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산동행(16)
여기에 모인 군웅들은 대다수가 초극 고수, 뒤에서 덮쳐드는 공격에 반응하지 못할 리 없다. 바로 강기를 앞세워 대응한다.
콰콰쾅!
허나, 굉음과 함께 그대로 피를 뿌리며 튕겨 나갔다.
추혈팔마, 마교의 여덟 초극 고수들은 합공의 달인들.
여덟이나 되는 초극 고수들의 공력이 한데 뭉쳐서 움직이니 초극이 수십이라도 개개인에 불과하니 어떻게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추혈팔마가 파죽지세로 나아가고 뒤치기를 당한 군웅이 추풍낙엽으로 쓰러진다.
그렇게 군웅이 절반쯤 쓰러지자.
아미타불!
사자후가 동공을 뒤흔들며 소림 무승들이 추혈팔마의 앞을 막아선다. 무림에서 제일 유명한 합공이 나한진 아닌가.
그렇게 소림 무승들이 추혈팔마를 잡아 두고 있을 때 보퉁이를 낚아챈 무인이 군웅들을 뿌리치고 통로를 향해 내달렸다.
하지만 그걸 두고 보고 있을 혈천쌍마가 아니다. 혈천쌍마는 보퉁이를 쫓는 대신 그 자리에서 양손을 흔들었다.
콰콰쾅!
굉음과 함께 통로가 무너지며 입구가 막혔다. 보퉁이를 든 무인이 급히 다른 통로를 향해 몸을 틀었지만, 혈천쌍마는 한 명이 아닌 둘이다.
쿠콰쾅, 쾅, 콰콰쾅!
사람이 둘, 손은 넷이니 쏘아낸 강기도 넷.
무너져서 입구가 막힌 통로도 넷이라는 말이다.
멀쩡한 통로는 혈천쌍마가 들어온 통로, 그들의 등 뒤에 있는 통로뿐이다.
뒤를 쫓는 군웅들 때문에 보퉁이의 주인은 어쩔 수 없이 마지막 남은 통로를 향해 달려들 수밖에 없고, 혈천쌍마는 코앞까지 배달된 보퉁이를 천문위의 무위로 가볍게 차지했다.
보퉁이를 쫓아온 군웅들?
천문위 둘이 한 몸처럼 합공을 펼치니 합공을 펼칠 수 없는 군웅들은 피를 뿌리며 나뒹구는 수밖에.
혈천쌍마는 그렇게 달려드는 군웅들을 정리한 뒤 보퉁이를 뒤집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두 권의 책자.
“월하검 뿐만 아니라 청하신수도 있군.”
“헛소문이라는 것이 거짓말이 아니었군.”
수염 긴 쪽이 나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혈천쌍마는 보퉁이를 챙긴 뒤 추혈팔마와 소림 무승들이 만들어내는 격전장으로 향했다.
합공을 쓰는 천문위 둘이 가세하자 아무리 나한진이라도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크으윽.”
“끄응.”
마교의 무리들은 바닥에 널브러진 자들의 신음성을 뒤로 하고 유유히 동공을 떠났다.
그렇게 쟁탈전은 끝났다. 하지만 내 일은 끝나지 않았다.
= 꿈틀이와 통신 벌레 붙이고 응4로 추적 감시한다.
이번 일의 배후가 노리는 것이 마교라면, 저들을 통해 해킹범의 단서를 찾을 가능성도 있다.
- 예, 리퍼.
농꾼의 대답을 들으며 몸을 일으켰다. 한 대 맞고 누워 있는 사이에 농꾼이 모든 상처를 치료한 것이다.
“자네 괜찮나?”
양묵일과 양묵월의 눈이 커졌다. 농꾼이나 나노 머신에 대해 모르는 둘이니 내 회복력에 놀라는 게 당연했다.
“죽일 생각은 없었는지 생각보다 상처가 중하지는 않았습니다. 남궁 대협은 제가 따로 봐주지 않아도 되겠지요?”
고개를 돌리며 물으니 남궁화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화청도 다친 척하고 있을 뿐 체내의 나노 머신이 이미 치료를 완료했을 것이다.
“그럼 저는 소림에서 오신 분들을 살피고 오겠습니다.”
동공에 중환자들이 넘쳐나지만 어째 죽은 사람은 없다.
마교의 강력함을 과시하겠다는 생각인가? 그냥 죄 죽이는 것 보다 살려 놓는 것이 배로 힘든 일이니 말이다. 거기다 상대가 초극 고수 수십이라면 더 그렇다.
소림의 초극 고수 일곱은 내상을 입었을 뿐 큰 외상은 없었다.
하지만 절정 무승 열다섯의 외상은 심상치 않았다.
하긴 마교의 인사들이 손에 사정을 뒀다 해도 합공으로 힘이 몰려 있는 상태니 절정 무승들이 온전하기는 힘들지.
재빨리 외상 환자들 치료를 시작했다.
내상 환자들은 놔둔다. 소림 무승들이다. 소환단을 대량 생산하는 그 소림의 고수들. 소환단 하나씩 안 챙겼을 리 없다.
농꾼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손을 놀렸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들이라 외상을 꿰매는데 내 머리카락을 쓸 수밖에 없다.
“보는 대로 우리 쪽은 비급의 파기에 실패했네.”
무승들의 외상 치료를 끝내자 스스로 내상을 다스린 거철 승려가 눈을 뜨며 말했다.
“우리 쪽도 일이 어그러져 놈들 시체 셋을 얻은 것 말고는 소득이 없습니다.”
“일이 어그러졌다면?”
“오기로 한 황보세가의 전력이 오지 않았습니다.”
훌쩍 떠나도 되는데 소림 무승을 치료해 준 이유가 이것이다.
황보세가에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 사정에 따라서는 힘을 써야 할 수도 있다.
그러니 소림의 협력이 필요했다. 뭐 당장 물리적인 힘을 쓰지 못하더라도 무림 태산북두인 소림의 이름에는 그만한 힘이 있으니 말이다.
득실거리는 부상자들을 두고 소림 무승들과 함께 동공을 나섰다.
무림 각지에서 활동하는 초극 고수들이니 나중을 위해 은혜를 팔아둘까 싶었으나 그만뒀다.
대신 농꾼을 통해 그들의 신상을 정확히 파악한 뒤 비활성화된 꿈틀이를 각기 붙여 뒀다.
이들은 일종의 미끼다.
귀몰색마급의 고수들을 쉽게 소모품으로 쓰는 놈 아닌가.
소모품은 썼으면 채워야 하는 법이다. 여기 내상을 입고 널브러진 초극 고수 수십이 있으니 이들을 주워 소모품으로 쓸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동공을 나오기 무섭게 청주 부도 내의 초극 고수들을 훑었다. 초극 고수들이 손에 꼽을 정도다.
그 위치를 보면 청주 부도 내에 있던 기존 세력의 수장들이라 볼 수 있다.
황보세가의 인원들이 늦게라도 왔나 싶어 응 시리즈로 청주 일대를 훑었다.
하지만 열셋의 초극 고수들을 때려잡을 전력은 보이지 않았다.
응3에게 서신을 물려 상 노개에게 보냈다. 그간의 일을 설명하고 제남 부도에서 보자는 내용이다.
“제남, 황보세가로 가지요.”
그리고 소림 무승들이 합류한 일행을 이끌고 제남으로 출발했다.
***
청주 부도에서 제남 부도까지의 거리는 대략 삼백 리 정도.
평소라면 경공으로 단번에 내달릴 거리였지만 부상자가 한가득하기에 마차를 빌렸다.
부상자에 시체도 세 구가 있어 다섯 대의 마차를 빌렸다.
나를 포함한 정의맹 인원들이 마부가 되어 종일 달리니 다음날 제남 부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왔나?”
약속 장소에 상 노개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개방이 뒷정리를 맡았던 제양과 제남 부도의 거리는 백 리 정도였으니 당연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혈천쌍마와 추혈팔마가 나타났다 하지 않은가? 그런데 어째 소림승 중에 죽은 사람도 없고.”
상 노개가 나를 앉히며 조용히 물었다. 서신으로는 간단히 적을 수밖에 없었으니 당연했다.
“놈들은 우리 쪽의 움직임을 꿰고 있었습니다.”
내 발목을 잡기 위해 놈들이 흘렸을 것 같은 헛소문의 이야기와 청주 부도의 일, 우산 동공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자네 말은, 황보세가가 의심스럽다는 말인가?”
상 노개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아무래도 그렇지 않습니까?”
놈들이 내 움직임에 맞춰 내가 청하신수를 얻었다는 헛소문을 뿌렸다. 거기에 놈들을 후려칠 황보세가의 전력은 오지도 않았고 연락도 없었다.
“황보세가가 이번 일에 가담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있다고 보나? 잃을 것이 훨씬 더 많네.”
상노개의 말대로다.
쟁탈전을 활용해 황보세가가 노려볼 만한 계획은 산동 수로의 패권이다.
산동 수로의 패권을 쥔 양산박의 핵심 고수들을 쟁탈전으로 유혹해 죽게 하는 정도?
하지만 소림, 개방이 끼어들 게 분명한 일이다.
쟁탈전의 전문가인 소림이고, 배후 찾기와 소문내기의 전문가가 개방이다.
들통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소림과 개방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게 뻔하다.
개방이 소문을 내 명분을 쌓고 정도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이 배척한다면, 황보세가는 산동 패권이 아니라 가문의 존립을 걱정해야 했다.
때려죽여도 되는 놈이 가진 게 많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뻔하지 않은가.
정도 팔가의 하나로 꼽히는 황보세가의 힘?
산동 아래 남직례에 남궁세가와 신창양가가 있고, 산동 위쪽의 북직례에는 팽가와 진주언가가 있다. 그뿐이랴? 바다 건너 요동 지방, 행정구역상 같은 산동으로 묶인 그곳에는 모용세가가 있다. 그 세가들이 이게 웬 떡이냐 하며 달려들 것이다.
“물론, 황보세가 전체가 이 일에 끼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개방의 늙은 생강인 상 노개가 이 정도도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데?
“황보세가의 일부가 놈들과 손이 닿았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세력은 좀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정의맹만 해도 보타산 속가가 주축인 멸왜단에 신창양가와 남궁세가의 연합이다. 거기에 개방 정도면 충분한 것을 왜 소림까지 끌어들인 것이냐 탓하는 것이다.
하긴 좋은 일도 아니니 되도록 아는 사람 하나라도 더 줄여 조용히 처리하는 것이 상식이기는 하지.
하지만 해킹범을 찾아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황보세가를 탈탈 털어야 한다.
황보세가에서 탈탈 털리는 것을 거부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것이 급선무다.
“자네 지금 행동은 여차하면 황보세가를 파묻을 수도 있다는 식으로 여겨질 수도 있네.”
상 노개가 으르릉거리듯 말한다. 매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이다. 정의맹의 뜻이냐고 묻는 것이다. 이 기회에 산동에 진출해 볼 생각이냐고.
해킹범에 생각이 쏠려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다.
“그건 정안각주인 제가 할 일이 아니지요.”
생각해 보니 황보세가를 끌어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자네를 믿어 보지.”
황보세가로 가는 인원은 셋으로 줄였다.
정의맹을 대표하는 나와 개방의 상 노개, 소림의 거철 승려다.
우르르 몰려가면 황보세가를 겁박하는 모양새가 될 수 있다나.
망할 거지 영감이 믿는다면서 나를 전혀 믿지 않고 있다.
어쨌든 황보세가로 갔다.
“개방의 장걸개와 소림의 거철 대사, 정의맹의 정안각주시군요. 가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배첩을 전하기도 전에 우리가 누군지 알아본다.
하긴 제남 부도는 황보세가의 안마당. 비밀리에 들어온 것도 아니고 당당히 성문을 통과해 들어왔는데 황보세가에서 우리가 온 것을 모를 리 없지.
“어서들 오시게. 황보세가를 책임지고 있는 황보천이네.”
대청에서 상 노개보다 몇 살 더 먹어 보이는 노인이 우리를 맞이했다.
황보세가의 당대 가주인 황보천이다.
별호는 검산(劍山), 강호에서 중검(重劍)으로는 따라올 자가 없다는 검의 고수다. 당연히 천문위다.
“강호의 후배가….”
간단한 인사가 오간다.
“이렇게 몰려온 것은 우리 황보세가가 우산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탓을 하기 위해선가?”
“탓을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어떤 연유에선지 알고자 함이지요.”
상 노개가 황보천의 말을 받았다.
“말로 하는 것보다 직접 보여주는 것이 빠르겠군. 따라들오시게.”
황보천이 몸을 일으켰다. 우리들은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다.
황보천이 우리를 안내한 곳은 약향과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한 전각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덩치 좋은 중장년들이 드러누워 있었다. 그중에 아는 얼굴도 있었으니, 다름 아닌 황보선이다.
“설마, 이들이?”
상 노개의 말에 황보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산을 향해 떠났던 본가의 초극 고수들이네.”
- 리퍼, 소림 무승의 몸에 남은 상처와 흡사한 상처들입니다.
그리고 뒤를 잇는 농꾼의 보고.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우산으로 가던 도중 마교 놈들에게 당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