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대비행(03)
- 리퍼, 마중 나갈 시간입니다.
“그래.”
야밤에 들려온 농꾼의 말을 따라 거처에서 벗어났다.
“벽력응주? 이 시간에 출타하시는 겁니까?”
번을 서는 무사가 총타를 나서는 나를 잡고 물었다.
“그래.”
들고 다닐 물건이라면 담을 넘어 조용히 나가 받아 오면 되지만 이번에 받을 것은 들고 다닐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러기에 이렇게 정문으로 공식적으로 나갈 필요가 있다.
“현재 위치는?”
내 물음에 눈앞으로 절강 지도가 펼쳐진다.
- 접선지점은 여기.
지도에 표시되는 곳은 남쪽의 인적 드문 야산.
- 30분 안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그곳을 향해 달려오는 점 하나가 표시된다.
접선지점을 향해 천천히 발을 옮긴다. 내가 빨리 간다고 빨리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시간을 맞춰 움직였다.
접선지점에 당도하자 먼저 온 거대한 덩치가 거친 숨을 내뿜고 있었다.
푸르릉, 흐응!
“야, 이거 말 맞아?”
말의 체고가 내 머리보다 높다. 거기다가 호리하고 잘빠진 승용마의 몸매가 아니다. 딱 봐도 그 덩치가 두 배쯤은 되어 보인다.
달려드는 늑대 떼 따위는 가볍게 밟아 죽일 분위기에 호랑이나 곰이 덤벼도 이길 분위기를 풍긴다.
- 손을 대는 김에 이것저것 대다 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뭘 입혀 놓은 거냐?”
고삐와 말 안장이 다가 아니었다. 옷처럼 뭔가를 입혀 놓았다.
- 원활한 기동을 위한 장비입니다.
농꾼의 말과 함께 눈앞으로 말에 대한 데이터가 주루룩 펼쳐진다.
“곰 호랑이 같은 맹수가 아니라 어지간한 무인들도 쓸고 다닐 스팩이잖아?”
체중이 톤에 가깝고 그 몸을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근력이 있다. 그런 육체 스팩이 다가 아니다. 다리에 방수가 하나씩 장착되어 있으며 몸통에도 한 쌍이 달려 있다.
그리고 말이 입고 있는 옷은 내 피풍의와 같은 재질이다. 평소에는 마갑 대용으로 쓰이지만 여차하면 펼쳐져서 날개가 된다.
반쯤 날거나 활공이 가능하니 지형에 상관없이 내달릴 수 있다는 말이다. 거기에 금속 골격의 배터리 용량은 내 열 배가 넘는다.
- 수확 대상자는 어렵습니다만, 일반적인 초극 고수는 기습으로 제압할 수 있습니다.
뭐 대용량의 배터리와 방수의 조합이라면 방전 대비가 안 되어 있는 초극 고수 정도는 충분히 제압할 만하다.
“이름 아직 없지? 마원(馬one)으로 칭한다.”
- 예, 리퍼. 개체명 마원으로 등록합니다.
마원에 올라타고 총타로 돌아갔다.
다음날 남궁화청이 멸왜단 총타에 도착했다.
“남궁가주께서 허락하신 겁니까?”
“한 달 뒤에 돌아가거나 정안각의 부각주가 되겠지.”
한 달 만에 천문위가 된다면 정안각 부각주로 삼 년을 지내겠다는 말이다.
“그럼 따라오시지요.”
정안각 인원들을 위해 준비된 연공실 중 하나로 남궁화청을 데려갔다.
“여기가 남궁대협의 전용 연공실입니다.”
“한 달간 여기서 생활하면 된다 그거군.”
“예.”
“자, 그럼 해보게.”
남궁화청이 나를 보며 말했다. 한달만에 천문위로 만들어 주겠다고 장담했으니 빨리 뭐든 해보라는 거다.
“공력을 억제해 호신강기를 해제하시겠습니까?”
내 말에 남궁화청이 호흡을 고르니 호신강기가 사라졌다. 그리고 나노 머신간의 통신이 시작된다.
- 리퍼, 문제가 생겼습니다.
= 무슨 문제?
- NZ-04가 ZJ-02의 전투 감각 데이터 적용을 거부했습니다.
이건 또 뭔 소리야?
= 왜?
- 무공 변질의 우려를 이유로 들었습니다.
계획에 금가는 소리가 내 귀를 울린다.
= 무공 변질이라니?
- ZJ-02의 무공 베이스는 불문 보타산의 검공. 속가인 남궁세가의 검공….
= 무공 데이터를 넘기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전투 감각이잖아!
- 거기에 NZ-04는 ZJ-02가 여자인 것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감각에서 오는 괴리감에 대한….
아니 거기에 성별 문제까지 따진다. ZJ-02가 여자인게 왜 문제라는 거야?
= 강행 못 해?
- 해킹해야 합니다만?
남궁화청을 상대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말이다.
씨발!
욕이 절로 나온다.
= 다른 천문위 데이터도 죄다 적용 거부냐?
- 예, 지금 가지고 있는 천문위의 데이터는 ZJ-02를 제외하고는 검수의 데이터가 없는 탓에….
세상사 쉬운 게 없다.
“하아!”
“왜 그러나?”
내 한숨에 남궁화청이 물었다.
“쉽게 될 줄 알았는데 쉽지 않네요.”
“그럼?”
남궁화청의 안색이 어두워진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쉬운 방법이 안 통하는 것뿐이니.”
방법이 없지는 않다. 어차피 남궁화청은 근시일 안에 천문위가 될 인재.
= 천문위 데이터 네 개지?
- 예, 리퍼.
진우탁을 비롯한 보타산 속가 셋에 신창양가 양묵현의 데이터다.
= 죄다 넘기고 증강 현실에서 돌리라 그래.
- 그 말씀은?
= 천문위들 데이터로 증강 현실 대련도 못 시키겠다는 거야?
- 그건 가능하답니다.
도대체 나노 머신 설정을 누가 했기에 이따윈지! 그냥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면 되지. 기계 주제에 따지는 거 더럽게 많아.
= 그럼 해. 죽도록 굴려! 어차피 증강 현실이라 안 죽잖아!
천문위 네 명 사이에서 죽도록 굴러다니면 한 달 안에 천문위 되겠지.
“고생하셔야겠습니다.”
“고생이라니?”
“이 연공실은 제가 손을 좀 봤습니다. 그러니….”
아니 말로 주절거릴 필요 있나?
“한번 겪어 보시지요.”
“무슨….”
내게 말을 걸려던 남궁화청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멸왜단주를 뵙습니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예를 차린다.
첫 상대가 진우탁인 모양이다.
“고생하시지요.”
나는 남궁화청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몸을 일으켰다.
“무슨 말인가? 멸왜단주. 진 대협, 진 선배!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남궁화청이 사방팔방으로 강기를 뿌리기 전에 서둘러 연공실을 나왔다.
= 한 달 안에 될까?
- 증강 현실에서 천문위와 대련을 끝내고 몸을 회복할 동안 NZ-04가 숙주에게 천문위 데이터 간의 공방을 관전시킬 계획이랍니다.
몸을 굴리는 대련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도 시청각으로 교육을 하겠다는 말이다.
그렇게 남궁화청을 연공실에 박아놓고 나는 화인천을 만났다.
“인수인계는 끝났냐?”
“인수인계랄게 뭐 있겠습니까? 누님이나 철운 형도 원래 다 하시던 일이었는데요.”
내가 대주였을 때 다들 부대주였으니 화인천의 할 일을 두 사람이 모를 리 없었다.
“그건 그렇지. 단주께 설명은 대강 들었지?”
성혈문에 대한 일을 묻는다.
“예. 그런데, 고작 아홉으로 되겠습니까?”
화인천이 슬그머니 걱정된다는 얼굴로 물었다.
화인천의 말대로 정안각의 인원이라 해봐야 나까지 쳐서 아홉이다.
멸왜단에서는 나와 화인천, 호장우 셋이고 남궁세가에서는 남궁화청 하나. 황보세가의 황보성과 황보군 둘.
“게다가 신창양가에서 불러들일 인원들은 죄다 신진들이더군요.”
신창양가에서는 양연곤을 비롯해 양유정, 양황준이라는 셋이다. 양유정과 양황준 둘은 양연곤과 같은 신창양가의 새로운 수확 대상자들이다. 이미 죽은 숙주 셋을 대신해 나노 머신들이 선택한 새로운 숙주들.
“죄다 너 정도는 되는 녀석들이다. 크게 걱정할 필요 없어.”
정안각 인원 중 현재 제일 걱정 되는 것은 눈앞의 화인천이다.
남궁화청이야 무력 측면에서는 정안각 최강이라 할 수 있다.
호장우는 도화도주 황학약의 데이터를 넘겨서 여차하면 거기에 기대게 할 수 있다.
황보세가의 황보군과 황보성에겐 성혈문으로 넘어간 배신자라지만 황보숭의 데이터가 있다.
신창양가의 어린 것들? 몸 안의 나노 머신이 예전 숙주의 데이터라도 꺼내 들 수 있다. 안되면 양묵현 데이터 넘기면 되고 말이다.
호장우와 신창양가의 셋은 선대의 데이터를 따라가면 지금보다 확연히 강해질 수 있다.
하지만 화인천은? 가문의 무공 그대로 그들의 성장을 따라갈 방법 따위 없다.
거기에 화인천은 귀원공을 익혔다. 어떤 무공을 펼쳐도 그 무공에 맞는 내공으로 변환하는 귀원공이지만 이상하게 타인의 공력은 거부하는 탓에 합공이 안된다.
그러니 화인천은 호거술의 합공에 기댈 수도 없다. 내가 신경 써서 굴릴 수밖에.
“그래도 이번 산동에서 드러난 놈들의 전력을 생각하면 아홉은 너무 적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현실도 모른 채 정안각 전체를 걱정하고 있다. 착한 놈 같으니라고.
“그래서 이번에 왜구 놈들 잡아 온 것 아니냐.”
“그러고 보니 형님은 언제부턴가 왜구들의 수법을 쓰시더군요.”
내가 왜구의 호거술을 훔쳐 쓰는 것을 주위에서 모를 리 없었다.
“그래, 이번에는 놈들의 합공법을 털어냈다.”
“왜구의 합공법을 정안각 사람들에게 익히게 할 생각입니까?”
“그래. 호거술과 호거술을 사용한 합공법을 정안각에 전할 생각이다.”
“하지만 그 왜구 수법이나, 합공법은 한계가 너무 명확하지 않습니까?”
“음공 기반인 주제에 다른 음공을 만나면 너무 쉽게 깨진다는 것 말이냐?”
“예.”
화인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인천과 경철운은 진혜예가 거열쌍왜를 잡기 위해 선택한 조력자들. 나를 만나기 전부터 호거술을 깨부수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거 누님 이전에 눈치 챈 사람이 있더냐? 솔직히 너도 누님에게 듣고 알았잖아.”
“뭐,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리고 음공이라는 거는 쓸 수 있는 사람은 많아도 누님처럼 계속 쓸 수 있는 사람은 드물어.”
“그건 정안각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내 말에 화인천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래서 수를 냈지.”
히죽 웃으면서 녀석에게 장갑 한 쌍을 건넸다.
“이건 뭡니까?”
손등 부분이 뭔가 금속처럼 거뭇한 것이 평범한 장갑처럼 보이지는 않기에 묻는 것이다.
“음공을 쓸 때 괜히 목청 돋울 필요 없게 해주는 물건이지. 어떻게 쓰는 것인지 알려줄 테니 호신강기를 해제해.”
화인천이 호신강기를 해제하기 무섭게 호거술의 데이터를 전하고 스피커 장갑의 용도를 마*카*투 감마에게 전했다.
“호거술의 구결이다.”
입으로 염가동이 배운 호거술의 구결을 대충 불러준다. 이미 데이터가 넘어갔기에 마*카*투 감마가 화인천의 몸에 호거술의 진기 운용을 각인시킨다.
“뭐든 형님이 말해주면 단번에 이해가 되는군요. 전에 귀원공도 그렇고, 이번의 호거술도 마찬가지고요.”
이해가 되는 게 아니라 나노 머신이 그냥 몸에 새기는 거다.
“장갑 껴라. 장갑에서부터 목의 염천혈까지 뭔가 이상한 느낌이 올 것이지만 원래 그런 것이니 거부하지 마라.”
공력을 일으켜 막아서지만 않으면 유사 기맥이 생성되는 것은 문제없다. 이미 마*카*투 감마도 유사 기맥의 생성을 허가했으니 말이다.
- 유사 기맥의 생성이 완료되었습니다.
농꾼의 보고.
“이제 검기를 일으키고 호거술을 운기해.”
두 가지 내공을 운기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호거술이라는 것 자체가 원래 그런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큰 무리 없이 된다.
화인천의 검끝에서 검기가 피어오르자 장갑의 진동판이 울린다.
끄어얼!
“이건?”
“네 녀석 목청 대신 울어줄 물건이지. 계속 호거술과 검기를 유지해. 네 검기를 강화해줄 음역대를 찾아야 하니깐.”
뭐 일은 체내의 나노 머신이 하는 것이니 화인천은 그저 공력을 유지하면 되는 일.
화인천이 익힌 것도 귀원공, 그러니 내 데이터를 기본으로 음역대를 찾는다. 견본이 있으니 맨바닥에 그냥 들이박는 것보다 빠르다.
어올!
괴이한 소리와 함께 녀석의 검기가 유사 강기로 강화된다.
“대단하군요.”
딱 봐도 느껴지는 기세가 검강 못지않으니 화인천의 눈이 커질 수밖에 없다.
“남는 공력을 몸에 돌린다고 생각해 봐라.”
“강기를 쓸 때보다 더 빨리, 더 강하게 검을 휘두를 수 있겠군요.”
“그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화인천이 인상을 쓴다.
“어째 급격하게 강해졌다 했더니 이런 꼼수를 쓰고 계셨던 겁니까?”
“시끄럽고, 강기에 맞는 음역대나 찾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