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오리지널(01)
왜놈에게 데이터와 영단을 넘긴 작자가 오리지널이라면, 나를 상대로 직접 나서지 않을 만하다.
오리지널 리퍼는 연구소에서 회수 코드를 발동한 상태. 연구소와 통신이 재개되거나 나와 접촉하면 나노 머신의 기능이 멈추고 회수된다. 그러니 성혈문 놈들을 보냈던 거다.
성혈문의 뒤에 있던 흉수가 오리지널 리퍼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처리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 통신 벌레 잔뜩 만들어서 십만대산으로 보내.
광동과 광서에 설치된 안테나가 없어도 상관없다.
수천 수만 마리의 통신 벌레를 동시 운용해서 고용량 데이터를 음파 통신으로 분할 다운하기 위해 정확한 좌표가 필요한 것이지, 저용량 데이터를 뿌리는 데는 정확한 좌표 설정 따위 필요 없다.
= 통신 벌레 수만 마리가 천지 사방에서 회수 코드 틀어 재끼는데 견딜 수 있나 보자고!
호신강기로 전파 통신이 안 먹힌다고? 음파 통신이 있다. 귀가 먹어도 뼈와 살이 음파를 느낄 수 있다고!
- 오리지널이 음파 통신 채널을 보유하고 있는지 확인이 필요합니다.
하긴, 음파 통신은 내가 생각해내기 전에는 써먹을 생각을 못 하긴 했다.
= 짝퉁 매 쓰는 것 봤잖아. 그 편리함에 젖어 통신 벌레도 베끼고 음파 통신 채널을 만들었을지도 모르지.
가만히 있는 것보다 뭐든지 해보는 게 낫다. 잘 되면 쉽게 가는 거고, 안 되면 죽어라 구르는 수밖에 없다.
어쨌든 마교가 상대다. 정의맹만으로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상 노개.”
“왜 그러나?”
내 부름에 상 노개가 답했다.
“왜놈이 상 노개와 싸울 때 소수마공을 쓰지 않았습니까?”
일단 오리지널 리퍼가 마교를 부린다면 이쪽도 덩치를 키울 필요는 있었다.
“아, 그랬지. 확실히 마교의 소수마공이었어.”
내 물음에 상 노개가 깜빡했다는 듯 답했다.
“성혈문의 핵심 인사가 그저 그런 마공도 아닌 소수 마공을 사용했다면, 마교와 성혈문이 반목한다는 사숙의 예상은 틀린 것이군요.”
상 노개의 말에 조유덕이 바로 한마디 했다.
“일부와 반목하고, 일부와 손을 잡았을 수도 있지.”
“아니 사숙, 그냥 인정하시지 그걸 또 그렇게 피해 가십니까?”
상 노개의 말에 조유덕이 툴툴댔다.
“마교 놈들이 성혈에 대해 알고 있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상 노개와 조유덕, 둘의 투닥임은 무시하고 말한다.
“마교가 무림 최강의 세력이라지만, 그 덩치가 덩치인 만큼 파벌이 많네.”
조유덕의 말이다.
“그 파벌 중 하나가 성혈을 이용해 마교의 다른 파벌들을 병합한다 생각해 보시지요.”
“그 전에 자네가 먼저 성혈 보유자들을 만나야겠군. 자네는 놈들이 성혈을 강탈할 수 없도록 손을 쓸 수 있잖는가?”
“그게 마교 놈들에게는 안 통하니 문제지요.”
“무슨 소리인가?”
상 노개가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제가 쓰는 수법은 일종의 독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독은 마교 쪽 마공을 다년간 익힌 자들에게는 잘 통하지 않습니다.”
오리지널이 프로그램 전문가이니 농꾼이 깔아 놓은 강탈 방지 프로그램들을 해킹할 수도 있었다.
“소수마공을 쓰던 왜인에게는 통하지 않았나?”
왜놈이 소수마공 썼다는 것을 깜박했듯 좀 깜박하고 넘어가면 안 되나?
“아마, 소수마공을 속성으로 익혀서 통했던 걸 겁니다. 제가 육가장 일로 처음 왜놈과 부딪쳤을 때 소수마공을 쓰지 못했으니까요.”
“하아, 끔찍한 소리군.”
내 말에 상 노개가 진저리를 치며 말을 이었다.
“자네 말은 성혈의 비결을 아는 자가 성혈을 이용해 마교의 파벌을 하나로 모으기 전에 정파의 힘을 모아 쳐들어가자는 거군,”
“예.”
“그런데 정파가 그렇게 움직이면 마교도 이에 대응하기 위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하나?”
정파가 노골적으로 움직이면 마교도 파벌 싸움을 그만두고 뭉치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러니 개방에서 정파의 고수들을 비밀리에 모아 주십사 하는 겁니다.”
“자네가 원하는 고수들은 아무래도 천문위겠지?”
“예.”
정파의 천문위들을 모아서 어떻게든 오리지널을 잡는 거다. 십만대산으로 가서 마교를 급습하든 뭐하든 해서라도 말이다.
“그런데, 천문위쯤 되면 보통 문파의 원로이거나 주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그런 분들을 제가 어찌 원하겠습니까? 그저 창걸개 같은 분들을 모아 주십사 하는 거지요.”
“나도 개방 십문 중 하나인 백화문의 문주인데?”
내 말에 조유덕이 뚱하니 말하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마교가 성혈 강탈을 나서면 피해 볼 당사자 중에서 천문위들을 모아 달라는 소리군.”
상 노개도 조유덕의 말은 못 들은 척 내 말뜻을 헤아린다.
“예.”
그 말대로다. 중원에 퍼져 있는 수확 대상자는 총 이백, 그중 천문위로 짐작되는 자들이 수십이다.
“그러려면 자네가 가진 명단을 공개해야 하지 않나? 명단이 드러나면 생기는 폐해가 어떤 것인지 자네가 가장 잘 알 텐데?”
상 노개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명단 공개를 거부하기 위해 그럴듯한 소리들을 했었으니깐.
“성혈문은 특이한 힘을 가진 소수였지요. 하지만 마교도는 다수입니다. 아니 중원에 퍼져 있는 교도들을 생각하면 개방도보다 더 많지 않습니까? 성혈문을 통해 성혈의 특징을 파악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머릿수라면 어렵지 않게 성혈 보유자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상대는 오리지널 리퍼. 수확 대상자의 명단을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니 더는 명단을 숨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럼, 일단 형산으로 가세.”
“예?”
상 노개의 말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화산과 공동부터 들리지 않고요?”
기련신마는 섬서 정파의 골칫덩이. 그를 처리했으니 화산과 공동에 알려야 하는 것이 먼저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위치를 따져도 화산이 가깝다. 황하를 넘은 탓에 지금 서 있는 곳은 산서 땅이라지만, 거리를 따지면 화산은 백 리도 되지 않는 곳에 있다.
공동은 화산보다 몇 배 더 멀다지만 그래도 천 리가 안 된다.
이에 비해 형산은 어떤가? 그냥 일직선으로 내달려도 이천 리가 넘는다. 길을 따라가면 너끈히 삼천 리 거리다.
화산과 공동은 황하만 넘으면 되는데, 형산은 거기에 장강도 넘어야 하는 것이다.
“성혈문의 일만이라면 가까운 화산이나 공동을 먼저 들리는 것이 순리지, 무당 때처럼 말이야. 하지만 이제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성혈문이 아니지 않나.”
이제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성혈문이 아닌 오리지널이다. 아니 개방과 여타 정파의 입장에서는 성혈의 비결을 알고 있는 마교다.
마교가 어떤 곳인가? 광동과 광서 두 지역의 패권을 오롯이 쥔 무림 최강의 세력이다. 그런 마교에 비하면 성혈문은 듣보잡 암중세력일 뿐이다.
그런 마교를 상대하는 일인데, 가까운 화산이나 공동을 제쳐 두고 형산부터 가야 하는 것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성혈문이 마교와 관련이 있으니 화산과 공동에도 빨리 알려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팔파 중 지리적으로 십만대산과 가장 가까운 곳이 형산이네. 십만대산에 웅크린 마교를 가장 잘 아는 것이 형산이란 말일세. 마교를 상대하는 일에 형산이 빠져 있으면 다른 방파에서 어떻게 나오겠나?”
형산이 마교 전문가라면 마교 일은 형산에 확인부터 할 것이 분명했다.
“거기에 성혈문의 일로 형산이 우리를 청했던 일이 있네. 하던 일은 마무리해야 하지 않겠나?”
아, 형산으로 가는 도중에 일이 터졌지.
“그렇지요.”
형산이 먼저 청했는데 청하지도 않은 화산과 공동부터 들린다면 형산의 심기가 불편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에 미교를 상대하는데 핵심이 되어 줄 형산이다. 괜히 홀대한다는 인상을 줘서 일을 어렵게 만들 필요 없었다.
그렇게 형산 행을 결정하고 다시 황하를 넘었다. 하남 섬주 주도에 객잔을 잡고 정안각 여섯에게 연락했다. 그렇게 객잔에서 정안각 인원들을 기다리며 화인천과 통신한다.
“이쪽 일은 일단락됐으니 당장 단주께서 오실 일은 없다 전해 줘.”
- 일이 일단락되었다면 육가장의 천문위 둘은 어떻게 된 겁니까?
내 말에 화인천이 물었다.
“염왕께 보냈지.”
- 맙소사, 죽였단 말입니까?
“그래.”
- 강남 흑도맹이 흔들리겠군요. 남궁세가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 같다고 단주께서 인상 쓰십니다.
지금 강남 흑도맹이 흔들리면 제일 큰 이득을 보는 곳이 남궁세가다. 죽 쒀 개 줄 판이니 진우탁이 인상을 쓰는 것은 당연하다.
“이쪽은 기련신마까지 상대했다고! 그런 쪽으로 신경 쓸 정신 따위 없었다.”
진우탁이 나를 타박하지 못하도록 핑계를 댄다.
- 기련신마를 처리했다면 공동과 화산을 상대로 잔뜩 생색을 낼 수 있겠군요.
“생색은 무슨, 지금 코앞에 있는 화산도 못 들리고 있거든!”
- 예?
“성혈문 놈들의 뒤에 마교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 그럼, 태호에서 단주님을 막아섰던 자와 그 일당들이 뭔가의 오해가 아니라 성혈문 놈들의 지원이었다는 말이군요.
“그래.”
- 복귀하시는 겁니까?
“아니, 그 일 때문에 바로 형산으로 간다.”
- 형산으로 가신다고요?
“그래.”
- 마교와 진짜로 한바탕 할 생각이냐고 단주께서 물으십니다만?
“성혈문의 비결을 마교가 모조리 가져간 상황이야.”
- 형님이 성혈문 수작들의 파훼법을, 아니 마교가 작정하고 목을 노릴 수밖에 없겠군요.
“그래. 그러니 마교와의 싸움은 피할 수 없어.”
- 단주께서 놈들을 찾으면 그냥 쫓아낼 게 아니라 죽여야겠다고 하시는군요.
정의맹 쪽에서 마교 놈들의 신경을 건드려 주겠다는 소리다.
물론, 나를 위해서인 듯 생색을 내지만 진우탁의 진심은 뻔했다.
멸왜단이 무림 세력으로 전환되어 당당하게 몫을 차지할 수 있을 때까지 어떻게든 흑도맹을 유지시키겠다는 거다.
마교와 분란이 일어나면 남궁세가가 정의맹의 이름으로 강남 흑도맹을 칠 수 없게 되니 말이다.
”단주께 감사하다 전해 줘.“
- 그러지요.
그렇게 화인천과의 통신을 끝내고 객잔에 드러누웠다.
***
호장우를 비롯한 정안각 여섯과 합류한 후 형산을 향해 출발했다.
말을 타고 관도를 따라 이천 리를 내달려 동정호와 맞닿은 곳, 형주부 감리에 도착하니 형산에서 보낸 쾌속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형산파에서 운영하는 쾌속선은 천 리 물길을 여섯 시진 만에 주파해 형산현에 닿았다.
형산현에서 형산을 오르는 것은 금방이었다.
원래 예정보다 늦게 왔다지만 어쨌든 우리는 형산이 청한 손님, 기다릴 것 없이 바로 거처로 안내된다. 그리고 나홀로 장문인에게 안내되었다.
형산 장문인은 늙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건장한 덩치를 지닌 도사였다.
“형산 장문 송정이네.”
“정의맹, 정안각을 맡은 이도연입니다.”
“개방에게 대강의 연락은 받았네. 그놈들 배후에 있었던 것이 마교 놈들이라고?”
“예.”
대답하며 준비한 명단을 건넨다. 형산 소속 수확 대상자의 명단.
“흐음.”
명단을 살펴보던 형산 장문인의 얼굴이 슬쩍 어두워진다.
“이들이 배신의 우려가 있는 자들이라고?”
“정확히는 성혈을 가진 자들입니다. 배신의 우려보다는 마교 놈들의 표적이 될 일이 더 많겠지요.”
“이 중 자네가 지금 당장 볼 수 있는 인원은 한 명일세.”
형산 장문인이 앞장서니 나는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다. 형산 장문인과 함께 도착한 곳은 누군가의 거처다. 그리고 죽은 듯 누워 있는 한 명.
“내 제자인 추연이네.”
수확 대상자 중 하나다.
“사흘 전부터 일어나지 않더군. 놈들의 수작인지 알아봐 주겠나?”
숨은 쉬고 있다. 거기에 호신강기까지 느껴진다. 겉으로만 보면 그냥 자고 있는 것인데….
“장문인, 마혈의 제압을 부탁드립니다.”
상태를 살피려면 호신강기를 제거해야 하니 어쩔 수 없다.
내 말에 형산 장문인이 손을 썼다. 추연의 전신을 휘감고 있는 호신강기가 사그라짐이 느껴진다.
그리고, 당연히 들려야 하는 소리가, 수확을 시작하겠다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 왜 아무 반응이 없어?
- 신호가 잡히지 않습니다.
이건 또 뭔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