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퍼 - 무공수확자-164화 (164/175)

164화

오리지널(02)

= 무슨 소리야?

수확 대상자의 몸에 나노 머신 신호가 잡히지 않는다면 생각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다.

나노 머신 강탈.

= 죄다 스캔해.

일단 확인해 봐야 했다. 추연의 맥을 짚는 척 손목을 잡는다.

- 리퍼, 호신강기를 해제해 주시겠습니까?

농꾼의 요구에 공력을 억제해 호신강기를 해제한다. 농꾼이 자신의 기능을 총동원해 추연의 전신을 살핀다.

= 강탈당한 거냐?

- 강탈은 아닙니다. 체내에 나노 머신이 존재하고 활동 중입니다. 숙주의 현재 상태도 나노 머신이 인체로 가는 뇌의 신호를 차단해서 일어나고 있는 상태입니다.

= 오작동이라도 일어난 거야?

숙주의 생명과 건강을 챙겨야 하는 나노 머신이다. 그런데, 되려 숙주를 식물인간으로 만들다니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 오류라기보다는 누가 의도적으로 손을 댄 모양입니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작자는 농꾼을 가진 내가 아니면 한 명뿐이다.

= 오리지널의 수작이라는 소린데….

도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려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다. 고민해 봐야 나오는 것은 추측에 짐작뿐이다.

사실을 알 수 없다면 그거라도 해야지만, 사실을 알 방법이 있다면 괜히 머리 굴릴 필요 없다.

= 기억 데이터 뽑고 나노 머신 정상화할 수 있지?

- 시간이 좀 걸리지만 가능합니다.

= 해.

- 예, 리퍼.

대답과 동시에 눈앞으로 문자열이 빠르게 흐르고 온갖 그래프가 요동친다.

“어떤가? 뭐 좀 알겠는가?”

형산 장문인이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추연 도장이 지닌 성혈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알아냈습니다. 다만,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릴 듯합니다.”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인가?”

형산 장문인의 얼굴이 밝아진다. 추연 도장을 치료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시도는 다 해본 모양이다.

“예.”

고개를 끄덕였다. 몸에 문제가 있다 해도 나노 머신만 정상화 되면 다 알아서 해결될 일이다.

“무당에서는 태청단을 받았다 들었네.”

형산 장문인의 말에 겉으로는 태연한 척 속으로 미소 짓는다. 그래, 형산도 당당한 팔파의 일원으로 무당에 밀리면 안 되지.

“원공단이네.”

형산 장문인이 작은 목함을 내밀며 말했다. 원공단, 원숭이가 볶은 단약이라는 웃긴 이름과는 다르게 태청단과 동급인 영단이다.

“영약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마교와의….”

“개방에 이야기를 들었네.”

형산 장문인이 내 말을 끊으며 말을 이었다.

“천문위를 모아 십만대산을 오를 예정이라고?”

“예.”

“마교와 싸우는데 우리 형산이 빠질 일은 없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받게.”

이렇게 확실히 말을 해주니 냉큼 받아든다. 솔직히 원공단을 먼저 내주지 않았으면 추연 도장의 치료 핑계로 영약 좀 뜯으려 했는데….

“나는 나가서 호법을 서겠네.”

형산 장문인이 밖으로 나갔다.

추연 도장을 치료하기 위해 내가 할 일이라고는 없다. 그저 농꾼의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릴 뿐이다.

이 각이 지나도 눈앞을 흐르는 문자열과 그래프의 향연은 멈출 줄 모른다.

= 왜 이렇게 오래 걸려?

- HG-14를 해킹 중입니다.

= 진작 말했으면….

아, 생각해 보니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없다.

농꾼이 나노 머신을 해킹할 때 나는 숙주의 신체에 피해를 줘 나노 머신의 기능을 해킹 방어가 아니라 치료 기능 쪽으로 돌리게 했지만, 지금은 나노 머신이 숙주를 식물인간으로 만든 상태다.

숙주의 생명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지킨다는 대전제가 무너진 개체에 그딴 짓을 했다가는….

형산과 척을 질뿐이다.

= 계속 수고해.

얼른 말을 바꾸고, 농꾼이 알아서 해킹을 끝낼 때까지 조용히 기다린다.

다시 일 각이 지나자, 그제야 들려야 할 소리가 들려왔다.

- HG-14의 수확을 시작합니다.

= 해킹은 끝난 거냐?

- 예. HG-14의 기능은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아!”

농꾼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추연 도장이 몸을 일으킨다.

“보이고, 들린다. 느껴져!”

자신의 손을 살피고 몸을 만지는 꼴이 아무래도 오감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로 누워 있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형산 장문인 이 양반은 제자 마혈 짚어 놓으랬더니 그냥 공력만 제압해 놓은 건가? 마혈을 제압당한 인간이 너무 멀쩡하게 움직이잖아!

“공력이….”

추연 도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진다.

“치료를 위해 장문인께서 제압한 것이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내 말에 추연 도장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누구시오? 본산에서 본 적 없는 얼굴인데?”

“이도연이라 합니다.”

“추연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데, 치료가 끝난 겐가?”

밖에서 형산 장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치료는 끝났으니 들어오셔도 됩니다.”

내 말에 형산 장문인이 냉큼 들어왔다.

“두 분 이야기 나누시지요. 저는 거처로 내려가 있겠습니다.”

그렇게 자리를 비켜 준다.

= 기억 데이터 검색 결과는?

- 기억 데이터는 별 것 없었습니다.

화면이 뜬다. 진짜 별 것 없었다. 수행을 위해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중에 뭔가 시커먼 그림자가 잠시 어른거린다 싶더니 바로 화면이 검어진다.

추연 도장은 자기를 기습한 작자가 누군지 보지도 못한 것이다.

= 추연 도장 나름 경지에 이른 초극 고수 아냐?

수확 대상자에 서른 중반의 나이면 귀몰색마 못지않은 실력을 지녔어야 했다.

- 수확 데이터를 비교하면 HG-15를 상대로 승률이 8할 이상입니다.

HG-15, 귀몰색마보다 고수라는 소리다. 그런 사람을 정체도 들키지 않고 쓰러트리려면….

아니 문제는 그게 아니다. 추연 도장이 당한 동굴은 폐쇄형 동굴이 아니다.

산 중턱을 이 장쯤 파고 들어간 개방형 동굴, 저런 장소에서 제압당했다면 바로 호신강기가 해제되어 나노 머신의 전파가 개방되어야 했다.

내가 형산에 닿기 전에 HG-14를 수확했어야 정상이라는 소리.

그렇다면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 기억 데이터에 조작 흔적은?

- 해킹 때 HG-14의 본체 데이터베이스에 접촉해서 확인했습니다.

조작 흔적은 없었다는 말이다.

젠장, 욕 나온다. 그렇다면 추연 도장을 제압하기 이전에 전파가 통하지 못하도록 강기 막으로 동굴 입구를 막았다는 소리다.

경지에 이른 초극 고수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강기 막을 펼치고, 그 강기 막을 유지한 채 초극 고수를 단숨에 쓰러트릴 수 있는 고수.

내가 가진 천문위 데이터에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천문위는 없었다.

그 말은 망할 오리지널이 천문위를 넘어 천강의 경지에 오른 고수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 아닌가.

다른 사람의 협조를 얻고 어찌어찌 꼼수를 써야 간신히 천문위를 잡는 내 지금 실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들다는 소리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은 태청단에 원공단, 소림에서 대환단을 얻어 최상위 영약 셋을 한 번에 복용한다 해도 천문위가 될 뿐이다.

그 정도로는 안 된다. 천강일지도 모를 오리지널을 상대하려면 뭔가 다른 수가 필요했다.

그렇게 머리를 굴린다. 굴리고 굴리고, 피로한 머리를 농꾼을 시켜 회복을 시켜 가며 굴린다.

그렇게 한참 굴리다 보니 뭔가가 떠오르기는 했다.

= 가능해?

- 이론상 가능합니다.

= 천강의 고수에게 이게 통할까?

- 아무 대책 없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 그렇지? 그럼, 가능하도록 통신 벌레들 생산해.

- 예, 리퍼.

일단 무기 하나는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다시 머리를 굴린다. 떠오르는 것들을 마구잡이로 늘어놓으며 농꾼에게 실현 가능 여부를 묻는다.

- 이건, 제작이 문제가 아니라 리퍼의 몸이 견딜지 말지의 문제군요.

= 일단 제작해.

그렇게 필요한 것들을 공방에 주문하고 멍하니 앉아 있자니 눈앞으로 상 노개의 얼굴이 들이닥쳤다.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건가?”

상 노개가 어이가 없다는 듯 묻는다. 그런 상 노개에게 동조해 나를 보고 있는 사람들은, 조유덕을 비롯한 일행들이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형산 장문인에 추연 도장까지 끼어 있었다.

“뭐 좀 생각하느라 그랬습니다.”

혼자 골머리를 싸매고 있었던 시간이….

= 얼마나 지난 거야?

- 기억 데이터 조작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는 보고로부터 894분 46초 경과했습니다.

죄다 몰려나올 만했네.

***

수확 대상자들을 형산 본문으로 불러들이는 시간 동안 구상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몇 가지 구상을 시도한다고 개봉에서 받은 개구단을 죄다 소모했지만, 상 노개가 따로 챙겨 온 개구단 서른 개를 내게 넘겼다.

거기에 형산에서도 개구단과 동급인 화원단을 지원해 줬기에 영약이 모자라 실험을 못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렇게 내 힘을 불릴 수단을 찾으며 틈틈이 수확 대상자를 맞이했다.

형산에서의 수확은 무난했다. 형산의 수확 대상자는 전부 열 명, 추연 도장을 제외하고는 문제 있는 수확 대상자는 없었다.

그중 천문위가 셋이다. 개인적으로 그들을 설득했음은 물론, 형산 장문인으로부터 그들 셋의 동원을 약속받았다.

오대산에서 유심조를 얻었듯 뭔가 내가 바로 써먹을 만한 기예가 있을지 몰라 눈을 크게 뜨고 수확 데이터를 훑었지만, 소득이 없었다.

형산 장문인의 친필 서한이 개방을 통해 남은 칠파를 향해 날아갔다. 물론 거기에는 각파 수확 대상자들의 명단도 같이 끼어 있었다.

각파 본산에 수확 대상자들을 미리 불러 모아 놓기 위해서다. 내가 각 파의 본산에 올라 명단을 밝히고 수확 대상자들을 소집하는 것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무당은 들릴 필요가 없으니 소림으로 가지요.”

무당은 팔파 중 가장 먼저 수확이 완료된 곳이니, 형산과 개방의 서찰만으로도 충분했다.

무당 장문인으로부터 서신으로 확답도 받은 탓이니 바로 소림으로 향한다.

동정호까지 느긋하게 배를 타고 간다. 소림 본산이 수확 대상자들을 불러들일 시간이 필요하니 지금 우리가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소림에서 일이 끝나면 정신없이 바빠질 예정이었다.

하남의 소림을 거쳐 섬서의 화산, 공동을 돌아 사천의 청성, 아미를 지나 운남의 점창까지. 그렇게 천문위를 끌어 모아 다시 형산으로 가 대기한다.

정의맹이 태호로 숨어든 마교의 천문위를 잡아 죽여서 마교와 분쟁을 일으키면, 형산에 대기한 천문위들이 십만대산으로 달려가 오리지널을 처리한다.

그게 내가 세운 계획이다.

동정호를 지나 감리에서 배를 내려 말을 몰아 북상한다.

소림까지 천사백 리. 빨리 가고자 하면 하루 만에 도착할 수도 있는 거리다.

길 가는 일은 마원에게 맡겨 놓고 나는 계속 머리를 굴린다.

= 공방에 여유가 있나?

- 3시간 뒤면 여유가 생길 듯합니다.

= 피풍의,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이거 말고 예전 꺼.

지금 내가 입고 있는 것은 형산에 오른 다음 공방에서 제작한 개량형 피풍의이다.

아니 피풍의 뿐만 아니라 방수를 비롯해 입고 있는 모든 것이 새로 만든 것이다.

=스무 벌 정도 생산해.

- 예, 리퍼.

나와 함께 움직일 천문위들에게 죄다 피풍의를 입힐 생각이다.

십만대산은 마교의 앞마당, 거기에 오리지널이 데이터를 넘기고 영약을 먹여 만들어낸 천문위들이 얼마나 있는지 모를 일이다. 최대한 빨리 치고 빠지는 게 좋았다.

그렇게 머리를 굴리는 와중에 농꾼의 보고가 귀를 울린다.

- 리퍼, 마*카*원 베타의 치료 기능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마*카*원 베타, 사제에게 심어 놓은 나노 머신이다.

바빠 죽겠는데 이 녀석은 또 누구에게 처맞고….

- 마*카*원 알파의 치료 기능이….

사부도 당했다고!

= 현장 상황 중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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