이다.
내가 들어선 다음에 신창양가의 쌍둥이와 양연곤이 들어왔고, 남궁화청이 마지막으로 들어왔다.
좁은 입구에 비해 안의 통로는 사람 둘이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넓이다.
둘이 설 수 있다 해서 꼭 둘이 설 필요는 없다. 들어온 순서대로 일렬로 움직인다.
십여 장 정도 통로를 지나자 사람 수십 명은 생활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 나왔다. 하지만 놈들은 보이지 않았다.
- 리퍼, 전에 꿈틀이로 살폈을 때는 없던 공간입니다.
그 공간의 끝에는 입구와 달리 폭이 일 장은 되는 널찍한 통로가 있었다.
= 막아뒀었나 보네.
돌가루가 없는 것을 보니 금방 만든 통로는 아니었다.
불빛이랄 것이 없는 공간에서 조용히 통로를 따라 움직인다.
나는 농꾼의 보조로 낮과 밤의 구분을 잊은 지 오래.
일행들도 안법(眼法)을 단련한 정통파 초극 고수들에 나노 머신을 품은 수확 대상자들이다. 어둠 속에서 사물을 보는 데 어려움이 없다는 소리.
반 각 정도 걷자 갈림길이 나왔다. 두 갈래도 아닌 세 갈래다.
갈래 길로 꿈틀이들을 힘껏 던져 넣는다. 꿈틀이들이 허공을 가르며 초음파를 쏘아내 순식간에 통로를 살핀다.
- 리퍼, 왼쪽 통로에 초극 고수 셋이 감지됩니다.
초음파 분석 영상을 내 눈앞으로 띄웠다.
통로의 끝에는 공간이 있고 다시 그 공간 뒤로 통로가 뻗어 나가는 형상이다.
세 인영은 뒤로 뻗어 나가는 통로를 지키는 모양새.
원래 적은 열셋, 열 명은 어디 박혀 있는지 모르니 일단 걸려든 세 명부터 처리하자.
- 이쪽에 셋이 있습니다.
일행에게 전음으로 놈들의 존재를 알린다.
- 제가 먼저 나서 적들의 눈을 멀게 한 후 중앙을 덮칠 테니 남궁 대협이 좌측, 양 소협이 우측 그렇게 한 명씩 들이쳐 생포하는 것으로 하지요. 양가의 두 분은 뒤에서 덮쳐올지 모를 적들을 대비해 주십시오.
체내에 나노 머신이 없는 양묵일, 양묵월 형제에게 뒤를 맡겨서 혹여나 섬광격에 눈을 당할 경우를 막는다.
서로 할 일이 정해지자 바로 움직인다.
통로의 길이는 이십 장. 초극 고수들이 작정하고 내달리면 순식간에 줄일 수 있는 거리다.
흑의에 복면을 뒤집어쓴 셋이 갑자기 통로에서 튀어 나오는 나를 보며 각자의 무기를 움켜쥔다.
그들과 거리를 줄이며 빼든 칼을 머리 위로 쳐든다.
오올!
왼손의 스피커가 익숙한 울림을 토하니 백색의 광휘가 동공 안의 어둠을 한순간 집어삼킨다.
나는 그대로 칼을 내려친다. 섬광격이 깃든 일격에 내 목표가 검을 마주 들고.
쾅!
격한 충격이 내 몸을 흔든다.
섬광격을 막을 것은 예상했다.
진짜는 이거다.
파자자작!
내 손에서 전격이 튄다.
- 리퍼!
농꾼의 경고성.
내 몸이 뒤로 던져진다. 새하얀 빛살이 전격을 뚫고 내가 섰던 자리를 갈랐다.
섬광격에 전격을 튕겨 내는 것도 모자라 반격까지 가했다.
농꾼이 방수를 움직이지 않았으면 그냥 한 칼 먹었을 거다.
쿵!
내 옆쪽으로 튕겨 나온 인영 하나가 바닥을 구른다.
“크윽.”
양연곤이다. 기습에 실패하고 한 칼 맞은 듯 상체가 피투성이다.
캉, 카카쾅!
그리고 공동을 연신 울리는 굉음.
남궁화청이 한 명과 검투를 벌이고 있다.
“혼자서는 무리!”
남궁화청을 상대하던 흑의인이 악을 쓴다.
“내가 저것들을 맡을 테니 협공해!”
내 공격을 막아냈던 흑의인이 그렇게 외치며 내게 달려든다.
“우리에게 맡기게!”
“자네는 곤이를 봐 줘!”
신창양가의 쌍둥이 형제가 통로에서 튀어 나와 흑의인을 맞이한다.
쌍둥이 형제의 창날에 서리는 힘이 예사롭지 않다.
사사혈창대의 일원으로 나를 상대할 때처럼 단순한 협공이 아니라 제대로 된 합공이다.
흑의인은 쌍둥이의 공력이 얽혀든 합공에 당장은 막혔지만 크게 밀리는 느낌이 아니다.
젠장, 귀몰색마 만큼 하는 놈들이 왜 이리 많아!
양연곤은 내가 신경 쓸 필요 없다. 수확 대상자니 체내의 나노 머신 NJ-03이 알아서 치료할 터.
쿵, 쿠르르릉!
갑작스레 터진 굉음과 함께 동공 전체가 흔들렸다. 우리가 나온 통로가 막혀 버린 것이다.
- 우리가 지나온 통로 전체가 무너졌습니다. 중계 꿈틀이 소실, 외부와 연결이 끊겼습니다.
농꾼의 급박한 보고.
쾅!
격한 검격이 양가의 쌍둥이를 뒤로 밀어낸다. 쌍둥이가 뒤로 밀려나자 그들을 상대하던 흑의인이 바로 몸을 돌려 통로를 향해 달린다.
카콰콰쾅!
남궁화청을 상대하던 흑의인 둘도 마찬가지.
합공의 한 수로 남궁화청을 물러나게 하더니 통로로 튄다.
“쫓아요!”
양연곤을 둘러업으며 외치고는 그들이 사라지는 통로를 향해 달린다.
쿵!
하지만 통로는 그들이 사라지기 무섭게 천장이 내려앉으며 막혀 버렸다.
쿵, 쿠쿵, 콰르릉!
막힌 통로 너머로 들리는 굉음. 얼마나 긴 통로인지 모르지만, 완전히 막혀 버린 것이다.
“갇힌 건가?”
“망할 놈들 애초에 이럴 작정이었군.”
양가 쌍둥이의 허탈해하는 목소리다.
“갇힌 거로 끝나면 다행인데….”
남궁화청의 우려.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쾅, 콰쾅! 쾅!
머리 위에서 들리는 굉음. 이 공간마저 무너트려 우리를 파묻으려는 속셈이다.
= 안 파묻히게 공간 만들어.
농꾼에게 명을 내리기 무섭게 방수가 뻗어 나와 벽면을 미친 듯이 두드린다.
- 이쪽으로!
내 눈앞에 안전 공간이 그려진다.
“이쪽 벽면으로 붙어 쪼그려 앉아요.”
- 예, 리퍼. 유사 기맥에 공력을!
일행들에게 소리치는 즉시 농꾼이 바로 내게 요청한다. 그에 따라 양손 가득 공력을 주입한다.
일행들이 내 말대로 움직이기 무섭게 내 몸에 장비된 방수들이 미친 듯이 움직인다.
오올!
섬광격을 두른 소도가 미친 듯이 벽면을 잘라내고 내 칼이 움직여야 할 궤도가 눈앞으로 그려진다.
촤자자자작! 촤작!
그리고 모든 행동이 끝나는 순간.
- 리퍼, 숙이십시오,
농꾼의 안내가 흘러나왔다. 그대로 몸을 움직이자 머리 위로 뭔가가 흘러내렸다.
쿠르릉, 쿠쿵. 콰콰쾅!
굉음과 진동, 먼지가 우리들을 감쌌다.
잠시 후, 진동과 굉음이 멎었다.
우리 머리 위로 거대한 돌판이 비스듬히 벽면에 걸쳐 있는 상태. 벽면과 돌판 아래 공간에 일행들이 죄다 쪼그려 있었다.
“어떻게든 살기는 산 것 같은데….”
“완전히 파묻혔군.”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나갈 수 있어요.”
양가 형제의 말에 히죽 웃으며 답해 준다. 왜놈들에 의해 한 번 땅에 파묻혀 본 경험이 있기에 두렵지 않았다.
= 농꾼, 이제 탈출해야지?
- 탈출 경로를 찾기 위한 지질 환경 조사를 시작합니다.
쿵, 쿠쿵, 쿵!
방수가 땅과 벽면에 박히며 커다란 진동을 일으켰다.
“이건?”
바로 곁에서 일어나는 진동에 남궁화청이 흠칫했다.
“나갈 방향을 찾기 위한 겁니다. 무너지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여유롭게 웃어주며 농꾼의 계산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그 전에 이 녀석의 상태를 먼저 봐주는 것은 어떤가?”
양묵월이 양연곤을 걱정한다.
“그러지요.”
나노 머신이 알아서 치료하고 있으니 대강 치료의 흉내만 낸다.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 일 각 안에 정신 차릴 겁니다.”
그렇게 양묵월을 안심시키니 농꾼의 계산이 끝났다.
- 입구 쪽으로 뚫고 나가는 것보다 놈들이 물러난 통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빠릅니다.
= 이쪽으로 가면 밖은 아닐 텐데?
- 공동이 나옵니다.
= 이쪽으로 나가면 또 무너트리는 것 아냐?
- 다시 파묻힌다 해도 이쪽으로 가는 것이 되돌아가는 방향보다 빠릅니다.
그래. 내가 지금, 이 상황에 너 말고 누굴 믿겠냐.
= 시작하자고.
- 예, 리퍼.
내 눈에 반쯤 투명한 내가 보인다. 나를 인도하는 증강현실에 차분히 칼을 잡고 움직인다.
도강으로 벽면을 자르고 잔해를 뒤로 넘긴다.
“그래 강기로 땅을 파내면 되겠군.”
내 움직임을 본 남궁화청이 검을 뽑아 들고 강기를 일으켰다.
“잠시만요.”
남궁화청을 말린다.
“한 명보다는 둘이 낫지 않나?”
내 말에 남궁화청이 의아함을 담아 묻는다.
“잠시 공력을 억제해 주시겠습니까?”
확실히 한 명보다 둘이 낫다. 그러니 제대로 땅을 파게 데이터를 공유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