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산서행(02)
단주 집무실을 나와 정안각 대원들이 뒹굴고 있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에서는 여섯의 초극 고수가 한데 뭉쳐 남궁화청을 상대하고 있었다.
능숙한 천문위를 상대로 이각은 버틴다더니 호장우를 비롯한 여섯은 남궁화청을 상대로 대등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놀고 있는 녀석이 하나 있으니 다름 아닌 화인천이다.
“각주, 오셨습니까?”
화인천이 나를 보고 예를 취한다.
“단주께서 너는 뇌응대로 복귀하라시더라.”
“하아.”
내 말에 화인천이 한숨을 내쉬며 눈살을 찌푸렸다.
“합공에 끼지 못하니 방해가 된다는 겁니까?”
“대비 없이 험한 곳에 못 보낸다는 거지. 거기에 은근슬쩍 매 한 마리 빼돌릴 생각도 있으시고 말이야.”
히죽 웃어 준 다음 말을 이었다.
“호신강기나 억제해 봐.”
“예.”
대답과 동시에 화인천이 호흡을 고른다. 나 역시 호흡을 골라 호신강기를 억제한다.
화인천이 정안각 인원들과 함께 뒹굴던 데이터를 받고 마*카*투 감마에 깔린 프로그램 설정을 살짝 건드려 준다.
“됐다.”
내 말에 화인천이 호신강기를 활성화한 뒤,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하나 꺼내 건넸다.
“이제 제겐 필요 없는 것이지요?”
내가 정안각 인원들에게 나눠 준 단약이 들어 있는 주머니다. 시장통 약장수에게 산 단약이다. 매와 영통을 하려면 달에 하나씩 먹어야 한다고 사기 친.
“이걸 왜 줘? 달마다 하나씩 먹어야지.”
“지금 매와의 영통을 끊은 것이 아닙니까?”
내 말에 화인천이 물었다.
“힘들게 연결한 것을 왜 끊어?”
“뇌응대로 복귀하면….”
“네가 원하면 정안각의 상황을 알 수 있도록 다른 매들과도 연결했다.”
“예?”
“현장 상황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있어야 제때 지원을 해주지. 단주께 그대로 보고하고 명을 받도록 해.”
“예.”
화인천의 일은 그렇게 진우탁에게 떠넘겼다.
그만!
왼손의 스피커가 크게 울부짖으니 격전을 벌이고 있던 정안각의 인원들이 몸을 멈췄다.
“성혈문의 종적이 산서에서 발견되었다.”
***
마원을 필두로 여덟 마리의 말들이 관도를 내달린다.
“각주, 그냥 경공으로 내달리는 것이 더 빠르지 않습니까?”
남궁화청이 내 곁으로 말을 몰아 달리며 물었다. 일행 전원이 초극 고수에 나노 머신을 품어 체력 회복이 남다르니 속도만 생각하면 그게 맞기는 하다.
“성혈문은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그러니 가능하면 개방과 보조를 맞추는 것이 좋지요.”
“괜히 먼저 성혈문과 맞닥뜨릴 위험은 피하자? 그 말씀입니까?”
내 말에 남궁화청이 물었다.
“그렇지요.”
그것도 그거지만 마원 탓이 크다. 죄다 경공으로 내달리는데 나 혼자 말 타고 가기는 그림이 좀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고 마원을 놓고 가거나 눈에 안 띄게 뒤따르게 할 수도 없다. 내가 천문위에게 어떻게든 비벼 보려면 마원의 지원은 필수. 그러니 곁에서 떼어 놓을 수는 없다.
일행들이 타고 있는 말들은 나름 고르고 고른 명마인 데다 출발 전에 소량이나마 나노 머신을 주입해 놓은 탓에 ‘천리마’라 부르기 모자람이 없다.
말 그대로 하루에 천 리를 달려 멸왜단을 나선 지 닷새째 점심에 산서 태원 부도에 당도했다.
태원 부도로 들어서는 성문을 통과하기 무섭게 거지 한 명이 일행에게 다가왔다.
“정의맹 정안각의 분들이지요? 개방의 상 노개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상 노개가 보낸 개방도다. 일행은 개방도의 안내를 따라 발을 움직였다.
개방도가 우리 일행을 안내한 곳은 부도 서쪽의 한 장원이다. 아니 안으로 들어서니 이건 장원도 아니다.
사방을 두른 벽은 멀쩡한데 안은 건물이랄 것도 없는 공터. 건물 대신 천막 몇 개가 있을 뿐이다.
“왜 이리 늦어!”
상 노개가 천막에서 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며칠이나 기다리셨기에 그러십니까?”
“이틀. 산동에서 연락받기 무섭게 죽어라 달렸네. 산동에서 자네 움직이던 걸 생각하면 수천 리 길도 하루 만에 내달릴 기세였으니 말이야.”
“다음에 연락할 때는 정확한 기일을 정하지요.”
개방 쪽 수확 대상자들과 접촉하려면 상 노개를 통하는 것이 가장 좋았다.
“그러세.”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상 노개의 눈이 커졌다.
“허, 장강의 앞 물결이 뒤 물결에 밀리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지만 너무하는군. 안 본 지 며칠이나 됐다고…. 대공을 이룬 것을 축하하네.”
남궁화청이 천문위에 오른 것을 눈치 챈 것이다.
“장걸개의 황망장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남궁화청의 입에서 예를 차리는 대답이 나왔다.
“못 보던 얼굴이 몇 있는데?”
“보타문 보제사 속가의 호장우가 개방의 장걸개를 뵙습니다.”
“신창양가의….”
상 노개의 말에 호장우를 비롯한 인원들이 자신을 소개하고 인사를 했다.
그렇게 서로 인사를 끝내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천막 안에는 다탁과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이틀이나 먼저 오셨으니 뭐라도 알아낸 것이 있겠지요?”
의자 하나를 차지하며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상 노개야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해도 산서의 개방 분타에서 가만히 있었을 리 없었다.
“태행산 녹림 총채주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었네. 그 범인을 잡기 위해 산서 녹림의 고수들이 사방을 헤집고 다니고 있어.”
젠장, 이쪽 일도 성혈문과 관련 없다고 장담할 수 없다. 태행산 녹림에도 수확 대상자들이 있으니 말이다.
태행산 녹림도는 평범한 산적들이 아니다.
폐제(廢帝)인 건문제의 편을 들다 영락제에게 찍혀 태행산에 숨어들어 지금은 산적이 되었다지만, 그 근원은 화산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명문인 종남의 후예들.
그 탓에 태행산 녹림도는 정파 정종으로 분류되는 종남의 무공을 제대로 잇고 있다.
그 탓에 화산과 같은 수의 나노 머신이 태행산에 배정됐고 말이다.
당장 수확 대상자의 수를 따지면 오대파보다 태행산 녹림도 쪽이 더 많을 지경이다.
“어째 태행산 녹림 쪽은 생각도 않은 얼굴이군.”
상 노개가 내 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찾은 성혈문의 종적은 태행산과 무관한 모양이지?”
개방에서 평생 구른 늙은 거지다운 눈치다.
“지금까지는 그렇지요.”
“지금까지는?”
“태행산의 일에 동원된 개방 인원은 어느 정도입니까?”
“산서 분타 전체가 달라붙어 있다고 보면 되네.”
총채주에 대한 암살 시도다. 그냥 놔두면 눈 돌아간 녹림도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아니 암살 시도의 배후를 찾는다는 핑계로 산서의 정파 세력을 후려칠지도 모르니 개방이 눈 크게 뜨고 감시하는 것이다.
“그쪽으로 동원된 인원은 그냥 놔두지요.”
내가 개방에 원하는 것은 정보 수집 능력이 아니다.
무림 정의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개방의 이미지와 상 노개의 무력.
“자네가 찾은 성혈문의 종적은 어떤 건가?”
“오대파 속가인 검인문(劍刃門)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성혈문주에게 죽은 SS-11의 숙주가 검인문의 소문주다.
“검인문….”
상 노개가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검인문과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행방불명 된 소문주를 찾는데 개방도를 동원해 달라는 요청을 어제 거절했었네.”
“소문주를 아직 찾지 못했다면, 우리 도움을 거절하지는 않겠군요.”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가락을 움직여 농꾼에게 명을 내린다.
= 검인문주의 현재 위치는?
SS-11의 데이터를 수확했을 때 검인문주에 대한 제반 사항을 이미 입수한 상태다.
열 마리가 넘는 매가 태원 일대를 훑으니 그 위치를 찾는 것은 금방이다.
- 일단의 무리를 이끌고 부도 서쪽의 대령산을 뒤지고 있습니다.
농꾼의 대답과 동시에 지도가 떠오르며 검인문주의 현재 위치가 표시된다.
천막 밖으로 나오자 상 노개가 내 옆으로 따라붙으며 묻는다.
“검인문에 놈들이 숨어든 것인가?”
“검인문의 소문주 조율후를 성혈문이 노리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미 성혈문주에게 당해 죽었다는 사실은 숨긴다. 시체를 찾으면 자연스레 드러날 일이니 말이다.
“성혈문이 노리고 있다면, 그도 명단에 있는 자군.”
“예.”
“행방불명이니 이미 당했을 가능성도 크군.”
상 노개가 인상을 썼다.
“성혈문에 대한 이야기는 당장은 함구해 주시겠습니까?”
이미 죽은 아들을 구한답시고 검인문주가 날뛰기라도 한다면 내 입장 상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
“검인문주에게 말인가?”
“예. 뭔가 결과가 나온 다음에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들이 죽은 것을 확인한 상태에서 흉수를 알려 줘야 복수심에 불타 이쪽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겠는가.
“그게 낫겠군.”
소문주가 이미 죽었을 가능성을 계산한 상 노개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장원 밖으로 나오자 상 노개가 앞장섰다. 검인문으로 가는 것이다.
“상 노개, 검인문주는 지금 대령산 쪽에 있습니다.”
내 말에 상 노개가 나를 봤다. 그걸 어찌 아느냐는 눈초리.
내 손가락이 하늘을 향하자 이내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정말 신통한 매야.”
= 내가 신호하면 언제든지 달려올 수 있게 마원을 준비시켜.
- 예, 리퍼.
말 타고 산길을 오르는 것은 이상하니 마원은 개방 장원에 두고 간다.
나와 상 노개는 정안각 인원들과 한 무더기가 되어 태원 부도 서문을 나섰다.
태원 부도에서 십 리만 가면 나오는 것이 대령산이다.
전원이 초극 고수인지라 십 리 정도의 거리는 금방이다.
무장한 장정들이 한데 뭉쳐 산을 오르니 먼저 대령산에 올라 길목을 지키던 검인문 무사들의 눈에 띄지 않을 리 없다.
“이곳 대령산은 현재 태원 검인문의 통제 하에 있소.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니….”
“본인은 상 노개라 하네, 개방 장걸개의 자리를 맡고 있지.”
길을 막아서는 검인문 무사들 앞으로 상 노개가 나섰다.
“검인문의 조주선, 조 문주를 만나러 왔네. 조 문주에게 소식을 전해 주겠나?”
개방 십대 고수의 위명에 검인문 무사 하나가 부리나케 달렸다.
반 각 정도 기다리니 쉰 정도 된 풍채 좋은 중늙은이가 산길을 내려왔다. 태원 검인문주인 조주선이다. 오대산 불영검(拂霙劍)을 익혀 쏟아지는 폭우를 모조리 막아내 ‘우벽검(雨壁劍)’으로 불리는 초극 고수.
“개방이 나서 주실 줄 알았습니다.”
상 노개를 반갑게 맞이하는 것이 아직 조율후의 시체를 못 찾은듯하다.
“그런데, 뒤의 분들은….”
검인문주가 나와 일행들을 보며 물었다.
조주선이 개방에 기대한 것은 그 머릿수일진대 상 노개가 이끌고 온 것은 여덟뿐이다. 거기다 죄다 심상치 않은 기세를 가지고 있으니 묻지 않을 수 없다.
“사람 찾는 것은 개방 산서 분타 전체를 동원하는 것보다 나은 이들이네.”
“그렇습니까?”
상 노개의 말에 조주선이 일행을 돌아봤다.
“정의맹 정안각을 책임지는 이도연이라 합니다.”
내가 대표로 나서서 인사를 한다.
“정의맹 정안각주라면….”
조주선도 산동의 일을 아는 듯 했다. 이야기가 길어지면 황보세가에 이어 성혈문에 대한 말이 나올 것이 뻔해 조주선의 말을 끊는다.
“대령산에서 격전의 흔적이라도 찾은 것입니까?”
조주선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어찌 알았나?”
내 말에 조주선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당연히 SS-11의 기억 데이터 훑어서 알고 있었던 거지만 그걸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
“무인들이 주위를 통제하는 것을 봐서는 조율후 소문주의 신상에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신 것이겠지요. 격전의 흔적을 볼 수 있겠습니까?”
내 말에 조주선이 당장 몸을 움직였다.
격전장에 도착해 주위를 살펴봤다. 닷새 전의 일이라 강기로 인한 파괴의 흔적 말고는 딱히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 산짐승이 시체를 끌고 가거나 먹은 흔적은?
- 없습니다.
어딘가에 파묻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 조율후의 시체를 찾아.
- 예, 리퍼.
증강 현실로 내가 움직일 동선이 그려진다.
쿵, 쿵, 쿵!
증강 현실이 유도하는 대로 발을 굴리며 걸음을 옮긴다. 그렇게 격전장의 주위를 일각 정도 걸으니.
- 찾았습니다.
충격파로 땅속을 스캔한 농꾼이 파묻힌 시체를 찾아냈다.
“여기입니다.”
내가 한곳을 가리키자 검인문의 무사들이 재빨리 땅을 팠다. 그리고 나온 것은 어째 미라 같이 바싹 마른 시체다.
= 저게 조율후라고?
- 시체 목덜미에 사람 이빨 자국이 있습니다. 시체의 상태를 보아 피를 빨아낸 것으로 추정됩니다.
죽여서 피를 빨았다고? 성혈문 이 미친 것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