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오리지널(13)
농꾼이 들려주는 구결을 듣는다.
천강인 BZ-08의 데이터가 적용된 상태인지 그때와는 뭔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슬그머니 그 구결대로 운기를 해본다. 천문위 흉내도 제대로 낼 수 없었던 때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황학약을 통해 익힌 운기법, 황학약에게 받은 데이터와도 뭔가 다르다.
이게 천강과 천문위의 차이인가?
손이 슬그머니 칼자루를 잡는다. 그리고 유심조를 운용한다.
천강의 전투 감각이 칼날처럼 벼려지며 놈의 움직임을 잡아낸다.
내가 알던 유심조가 맞나 싶을 정도로 놈의 움직임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쪽의 기세가 변한 것을 눈치 챈 놈이 검을 움직인다.
그대로 놈을 향해 발을 옮기며 베어낸다.
콰캉!
막혔다. 하지만 내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지도 칼날 같이 벼려진 감각이 흐려지지도 않는다.
약발이 만들어낸 흐름은 건재하고 BZ-08의 전투 감각은 여전히 내 몸을 지배하고 있다.
“네놈이 어떻게 도령체를!”
놈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진다.
그에 칼로 대꾸한다. 순식간에 거리를 줄이고 그 목을 긋는다.
하지만 놈은 제대로 된 천강, 바로 검을 움직여 막아내고 반격한다.
쾅, 카쾅!
충격이 몸을 덮치지만, 발을 슬쩍 움직이니 그대로 발걸음을 따라 충격이 흘러내린다.
콰콰콰쾅!
애꿎은 발아래의 땅바닥만 뒤집힐 뿐이다.
뒤로 훌쩍 물러나 놈과의 거리를 만든다. 아니 거리를 만들기 무섭게 바닥을 박찬다.
순식간에 거리가 사라지며 휘둘러지는 도격. 한 방 치며 바로 빠져나오는 일격일탈의 칼질.
쾅, 콰캉!
하지만 일격은 막히고 일탈의 발걸음은 따라붙는 놈의 발을 떨쳐내지 못한다.
콰카카카카쾅!
그러니 쏟아지는 놈의 검격을 상대로 도격을 날려 맞받을 뿐이다.
파핫, 팟!
몸 곳곳에서 피가 튄다.
마교 역사상 손꼽히던 고수, 불모의 월하검답게 내가 쓰는 도격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다.
하지만 절단상도 아니고 기껏해야 피륙의 상처. 나노 머신의 상처 치료 기능으로 입기 무섭게 사라진다.
칼이 내 마음대로 움직인다. 신묘한 검격이 내 몸을 긋고 지나가지만, 내 눈은 그 검격의 신묘함을 담아내고 내 머리는 그 묘리를 파악한다.
그리고 내 몸이 그걸 따라 펼친다. 칼과 검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묵직함에 놈이 인상을 쓰며 뒤로 물러난다.
여유 따위 없는 얼굴. 즐거운 마음으로 놈을 따라붙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도격. 온전히 칼에 모든 힘이 실리니, 놈이 검을 떨쳐 그걸 받아낸다.
그리고 빈손이 움직이며 힘의 물결을 토해낸다.
월하검과 함께 청하신수를 쓰는 것이다. 원래 그렇게 쓰는 무공인 마냥 둘의 궁합은 찰떡.
월하검이 내 칼을 받아 옭매니 청하신수가 내 몸을 두드린다.
쾅!
충격과 함께 내 몸이 뒤로 밀린다. 몸을 두른 약발의 흐름은 아직 건재하다.
다만 공격의 기세를 잃었을 뿐. 하지만 내가 기세를 잃은 만큼 놈은 기세가 등등해진다.
그렇게 올라간 기세를 타고 몰아치는 검과 손. 이렇게 계속 몰려 가면 필패.
그러니 나도 손을 쓴다.
네놈이 월하검과 청하신수의 궁합으로 나를 찍어 누르면 나는 협공이다.
“농꾼!”
내 외침에 농꾼이 움직이고, 기세를 올리며 덮쳐들던 놈의 어깨에 불이 붙는다.
바로 놈이 몸을 숙이며 뒤로 물러난다.
파콰쾃!
놈이 있던 공간이 순간적인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 나간다.
바로 열선 공격. 20세기 일반 상식으로 만들어진 병기와 약발로 천강 흉내 내는 나의 협공이다.
열선 공격 덕에 한껏 올라가던 놈의 기세가 꺽였다. 당연히 나는 그 틈을 타고 맹공을 퍼붓는다.
칼과 검이 어우러진다. 월하검과 청하신수의 찰떡궁합이 나를 위기로 몰아넣지만, 그 궁합이 한계 잃은 유심조를 2분 30초 안에 꿇릴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파핫, 콰콰쾃!
2분 30초, 150초의 렌즈 교체 시간만 버텨내면 열선의 지원이 내려꽂힌다.
그렇게 나와 놈의 싸움은 한 시진을 넘고, 한나절을 넘어 진행된다.
그렇게 싸움이 장기전이 되자 해가 넘어가는 것은 당연지사.
해가 떨어지면 당연히 태양광을 이용한 열선 공격은 쓸 수 없다.
그러니 내가 쓸 방법은 하나다.
화악!
강기로 날개를 만들고 다수의 원통을 만든다. 그리고 주위의 돌과 흙, 나무 할 것 없이 모조리 강기의 원통에 끌어들여 갈아 버린다.
콰쾅, 콰콰콰쾅!
그리고 분진 폭발을 일으켜 강기의 노즐로 불꽃을 뿜으며 허공으로 치솟는다.
“이제 와 도망질이냐?”
놈이 노성을 내지르며 몸을 날린다. 놈도 강기로 날개와 엔진을 만들어 쫓아온다.
콰콰콰쾅!
연신 추력을 토하며 날아가지만, 놈의 추격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힘이 닿는 한 도망칠 수 있다. 그렇게 날이 새도록 도망친다.
다시 해가 뜨면 열선과 한계 벗은 유심조의 협공으로 놈이 휘두르는 월하검과 청하신수의 궁합에 맞선다.
싸움이 거듭될수록 놈도 열선을 막기 위한 시도를 했다.
먼지를 일으켜 태양광을 막는 방법이나, 기막을 펼쳤다 열을 감지해 강기화 하는 방법 등등.
하지만 그건 내가 놈과 근접전을 할 능력이 없을 때나 통할 방법이다.
일으킨 먼지는 근접전을 하며 날려 버리면 그만이다.
몸 전체를 막는 기막을 만든다고? 강기 따위 씹어먹는 힘을 담은 검격과 도격이 오가는 격전 속에서 신체 일부분도 아니고 몸 전체를 막는 기막이 유지될 리 없다.
강기도 깨질 거력이 여기저기 튕기고 휘몰아치는 것이 놈과 나의 주위니 말이다.
그렇게 밤에는 도망가고 낮에는 맞서 싸우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몇 번을 했을까?
유심조의 심법으로 벼려진 감각이 느낀다. 내 몸을 감싸는 힘의 흐름이 약해져 가고 있음을 말이다.
천강의 직감이 외치고 있었다. 천강의 데이터를 몸에 적용할 수 있는 것도, 이제 몇 분이라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태청단과 원공단의 약발이 다 된 것이다.
파핫, 콰콰쾃!
열선 공격에 놈이 다시 뒤로 물러나는 틈을 타 움직인다.
당연히 강기의 날개와 원통을 만들어 튀는 것이다.
내가 튀니 놈은 자연스레 쫓아왔다. 뒤를 쫓는 놈의 얼굴에 미소가 서린다.
놈도 내 몸을 감싸는 약발의 흐름이 약해지고 있음을 감지해낸 것이다.
그렇게 놈을 뒤에 달고 허공을 질주한 지 몇 분이 지났다.
약발이 만들어낸 힘의 흐름이 사그라진다.
화라락!
양력을 만들던 강기의 날개가 사라지고 추력을 내뿜던 강기의 엔진도 마찬가지.
전신을 지배하던 천강의 감각마저 사라지니, 나는 텅 빈 단전을 쥐어짜 기막을 만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관성과 중력에 의지한 활강으로 추력을 더해 쫓아오는 놈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쾅!
등을 두드리는 충격과 동시에 그대로 바닥을 향해 추락한다.
쿠콰쾅!
충격이 전신을 두드리고 속을 뒤흔든다.
“쿠에엑!”
속에든 모든 것들을 게워 내고 있자니 놈이 내 눈앞에 내려선다.
“이제 끝이다.”
놈이 칼을 높이 들며 싸움의 끝을 선언했다.
“그래, 끝이야.”
나도 거기에 동감한다.
파핫, 콰자작!
열선 공격에 허공이 터져 나간다.
“통하지도 않는 수법, 지겹지도 않으냐?”
놈이 공격을 피해 뒤로 물러나며 인상을 쓴다.
“278,349초.”
내 입에서 나오는 말에 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초가 아닌 시간으로 보면 77시간 19분 9초다. 놈과 내가 싸워온 시간이다.
“나도 인정해, 세 발로는 너를 못 잡는다는 거.”
내 입가에 미소가 서린다.
“그런데, 거기에 스무 발이….”
- 스물일곱입니다.
농꾼의 참견에 숫자를 정정.
“스물일곱이 추가됐거든. 그러니 이것들로도 못 잡는지 보자고!”
“이 씹어 죽일 놈이!”
놈이 노성을 내지르며 덮쳐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와 나 사이에는 이미 열선의 초점이 촘촘하게 맞춰진 상황.
화라라라락!
놈의 몸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으며 전신이 터져 나갔다.
- 공방 수거합니다. 공방 활성화, 공방과 동조해 오리지널에 대한 해킹을 시작합니다.
“그래, 열심히 해라.”
나는 뒤처리를 농꾼에게 맡겨 두고 그 자리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그런데, 이 녀석 뒈졌으니 계획은 멈춰야 하나?”
놈이 죽고 없는 상태다. 이 상태에서 계획을 진행하면 수확은 더 없이 순조롭겠지만, 팔파의 천문위를 모아 십만대산으로 달려가야 했다.
놈이 죽고 없으니 애꿎은 마교를 후려 패는 격이 된다.
솔직히 마교야 그간 해온 짓이 있어 팔파의 천문위들이 몰려가 난장판을 벌여도 억울하다 할 것도 없다.
문제는 그 뒷감당이다.
그렇게 얻어맞으면 마교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어쨌든 명색이 무림 최강의 단일 세력 아닌가.
설욕한답시고 들고 일어날 게 뻔하다. 계획대로 우리가 몰려가서 놈을 죽인 다음 전쟁이 일어나도 된다.
놈이 살아 있었으면 어차피 일어날 전쟁이었다. 그러니 전쟁 전에 위험 인자를 제거한 결사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놈은 이미 죽고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마교에 몰려가 난장판을 벌인다면?
괜히 가만 있는 마교를 들쑤신 꼴이 되는 것이다.
- 리퍼, 해킹이 완료되었습니다. 오리지널의 수확이 시작됩니다.
눈 앞을 흐르는 문자열이 잠잠해지자 입을 열었다.
“끝났으면 그 둘부터 찾자.”
- BZ-03, 05 두 개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 그 두 개체는 이미 자체 이동을 시작해서 다음 육체에 안착한 상태입니다.
하긴 삼 일이 지났는데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을 리 없다.
“그 두 개체의 행적은?”
- 십만대산에서 마지막 신호가 사라졌습니다.
BZ는 북직례 코드, 정상적인 경우라면 십만대산이 아니라 북직례 쪽으로 가야 했다.
오리지널 놈이라면 자신과 측근의 부활을 미리 대비해 놓았을 수도 있다.
“오리지널 기억 데이터 검색해서 놈들이 죽었을 경우 무슨 대책이 세워져 있는지 알아봐.”
- 예, 리퍼.
잠시 후 결과나 나왔다.
“만약을 대비해 몸이 준비되어 있다고?”
약물을 이용해 백치로 만든 무인의 몸이 열 개체나 준비되어 있었다.
“준비된 약물을 이용하면 한 달 안에 천강이 될 수 있다고? 미친놈들 진짜 준비 착실히 해뒀네.”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진다.
“그냥 계획 진행해도 된다는 소리네.”
죽은 오리지널보다 못해도 나노 머신을 품은 천강이 둘이면 충분한 위협이다.
뭐 내게는 위협이 될 이유가 없다. 낮에 밀고 들어가면 되니깐.
둘이 아니라 넷이라도 태양 아래에서 내게 덤볐다가는 열선에 녹아내릴 뿐.
“사제와 사부에게 일 끝났다고 연락해.”
이제 수확에 방해물 따위 없다. 강서에 들렸다가 이제 계획대로 팔파를 한 바퀴 돌며 무공 수확을 하면 되는 것이다.
장인규의 나날 04
소림! 무공! 업데이트! 소림! 무공! 업데이트!
연구소 정문 앞을 막은 헌터 수천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구호를 외친다.
죄다 절정의 무공을 지닌 헌터들이다. 전음에 음공 기예를 활용한 외침이라 창문을 닫고 귀마개를 한다 해도 무용지물.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해 구호를 외치는 동지들을 등에 업고 무공공급 정상화 연대 대표인 나 장인규는 협상장으로 들어선다.
그런데 협상 테이블 반대에 앉아 있는 것이 동규 형이다.
“하아!”
한숨이 나온다.
“이게 연구소의 진심입니까?”
사사로이 내 사촌 형이지만 연구소에서는 말단 연구원 아닌가.
“인규야 형 좀 살려 주라!”
동규 형이 내 손을 잡았지만 나는 형의 사촌 동생이 아니라 무공공급 정상화 연대 대표로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아니 어느 정도 책임 있는 인사도 아니고 말단 연구원을 이런 자리에 내보내다니!”
“인규야! 연구소에서 내가 너 사촌인 거 다 안다고!”
“하, 그래서? 내가 저 밖의 동지들 해산 안 시키면 형이 잘린다는 거야?”
“그건….”
“솔직히 형이 그 정도는 감당해야 하는 거 아냐?”
“야, 너 무슨 말을 그렇게….”
“나는 전에 형이 준 레져런스 블레이드 테스터로 나섰다가 죽을 뻔 했다.”
“…….”
내 말에 동규 형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하긴 사람이 낯짝이 있으면….
우우웅!
갑자기 들려오는 진동음. 동규 형의 전화기다.
“예. 예? 예, 알겠습니다.”
전화를 받는 동규 형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진다.
“야, 됐고, 밖의 헌터들이나 죄다 해산시켜. 시끄러워서 원.”
그리고 나를 보고 당당하게 말한다.
“하아, 형이랑 말 못 하겠으니 다른 사람….”
“소림 무공 업데이트됐어. 새끼야!”
“뭐?”
“뭐, 말단 연구원? 나랑은 말을 못 하겠다고? 씨바 내가 오늘 말단 연구원의 힘을 보여줄게. 너 인마, 내가 책임지고 보급 탱크 순번 꼴등으로 만들어 줄게. 소림 무공 쓰는 헌터가 한 삼만 되지? 넌 삼만 번이다. 삼만 번!”
초극 데이터 업데이트만으로는 초극 고수가 될 수 없다. 탈태환골 시 외부 칼로리를 보충해 줘야 해서 영양 보급 탱크에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 영양 보급 탱크는 아직 국내에 몇 십 개 없다.
“형, 동규 형! 사촌끼리 그러기야!”
“말단 연구원은 그딴 거 몰라, 이 새끼야!”
完