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산서행(09)
혼자 도망간다?
고려할 일이 아니다.
정안각이 만들어진 이유가 무엇인가? 성혈문을 상대하기 위해서다.
멸왜단, 신창양가, 남궁세가 모두 내가 아니라면 굳이 성혈문과 적대할 이유가 없는 곳들.
각 세력의 인재들을 끌어모아 정안각을 만들어 성혈문과 싸움을 붙여 놓고 상황이 불리해지니 혼자 빠져나간다? 그간 만들어 놓은 영향력을 모조리 버리는 병신 짓이다.
정안각의 인원들이 녹림의 천문위 둘을 상대하는 싸움판에 끼어들 수는 없다.
호거술의 합창에 낄 수도 없고, 합을 맞추는 연습을 해본 적도 없지 않나. 지금 내가 끼어들면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남궁화청과 여섯의 협공에 불협화음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일단 상 노개에게 달려간다.
“상 노개 괜찮으십니까?”
“죽을 상처는 아니야.”
상 노개가 품에서 단약을 꺼내 씹으며 몸을 일으켰다. 약을 씹어 먹는 꼴이 내상을 입은 것이 분명하다.
“이걸 드시지요. 내상에 즉효입니다.”
마*카*투를 건넸다.
“사양 않겠네.”
상 노개가 단약을 받았다.
“씹지 말고 삼키십시오.”
- 해당 개체 마*카*투 델타로 명명합니다.
상 노개가 마*카*투 델타를 삼키자 분진 폭발의 충격에서 벗어난 녹림의 고수들이 달려왔다.
경공으로 계속 내달리는 중이라면 이십 장의 차이는 좁히기 힘든 거리지만, 이렇게 발을 멈춘 상태에서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줄일 수 있는 거리다.
녹림의 고수들이 우리를 넓게 포위했고, 그 중 여섯이 뽑아 든 무기를 겨누며 나섰다.
볼 것도 없이 수확 대상자들이다.
사십 대 하나에 삼십 대 둘, 이십 대 셋이다.
- 상 노개, 중년 한 명만 맡아 주세요.
천문위에 근접했을 것이 뻔한 사십 대는 상 노개에게 떠민다.
상 노개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누렇게 물들인 양손으로 구렁이를 그리며 사십 대를 덮쳐든다.
상 노개가 내 곁을 떠나기 무섭게 삼십 대 둘과 이십 대 셋이 덮쳐든다.
쾅, 콰쾅!
천도공이 만들어낸 거력으로 칼을 휘둘러 둘을 쳐내고 밀려드는 셋의 공격을 피한다.
그리고 천문위의 전투 감각을 발휘. 물러나는 발걸음으로 땅을 굳게 밟으며 다시 앞으로 나가 재빠르게 칼을 긋는다.
카카카캉!
회가 거듭될수록 강해지는 칼질에 밀린 두 놈이 바닥을 구른다.
초극 셋을 밀어붙이고 그 와중에 둘을 굴려 버린 흉포한 칼질이 온전히 하나를 상대로 발휘되려는 찰나.
“합!”
“크합!”
기합성과 함께 강렬한 기세가 등판과 목덜미를 노리고 날아든다.
콰자자자작!
칼이 그리는 강기의 벼락이 정면의 상대를 후려친다. 그리고 그 여력을 몰아 전신을 휘돌리니.
캉, 콰캉!
내 뒤를 들이치던 둘의 강기가 벼락이 그리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튕겨 난다.
뒤로 물러나 다시 자세를 정비하는 두 삼십 대를 향해 그대로 강기의 벼락을 뿌린다.
쾅!
삼십 대 둘의 칼과 검이 교차하며 내가 뿌린 벼락을 끊어낸다.
그리고 들이닥치는 검과 칼의 연환세. 검격은 변화무쌍 덮쳐들고, 칼은 단호하게 잘라 온다.
종남의 혈유검(血揄劍)과 쇄월도(碎月刀)가 찰떡처럼 어우러져 나를 덮쳐든다.
하지만 공력까지 얽혀드는 합공이 아닌 초식 연계인 협공의 수준.
“타합!”
쾅!
내가 뿜는 도강이 커다란 벼락을 그리니, 검과 칼이 그리는 모든 궤적이 지워진다.
콰르릉!
두 번째 벼락에 옆구리를 뜯긴 칼잡이가 피를 뿌린다.
콰쾅!
세 번째 벼락에 검객은 가슴이 갈라지며 허물어졌다.
“보고만 있을 겁니까?”
“총채주!”
나와 싸운 다섯 중 아직 멀쩡한 이십 대 둘이 주위를 포위한 녹림 고수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냥 포위를 유지할 뿐 덤벼들 기색이 없다.
뭔가 이상하다. 다른 사람이 끼어들 것도 없이 천문위인 녹림 총채주만 나서도 우리에게는 수가 없는 상황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천문위 셋을 감당한 전력 따위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녹림 총채주는 전혀 나설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이유가 어쨌든 당장 나에게 나쁜 일이 아니다.
나노 머신의 치료 기능을 생각하면 내 칼에 맞아 쓰러져 있는 셋은 일각쯤 뒤에 멀쩡하게 다시 일어날 터.
원래대로라면 지금 손을 써 뇌를 곤죽으로 만들어야 하지만, 그랬다가는 가만히 구경하던 녹림 총채주와 녹림 고수들을 자극할 수 있으니 일단은 놔둔다.
천도공의 운용을 중단한다. 30초 이상 운용하면 내상을 입는 것이 천도공이니 잠시 틈이 날 때 멈춰줘야 했다.
- SS-04, 05, 14의 수확을 시작합니다.
= 수확 데이터 공방으로 돌리고 압축해놔!
잠시 천도공을 중단할 여유를 얻었다지만 공력을 억제해 호신강기까지 해제할 상황은 아니다.
힐끔, 정안각 쪽의 싸움판을 보니 천문위 둘이 협공을 하는 듯한데도 남궁화청을 중심으로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다.
우웅!
다시 천도공을 일으킴과 동시에 상 노개 쪽으로 몸을 날렸다.
사십 대 수확 대상자는 상 노개가 펼치는 황망장을 찍어 누르느라 정신없다.
콰콰쾅!
상 노개의 양손이 그리는 누런 구렁이의 용트림이 격해지는 순간, 내 발이 바닥을 박찼다.
천문위의 전투 감각이 그의 등판을 확실히 그어 버릴 순간을 찾은 것이다.
콰르릉!
내 칼이 벼락을 그리니 그가 순식간에 검을 돌려친다.
캉, 콰콰쾅!
검이 그린 궤적에 벼락이 튕겨 났다. 기습 실패. 하지만 그의 몸을 노리는 건 내 칼만이 아니다.
콰앙!
누렇게 물든 상 노개의 쌍장이 그의 몸에 거칠게 틀어박히니 입으로 피를 뿜으며 허공으로 튕겨 날 수밖에 없다.
- SS-03의 수학이 시작됩니다.
그가 무력화 된 것이 확실하다는 농꾼의 보증이 흘러나왔다.
수확은 공방 데이터베이스에 맡기고 바로 주위를 살핀다. 포위망을 유지하는 녹림 고수들은 여전히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인다.
총채주 역시 방관하는 태도에 변함이 없다.
도대체 뭔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녹림이 우리에게 시간을 주니 우리는 그 시간을 활용해 눈앞의 상대를 줄일 뿐이다.
- 상 노개, 잠시 저를 지켜 주시겠습니까?
천도공을 멈추고 상 노개에게 전음을 보낸다.
- 뭘 하려고 그러나?
- 저들의 뒤를 칠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상 노개의 물음에 바로 전음으로 답했다.
- 해보게.
승낙과 동시에 상 노개가 내 곁에서 경계를 섰다.
우웅!
천도공을 운용한다.
= 유심조, 적용!
동시에 농꾼에게 명해 유심조를 펼친다.
몸이 무거워지고 숨통이 죄어와 호흡이 곤란해진다. 오감이 흐릿해지고 심장마저 쥐어짜인다.
천도공의 거력이 전신을 짓누르는 부담으로 변하니 견디기 힘들다. 그래도 이를 악문다.
천문위의 감각으로 적을 찾는다.
아홉의 인영이 뒤섞인 격전장.
음파의 울림을 따라 공력을 굴리고 있는 여섯이 느껴진다. 정안각의 여섯이다.
쩌릿쩌릿한 뇌기를 전신에 감은 것은 남궁화청, 후끈한 열기로 몸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는 것은 녹림 칼잡이요, 끊임없이 흐르는 뭔가를 전신에 휘돌리는 것이 녹림의 검객이다.
그렇게 그들이 명확해지는 순간, 전신을 짓누르는 모든 것이 사라졌다.
바로 땅을 박찬다. 그리고 느껴지는 후끈한 열기를 향해 칼을 휘두른다.
쏴아악!
열기가 순간 사그라든다 싶더니 격렬하게 타오른다.
순식간에 전신을 휘감는 열기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지만 사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휘익!
몸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바닥을 격하게 구른다. 농꾼이 방수를 움직인 것이다.
“커헉!”
몸이 멈추기 무섭게 입에서 피가 튄다. 천도공과 유심조를 함께 펼친 탓에 내상을 입은 것이다.
= 내상 치료!
바로 농꾼에게 치료를 시킨다.
“죽인다!”
유심조에서 벗어난 탓에 상대의 호통이 똑똑히 들린다. 피가 쏟아지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있는 것이 한 칼 먹이긴 했는데, 좀 얕았던 모양이다.
젠장. 놈이 도강을 날리는 모습이 확실히 보인다. 다시 방수가 움직이겠거니 했는데.
“피하게!”
상 노개가 내 앞을 틀어막으며 쌍장으로 도강을 받아낸다.
콰콰쾅!
굉음과 함께 상 노개의 전신이 허공으로 튕겨 났다. 내상을 입겠지만 걱정하지는 않는다. 마*카*투 델타를 먹였으니 말이다.
상 노개를 치운 녹림의 도객이 다시 내게 칼을 휘둘렀지만 이번에는 한 명이 아닌 떼거리가 내 앞을 막았다.
“끼요옷!”
“까앗!”
“오로롤!”
신창양가의 셋이다. 호거술의 합창으로 힘을 더한 창강이 도강을 막아낸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호장우를 비롯한 셋이 합창하며 도검을 휘둘러 녹림 도객을 상대한다.
콰르르릉!
한쪽에서는 남궁화청이 십삼섬전뢰를 펼치며 녹림의 검객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내 습격으로 녹림 천문위 하나를 쓰러트리지는 못했지만 둘을 갈라놔 협공을 쓰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뭐, 나를 구하려고 정안각 여섯이 달려와 이 여섯과 남궁화청의 협공이 깨지기는 했지만, 그 덕에 상 노개와 나도 협공을 깨트릴 염려 없이 싸움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 내상 치료 끝났습니다.
내상과 유심조의 반동에서 벗어난 탓에 사지에 다시 힘이 들어간다.
- 상 노개 움직일 만하시면 부각주 쪽을 부탁합니다.
몸을 일으키며 상 노개에게 전음을 날렸다.
- 알겠네.
상 노개의 대답.
- 다시 한 칼 먹이려면 준비가 필요하니 좀 버텨 봐.
바로 정안각 여섯에게 전음을 보내고.
우웅!
천도공을 일으킨다.
30. 29…
다시 유심조의 공능이 내 몸을 지배한다.
“무슨 개수작을!”
내 기세 변화를 읽은 듯 녹림 도객의 노성이 터진다. 격한 칼질을 타고 도강이 휘몰아친다.
“끼요옷!”
“까앗!”
“오로롤!”
이에 셋, 셋 두 조의 합공조가 호거술의 합창으로 힘을 모아 이를 막아낸다.
쾅, 콰콰쾅!
힘과 힘의 격돌에 굉음이 귀를 울리고 그 사이사이 호거술의 합창이 귀를 괴롭힌다.
25, 24…
천문위의 전투 감각에 녹림 도객의 기세가 걸려든다.
내게 한 칼 맞은 탓인지 좀 전보다 열기가 옅게 느껴진다.
18.
순간, 힘이 터져 나간다. 한달음에 열기와의 거리를 줄이고 그 근원을 향해 칼을 휘두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노성과 함께 팔 하나가 허공을 난다. 녹림 도객의 팔이다.
과연 천문위, 이번에도 멱따는 것은 실패다.
“큭!”
피를 토하며 허물어지는 나를 정안각 여섯이 뛰어넘는다.
“오로롤!”
그리고 팔 하나 잃은 녹림 도객을 향해 호거술의 합창이 터져 나갔다.
- 리퍼, 녹림 총채주가 움직입니다!
젠장, 간신히 천문위 한 놈 반편 만들었다 싶으니 멀쩡한 놈이 새로 들어오는 건가?
= 내상 치료는 자동으로!
총채주까지 나서니 유심조를 줄 창 써야 할 것 같았다.
“부각주 쪽으로 합류를!”
정안각 여섯에게 외쳤다. 상대편에 천문위 하나가 더 가담한다면 한곳으로 뭉치는 것이 나았다.
하지만 팔 하나를 잃었어도 천문위는 천문위.
하나 남은 팔로 맹공을 퍼부어 정안각 여섯의 발을 완전히 묶어 놓았다.
“젠장!”
그 사이에 총채주는 남궁화청 쪽으로 달려들었다.
상 노개와 함께 녹림 천문위 하나를 몰아붙이고 있는데 갑자기 녹림 총채주가 난입하니 결과는 뻔하다.
콰콰콰쾅!
용트림 치던 누런 구렁이가 푸른 운무에 휘말리고 연이어 터진 빛줄기에 찔려 사라지니, 그 자리에 상 노개가 전신으로 피를 뿜으며 허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